완폭대
행동팀 지리 55차 정기산행
일시:2018년 11월 11일 (일요일)
산행자:행동팀3, 황순진님,나비부인 김은의님 (총 5명)
걸어간 길: 국사암 주차장-진감선사탐-법고연습장-묵자바위-불일협곡-향로봉-불일암-완폭대-비로봉-
용추 (학연)-비로봉-비로봉능선-국사암
산행시간:08시 08분~14시 49분 (6시간 41분) 5.2km
국사암까지 차로 올랐다.
국사암은 이번에 처음으로 와 본 곳이다.
이른 시간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이동식 화장실 뒤편 길을 따라 쌍계사로 이동했다.
길에 올라서자 낙엽이 수북이 깔린 산길이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했다.
느긋하게 천천히 걸어도 넉넉한 시간일 것이다.
서둘러 진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부담 없는 마음이 가을 낙엽길을 충분히 느끼게 했다.
마음의 여유는 늦은 단풍 구경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쌍계사 경내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고 노닐며 그렇게 걸었다.
길고 험하고 먼 길을 오래 걷는 산행도 때로는 좋다.
하지만 여유롭고 한가한 산행도 또한 좋다.
오늘 산행은 거리는 짧으나 힘듦과 느긋함이 함께 할 거라고 미리 이야기해 주었다.
순진 형님과 은의님은 이미 이 코스의 상당 부분을 걸었다고 했다.
화장실을 다녀 온 사이 오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이 나를 버려두고,
산속으로 깊이 들어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빠른 걸음을 걸었다.
좋은 길이 끝나고 계곡을 건너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다.
묵자 바위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묵자 바위 앞에서 배낭을 내리고 휴식을 하는 동안 떨어진 돌배를 은의님과 순진 형님이 한 봉지 주워왔다.
막걸리 한 잔씩을 나눠 마시고 오름길을 걸어 오르다 협곡을 향해 다시 계곡으로 내려 건너갔다.
협곡 입구에서 스틱을 접어 배낭에 넣고 단단히 채비하였다.
불일협곡을 나는 이번에 3번째 올라가는 곳이었다.
사면의 비탈을 따라 길도 아닌 길을 따라 계곡을 올랐다.
예전에 그래도 건너기가 괜찮았던 곳이었는데 낙엽이 너무 쌓이고 미끄러워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위쪽을 살펴보니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있었다.
예전에 지나간 적이 있는 바위 비탈길을 버리고 위쪽 잡목 사이로 난 길을 선택했다.
산죽을 한번 잡고 당겨보니 단단했다.
건널 만하겠구나 싶었다.
잡목과 산죽을 잡고 사면을 따라 앞서 건너갔다.
아래를 바라보면 찌릿하든 계곡의 절벽은 잡목으로 보이지 않았다.
비탈을 따라 한참을 쌓인 낙엽을 치워가며 길을 만들어 주고 계곡으로 내려섰다.
조심조심 건너오는 일행들의 발 놓을 자리를 미리 알려주었다.
다행히 겁먹지 않고 그리 어렵지 않게 모두 잘 건너왔다.
다시 한차례 휴식을 하고 이번에는 계곡 우측 산비탈을 치고 올랐다.
로프도 보이지 않았고 흘러내린 바위 때문에 계곡과 떨어져 우회로 올라갔다.
급경사를 오르다 다시 계곡 쪽으로 내려서려고 하였지만
절벽이 가로막아 갈 방법이 없었다.
길을 놓쳤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 했든가.
산길에서 세심하지 못한 실수다.
아무 생각 없이 기억에 의존해 지도도 보지 않고 오르면서 길을 지나쳐 놓치고 말았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가기에도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급하게 곧추선 향로봉 지능선을 기어 한참을 더 올랐다.
몇 번을 놓친 길로 접근하려 시도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결국 향로봉까지 그냥 오르기로 했다.
어느 정도 오르자 길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 길을 따라 향로봉까지 올랐다.
나비부인 은의님은 옥천대를 보지 못해 많이 아쉬워했고
그래서 다음에 또 와야겠다고 했다.
불일협곡을 오르는 트랙은 노란색이고 우리가 올라간 길은 저렇게 그것에서 벗어나 있었다.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협곡을 따라 오르는 것 보다 힘들었다.
위에서 손을 잡아 올려주었고
뒤에서 엉덩이를 받쳐주며 기어올랐다.
세 여성분은 기어오르다 잠시 쉬는 자리에서
지리산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며 차라리 재미있어하고 협곡의
아찔함과 깎아지른 좁은 절벽에 감탄했다.
길을 놓친 미안함이 그나마 그렇게 줄어들어 고마웠다.
솔직히 말하면 협곡은 두 번을 가 본 곳이라 이 길이 내게는 더 구미에 맞기도 했다.
건너편 비로봉의 절박한 절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당당한 것 같으면서도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한 그 꼿꼿함이 가슴에 들어찼다.
발아래로 굴러떨어진 돌 하나가 한참 후에 계곡에 닿는 소리가 들려왔다.
향로봉으로 계속올랐다.
협곡의 아찔한 양 절벽만큼 능선도 그 각을 세울 대로 세우며 버티고 있었다.
경사가 급박한 만큼 심장 소리도 요동치고, 내뱉는 숨소리도 그만큼 길었다.
다급한 협곡을 발아래로 굽어보며 땀을 쏟은 만큼 올라갔다.
몸은 정직하다.
길도 걸은 만큼만 물러났으므로 정직했다.
오룩스맵 지리산길 트랙의 향로봉 바로 아래 불일폭포로 내려서는 붉은 실선을 향해 갔다.
불일폭포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길이 아니었다.
이 길로는 접근할 마음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시 돌아 나와 지척의 향로봉 정상에 올라섰다.
건너편 폭포 전망대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내려 보이고 사소한 잡담도 생생히 들렸다.
불일암이 건너다보였다.
오늘 꼭 보고 싶었든 완폭대를 눈대중으로 짐작했다.
향로봉에서 불일폭포 상단의 비탈길로 내려갔다.
이 길은 불일암으로 가는 길이다.
좁은 공터인지 채마밭인지 구분되지 않는 지점을 지나고 불일암 뒤쪽 문으로 들어갔다.
불일암에서 물을 받았다.
불일암은 적막과 고요함 속에 사람 하나 없이 침묵 중이었다.
느긋함과 고요한 평화가 양지바른 빈 의자에서 전해졌다.
아무것에도 걸림 없는 바람 같은 자유로움이 내린 것 같았다.
무념무상의 시선으로 한동안 그곳에 그렇게들 서 있었다.
우리가 올라온 저 골짜기 산길이 꿈인 듯 느껴졌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급한 나머지 "형부 내 엉덩이 좀 밀어줘!"라고 했다는
고백도 이어져 나왔다.
벌써 조금 전 지나간 일도 이제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지나간 과거의 시간이 되었다.
저곳으로 올라온 사실만이 뿌듯하고 대견함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불일암을 나와 불일폭포로 향해 좌측으로 걸었다.
걸으면서 우측에 보면 이 기념비석 옆에 불일폭포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맞은편, 불일암 쪽에 완폭대 각자가 있었다.
엉겅퀴 형님께 며칠 전 전화로 대충 위치를 파악하고 간 터라 바로 찾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어디선가 예쁜 아가씨 음성으로 방송이 나왔다.
소리 나는 곳을 돌아보니 이 각자를 향해 CCTV가 비추고 있었다.
공단에서 최근에 설치한 모양이었다.
안내판이 있는 나무 울타리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등로에서 불과 2~3미터쯤에 공터가 나타났다.
이 공터 아래를 따라 내려서면 전망대 내려가는 나무계단과 다시 만나게 된다.
10여 명 정도 넓게 앉을 만한 공터다.
엉겅퀴 형님께 전화로 확인했더니 그곳이 완폭대라 했다.
12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이곳에서 바라보는 불일폭포의 웅장함을 생각해 보았다.
공터 앞의 나무만 없다면 폭포를 바라보기에 그야말로 절묘한 곳이라 생각했다.
완폭대 서각은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심했다.
1200년 전 최치원의 글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엉겅퀴 형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자연상태에서의 바위 각자는 특별히 깊고 크게 새기지 않은 이상 풍화작용으로
대체로 200년이면 사라지고 길어야 300년 정도라고 한다.
물론 재질이나 지붕돌의 여부 등도 영향을 미칠 것이고, 야문 오석(烏石)을 깨끗이 다듬어 새기고는
수시로 관리하는 비석의 글씨는 다를 것이다.
1893년에 새긴 백운동천의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는 거의 마모되어
몇 해 전에 덧새겼고, 비슷한 시기에 새긴 용유담의 姜趾周 각자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며,
1724년 조구명이 새겼다는 용유담의
‘석결천사용노신경(石抉川駛龍怒神驚 *바위가 깎이고 냇물이 세차게 흐르니, 용이 노하고 신이 놀란 듯하다)’
8자는 아예 마멸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최치원의 글씨라면 과연 1100년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지리산에도 최치원과 관련된 설화는 많이 전한다.
문창대 환학대 세이암 쌍계석문 청학동···. 대한민국의 웬만한 절이나 작은 암자들도
창건주는 원효 아니면 의상이라고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되도록이면 절의 기원을 끌어올리고 高僧의 권위를 빌리고자 하는 후세인들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현재의 정통성과 권위확보를 위하여 죽은 자를 끌어오거나 과거의 영광에 기대는 것은 세상에 흔한 일이다.
이름난 사람의 권위에 가탁(假託)하는 일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완폭대 각자를 고운의 글씨라고 한 것도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옛사람들의 기록은 거짓이 없다고 하면서 곧이곧대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도 전해들은 것을 기록했을 뿐이다. ]
엉겅퀴님의 2018년 5월 2일 지리다방 <완폭대(翫瀑臺)를 찾아서> 에서 발췌.
완폭대에 대해서는 엉겅퀴 형님의 글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쉽게 이해되는 글이라 너무 좋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불일암과 불일폭포를 몇 번씩 다녀왔으나 그래도 조금 아는 게 있는 오늘은
그곳이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불일폭포 전망대까지 내려갔다.
성여사와 최여사는 와 본 곳이라며 나무계단에서 더이상 내려 오지 않았다.
전망대 안내판에 두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는데
완폭대 발견을 기념한 현석 이호신 화백의 사진을 아쉽게도 담지 못했다.
올봄 이화백의 지리산 산수화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전시회에서 최석기 교수님과 실상사 도법스님의 지리산 관련 강의도 들었든 터라 반가운 마음이었다.
오늘 사진은 이상하게도 필요한 곳을 겨냥하지 못하고 자꾸 빠트리고 말았다.
불일폭포 전망대에서 다시 불일암으로 올라 정규 등로에 내려섰다.
옆길로 바로 빠져 금줄을 넘어 비로봉으로 직등했다.
정규둥로를 지나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 머뭇거리다 빠르게 산죽 사이 길로 들어갔다.
아래에서 볼 때 우뚝 솟은 모습대로 짧은 구간이지만 여기도 경사를 빠짝 세우고 있는 길이다.
올라선 비로봉에서 불일폭포를 다시 보았다.
건너편 지나온 향로봉이다
위로 뻗은 향로봉 능선길을 나는 아직 걸어보지 못했다.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숙제로 남긴 곳이 어디 여기뿐이겠는가만 계속 저곳이 머리에 남았다.
비로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불일암
점심을 먹고 배낭은 벗어 두고 용추폭포로 내려갔다.
용추와 학연을 보기 위해서다.
최치원이 가야산으로 오갔다는 비밀의 통로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
급하게 내리쏟는 길에 이번에도 두 여사님은 따라오지 않았다.
내려오다 말고 배낭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순진 형님과 은의님과 셋이서만 저곳에 갔다.
백학봉과 청학봉이 비로봉과 향로봉으로 불리는 협곡 속, 불일폭포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이
이 아래 깊이 숨겨진 또 다른 폭포와 소를 만들어 비경을 감추고 있었다.
올 때마다, 볼 때마다 이곳은 신비한 느낌이 들게 했다.
마치 지금이 아주 행복하다는 듯이 부부는 다정하게 행복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돈은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좋은 직장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아가는 날들은 불안의 연속이다.
살아가는 내내 불안의 연속이라면
지금을 웃게 하고 지금을 살아야 한다.
내일 행복하기 위해 오늘 느껴야 할 행복을 저축할 수는 없더라.
지금을 공허하게 보내는 것처럼 우둔한 것도 없더라.
곧바로 생기는 즉시 다 써야 하는 것
그것은 지금의 행복이다.
행복은 저축하는 게 아니라 탈탈 털어 지금 다 써야 하더라.
대출받을 수 있으면 그렇게라도 써야 하더라.
내일 행복은 내일 그때 다시 만들면 되니까.
다시 비탈을 올라오는 길이 만만치 않지만
이런 수고 따위는 온전히 감내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숨차게 다시 비로봉으로 올라서고
비로봉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하산을 시작하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서둘러 폭신한 내리막길을 밟아 내렸다.
그야말로 목가적인 오솔길이 주어졌다.
올라올 때와 달리 급하게 쏟아지는 길이 아니었고, 낙엽이 깔린 폭신한 길은 비를 맞아도 느리게
걷고 싶은 길이었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붉은 단풍이 아직도 남아 가끔 걸음을 멈추게 했다.
빗방울은 잦아들었다 다시 시작되었지만, 산길에서의 어떤 행위도 방해할 만큼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런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지금이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뒤에서 들였다.
예전에 한 번 독오당과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도성암과 사관원 갈림길을 알아보았다.
사관원에서 쫓겨났었던 기억도 떠올랐다.
절정을 지나 떨어지는 낙엽과 단풍의 마지막 모습 앞에서 풍부한 감성의 세 여성은 탄성을 쏟아냈다.
이렇게 저렇게 찍어 달라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
가을은 이제 이 걸음 뒤에서 모습을 숨길 것이고
우리는 다시 겨울을 밟아 이 산을 오를 것이다.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 우리는 선제적으로 머릿속에 그 사람의 이미지가 먼저 그려진다.
잘 웃거나, 유쾌하거나, 점잖거나, 과묵하거나, 친절하거나 하는 여러 모습.
오늘같이 산을 오르내린 세 아줌마는
내 머릿속에서 항상 생기 넘치는 미소와 밝음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좋은 기운이 전해지고 같이 덩달아 밝아진다.
단풍보다 더 밝은 아줌마들은 많이도 웃고 즐거워했다.
언젠가
나는 내가 지나온 삶을 뒤돌아봤을 때
미련이 많아 질척이는 삶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쿨하게 후회 없이 살았다고 얘기할 수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그래서 지금 느껴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하겠다 싶은 것, 그것이 나는 이제 언제나 우선순위다.
지리산을 향해 이루어지는 내 반응은 그래서 즉각적이다.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하기로 했다.
완폭대가 그런 곳 중의 한 곳이었다.
아침에 출발했든 국사암 주차장에 다시 돌아왔다.
산행이 끝나자 비는 비다운 모습으로 우산을 받치게 했다.
비를 맞지 않고 하산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우산을 쓰고 사천왕수로 올라갔다.
사천왕수 옆으로 붉은 단풍이 마지막을 태우고 있었다.
그 빛깔에 아줌마들은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었다.
철망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둔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보았다.
사방을 향해 가지를 벌린 가운데를 손으로 끓어 낙엽을 치웠다.
감추어진 그곳이 드러났고 "엄마나 진짜네!"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였다.
아찔한 순간과 숨차고 힘든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반드시 그만큼의 고통을 수반함으로
더 깊이 느껴지는 충족감과 만족감.
어쩌면 가학적이기 조차한 이 모순적 행복은 산꾼이라야만 알 수 있는 공감일 것이다.
그것은 1200년 전 지금보다 더욱더 험하고 위험한 길을 올라
완폭대에 서서 불일폭포를 바라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나는 이 가을이 다 가기 전 하나의 숙제를 끝낸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행동팀이라는 이름으로 어느덧 쉰다섯 번째 지리산을 들어갔다.
앞으로 얼마나 더 갈 수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같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좋고, 혼자라면 그것도 좋다.
다만,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자 할 때는 갈 수 없다.
같이 걸어준 두 분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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