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석봉
독오당 97차 정기산행
일시: 2018년 12월 2일 (일요일)
산행자: 다우님, 엉겅퀴님, 에스테야님, 귀소본능님, 수야
걸어간 길: 지곡사 주차장-왕재- 헬기장-웅석봉-어천삼거리-웅석봉북능-내리저수지-주차장
산행시간: 07시 29분 ~14시 26분 (전체시간 6시간 56분) 8.4km
산은 구름에 뒤덮여 온통 가려 있었다.
내리 저수지 옆 주차장은 황량이 비어 있었고, 빈 주차장으로 바람이 불어 지나고 있었다.
허한 풍경 속에 우리들만이 산을 향한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산행지를 지정하지 못하고 지리산을 향해 달리는 차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했다.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굳은 의지로 웅석봉을 가자는 에스테야 형의 의견을 이번에는 따랐다.
비가 내리면 그 순간 바로 산행을 포기한다는 내 말에 동조자들은 눈빛으로 서로의 뜻을 교환했었다.
에스테야 형을 놀려보려는 심사이지만, 대장님은 산행 후에 솔직히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는 고백을 했었다.
대장님의 몸 상태가 그 정도로 극히 불량했었다는 말일 것이다.
해외 트레킹 중 고산증으로 고생한 여파가 아직 지속하는 중이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선녀탕을 지나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고, 에스테야 형이 앞서 산으로 들어갔다.
이례적인 일이다.
혹시라도 모두가 산행을 포기하고 돌아서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앞서서 먼저 내빼는 듯했다.
언제나 그렇듯 산행 초반의 무거운 몸은 가쁜 숨을 몇 번 몰아 내쉬고 난 뒤에 풀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나무다리에 먼저 도착한 엉겅퀴 형님은 배낭을 내리고 뒤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다우 형님과, 아주 느긋하게 거래처 납품을 개운하게 끝낸 본능이 도착했다.
숨차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엉겅퀴 형님의 걸음은 늘 빠르고 민첩했다.
앙상한 뼈대를 들어낸 나무들이 버썩 하게 말라버린 잎을 털어내고 있었다
새로운 잎을 피워 올리기 위한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나무에 겨울은 매서운 시련을 사정없이 내릴 것이다.
차가운 눈보라가 지날 것이고, 쩍쩍 얼어붙는 혹한도 견뎌야 할 것이다.
나무는 그것에 대비하여 자신을 비우고 있는 것이리라.
새롭게 채우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을 과감히 버리는 것,
버림으로 다시 채워지는 것.
자연의 순리를 사람인 나는 얼마나 더 살아야 미련과 욕심 없이 따를 수 있을까.
길은 잘 정비되어 나무다리가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
엉겅퀴 형과 에스테야 형은 성큼성큼 거침없이 앞서서 나아갔다.
왕재로 오르는 길
다른 때 같으면 이때쯤 대장님이 몸이 풀려 앞서야 하지만 뒤에서 보이지도 않았다.
지정하거나 의논한 것도 아닌데 대열은 항상 자신의 그 날 몸 상태에 따라 알아서 정렬되었다.
사람들은 산행 중 속으로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내적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을 때
대열에서 저 앞으로 많이 나아가거나 뒤로 뚝 떨어져 그 갈등의 외적인 폭발을 시도한다.
그리고 대게는 오랜 갈등의 폭발음을 줄여보려 괄약근을 최대한 조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엉겅퀴 형의 그것은 낯을 가리지 않았고, 망설이거나 주저함이 없이 폭발적인 사운드를 자랑했다.
처음 몇 번은 엉겅퀴 형 혼자만 그리하더니 이제 독오당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 따라 한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리해온 것처럼 모두 그리한다.
이날도 여지없이 오르막에서 가쁘게 흡입한 공기만큼 쌍바위골의 우렁찬 소리가 여러 번 폭발했다가 사라졌다.
우리들이 이것에 이렇게 무신경한 것은 이 정도 일은 예사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예사로 생각할 만큼 아무렇지 않은 친밀한 유대감 때문일 것이다.
왕재에 올라서고 대장님을 기다렸다.
대장님은 확실히 힘들어했다.
떡 한 조각씩을 나누어 먹으며 트래킹중 고소증을 겪은 이야기를 했다.
왕재에서 웅석봉을 향했다.
아직도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은 짙게 웅석봉을 덮고 있었다.
날씨 꼴을 보니 이따위라면 하산까지 비는 오지 않을 것이었다.
헬기장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엉겅퀴 형과 에스테야 형이 샘에 물을 받으러 다녀왔다.
물을 받아 온 에스테야 형은 자기 아래로 전부 집합하라고 했지만
전혀 위엄이 묻어나지 않는 말은 혼잣말이 되어 조용히 흩어졌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에스테야 형을 디스 하는 것이 솔직히 미안할 때도 있지만
이 양반 -꼭 에스테야 형님만이 아니라 독오당 전체- 의 맨탈이 이 정도에 흔들릴 양반이 아님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쓰는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혀 부담을 가지지 않는다.
그의 인성은 그래서 더욱 빛날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독오당은 누구도 마냥 편하게 표현하며 글이 나갈 수 있어 좋다.
그만큼 뒤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웅석봉 아래로 빠르고 낮은 구름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세 사람은 먼저 헬기장 옆 공터를 찾아 들어가고 나는 대장님을 기다렸다가 같이 모여 앉았다.
엉겅퀴 형님이 준비 중인 계획을 주재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년 독오당 산행을 조금 뜸하게 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들었다.
형님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 모두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을 많이 묻고 답했다.
배를 불린 후 다시 웅석봉으로 걸었다.
웅석봉까지 0.3km의 짧은 오름은 숨이 막혔다.
가득 채워진 뱃속의 여유 공간이 부족함인지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극히 방정맞았다.
좀처럼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엉겅퀴 형조차도 한마디 했다.
"아따~ 대다!."
웅석봉 1,099m 정상에 올랐다.
군립공원으로 1983년 지정되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중봉 하봉 쑥밭재를 거처 외고개 왕등재와 깃대봉을 넘어
밤머리재에서 한번 치솟아 웅석봉에 닿는다.
산의 모양이 곰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단다.
아래로 경호강이 모습을 드러냈고, 흐린 날씨 탓에 둔철산은 아득하고 희미했다.
테크에는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고,
우리 뒤에 도착한 몇 명의 등산객이 정상에 섰다가 지나갔다.
잠시, 각자의 편한 자세로 각자의 휴식을 만끽했다.
이럴 때, 이 순간은 우리는 서로를 방해 하지 않는다.
천왕봉은 희미한 흐림 속에서도 우뚝했다.
어디로 어떻게 뻗쳐오는지 알 수 없는 기운이 내게로 와 닿는 것만 같아서 상봉을 향해 한동안 서 있었다.
산방기간 다시 찾은 웅석봉이 사실상 독오당 올해 마지막 산행이었다.
한 해 무사히 산행했고, 무탈했고, 만날 때마다 즐거웠고, 즐거운 만큼 행복했었든 독오당이었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넘길 줄 알고,
지리산을 누빈 경륜만큼 마음 씀도 산꾼다운 나의 동지들.
언제나 배우고 따르게 만드는 형들과 형 같은 아우.
생각해 보면 단 하나의 같은 점도 찾기가 힘든 조합이었다.
학연, 지연, 하는 일까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이 서로 너무 다 달랐다.
심지어 성씨까지 단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이 다 다른 개성이 모여 지금까지 이어 온 것이다.
이런 독오당이 질서 정연하고 일관되게 지속되는 것은 지리산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긴 하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서로 "잘 맞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는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추어 주는 사람들이라 해야 할 것 같다.
넓고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로를 맞추어 주는 배려의 마음이라고 해야겠다.
이 좋은 인연은 내게 행운이다.
하산길은 온순했다.
온순한 길을 걷는 내내 온순한 걸음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멀어져가는 웅석봉을 뒤 돌아보았다.
뒤를 내어준다는 것.
나의 부끄러운 뒷모습을 내어 주어도 괜찮을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적으로 그것은 느끼는 사람의 자기감정이겠으나 내가 형님들에게 자주 감동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자기 삶에 대한 확신, 그 삶을 주도적으로 경영하며 그 속에서 진정 즐길 줄 알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도 멋있고 존경스럽다.
어떤 차이도 느끼게 하지 않는 인간적인 배려는 더욱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다.
그래서일까
좀 모자라면 어떤가, 좀 부족하면 어떤가 싶어
독오당 앞에서는 홀가분하고 편하게 술이 들어가면 술값을 할 때도 있다.
이런 내가 본질의 나인 것을 어떻게 하겠나 싶어 어리광도 부리고
술 취한 다음날을 걱정하지 않는다.
얼마 가지 않아 저 형들은 국민연금을 받을 나이가 되어 간다.
나는 형님들 나이가 되어서도 형님들만큼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마음과 건강한 몸이길 바란다.
아래로 곰골과 능선 넘어 필봉과 왕산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가까운 곳의 조망이 겨우 확보되었지만 빗속을 걷는 것보다는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경호강 건너 둔철산도 보였다.
왕산 앞으로 희미한 필봉이 겹쳐서 아련했다.
능선 아래 보이는 저곳은 심적사이지 싶었다.
편하기 짝이 없는 하산길에서는 서서 쉬었다.
올라오는 길에 뒤에서 쳐져 힘들다고 하든 대장님이 하산 걸음은 무척 빨랐다.
비포장 임도를 만나고 길은 더욱더 편하게 놓였다.
본능이 앞서가는 것은 카메라를 잊고 맨몸으로 올랐기 때문이었다.
항상 산행의 여러 장면과 풍경을 세심하게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하지 않으니 그도 빨랐다.
내리 저수지 방향으로 한 번 더 길이 꺾여 주어졌다.
아니, 그 길로 우리가 들어갔다.
저만치 앞서가는 발 빠른 엉겅퀴 형님의 뒤를 따랐다.
영감탱이들이 내리막을 천천히 가야 할 것인데 어찌 저리도 잘 내려가는 것인지.
참으로 열정적인 자세로 에스테야 형이 사진을 찍어 재꼈고 나는 형을 찍어 재꼈다.
무엇이든 자세가 중요하다.
형을 띄워 주면 다른 자세가 바로 나온다.
본능에 따라 본능적인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을 또 찍어 재꼈다.
저 아래 한사람과 위쪽 한 사람도 이 시간 같은 짓을 했다.
결국 비는 내리지 않았고 산행은 끝났다.
어차피 산 아래까지 왔는데 진짜 산행을 포기할 사람들도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말하자면
독오당 송년 웅석봉 산행이 완성된 것은 에스테야 형의 추진력 덕분이었다.
산행 후 지곡사에 관해 들었고
엉겅퀴 형님의 안내를 받아 몇 군데를 찾아갔다.
산음은 산청의 옛 이름이라 했다.
아래는 엉겅퀴 형님의 지리탐구방 옛산행기방에서
18C 추파(秋波)스님의 <산음 지곡사 유람기(遊山陰智谷寺記)> 게시물을 일부 옮겨왔다.
http://ucc.jiri99.com/bbs/board2.php?bo_table=jiri33&wr_id=411
이하 파란 글은 엉겅퀴 님의 글을 들고 와 붙인 것임
지리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흐르다가 일어나 봉우리를 이룬 것이
취봉(鷲峰)과 국사봉(國師峯)인데, 두 봉우리 아래 지은 절이 국태사(國泰寺)이다.
또 지곡사(智谷寺)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그곳 토박이들이 그 골짜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절의 애초 창건은 신라 때에 응진(應眞)이 하였고,
중간에는 고려 때 혜월(慧月)이, 마지막으로 진관(眞觀)이 또 새로 수리하였는데, 진관도 고려 때 사람이다.
이 세 분 대사들은 다 덕이 중하여 당세에 왕의 스승이 되어 국가를 도운 분들이니,
그 뛰어나고 훌륭한 공훈은 비문에 실려서 절의 동서쪽에 짝으로 세워졌다.
법당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섬돌을 만들고 그 면에 이렇게 글을 새겼다.
"곡성군수가 철물(鐵物)을 감독하고 함안군수가 섬돌을 쌓았다." 그 자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니,
당시에 부처님의 도를 숭상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분 대사가 건립하였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전각과 누각의 체계는 대웅전이 가운데 서고 약사전이 왼쪽에 자리하며 극락전이 오른쪽에 있다.
앞에는 큰 누각이 있으며 누각 밖에는 천왕문과 금강문 두 문이 있다.
앙실(鴦室)과 회랑 요사채가 기러기처럼 좌우로 펼쳐져 다 법전을 호위하여 지키니,
황상(皇上)이 조정에 임할 때에 신료들이 앞에 시립한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것이 영남의 여러 사찰 중에 으뜸인 까닭이고,
선객(禪客)과 시인들이 오로지 국태사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속의 많은 선암(仙庵)도 때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였지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여섯이다.
심적암(深寂庵)과 영당(影堂)은 강백(講伯)이 불법을 천명하는 곳이며,
적조암(寂照庵)과 나한암(羅漢庵), 태자암(太子庵)과 서운암(瑞雲庵)은
진실로 참선하는 자들이 마음을 밝히는 자리이다.
골짜기에는 돌을 깎아 만든 세진교(洗塵橋)가 공중에 걸린 무지개처럼 놓여서
장마가 여러 달을 그치지 않아 성난 파도가 계곡 어귀에 넘쳐나도 행인들이
물 건너기를 걱정하며 탄식하는 일은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일 것 같으면 물빛과 하늘빛이 아래위로 서로 이어지고
게다가 무성한 수풀과 긴 대나무까지 좌우에서 비추니,
6월 폭염이라도 이 다리에만 오르면 열기를 씻기에 충분하다.
또한 유람객이 이 다리에 서면 속세의 근심을 씻을 수 있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
그 산수의 기이함과 화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보고 즐기는 자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므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겠노라.
- 옮긴 이 : 하혜정(국사편찬위원회 연구위원)
한마디로 지곡사가 엄청 큰 사찰이었다는 것이고
지금 그 흔적을 쫓아 보아도 큰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혜월과 진관의 탑비로 추정되는 귀부가
하나는 연못가 주차장 옆에, 하나는 맑은산장농원 안에 있다.
흡사 엊그제 새긴 듯 선명하고 매우 아름다운 귀갑 문양이 남아 있고,
동쪽 귀부의 비신(碑身)을 얹는 받침대 부분에는 아주 정교한 쌍어(雙魚)문양과 보주(寶珠)를 양면에 둘렀다.
거북의 머리는 일부러 자른 것처럼 보인다.
주차장 옆 탑비 흔적.
쌍어(雙魚)문양
심적사 승탑
주차장에서 차를 타고 심적사 승탑으로 올라갔다.
승탑 아래 주차장이 있어 승탑까지는 지척의 거리였다.
위치는 산행 트랙을 기록한 이 산행기 첫 번째 사진을 참고하면 된다.
보통 부도는 호를 가지고 명칭으로 삼는데 추파의 부도는 구연탑(九淵塔)이라 하였다. 예외적이다.
분명 의미가 있을텐데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구연(九淵)은 보통 깊고 깊은 연못을 뜻하는데, 탑비의 글에
“연원이 있는 배움과 깊고 넓은 재주를 겸하였다(淵源之學兼有淹博之才)”고 한 것으로 보아,
추측컨대 ‘스님의 수행과 덕이 심원한’ 것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석비에는 ‘남원부사 서무수(徐懋修)가 글씨를 썼다’고 새겨져 있고,
서무수는 당시의 명필로 남원부사로 재직했던 시기는 1774.9~1777.1이므로
이런 기록을 서로 대조해보면 당연히 1776년이 된다.
어쨌거나 유려한 글씨체는 볼 만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참 잘 쓴 글자라 싶었더니 역시 명필의 솜씨였다.
내려오면서 글을 쓴 사람도 그렇지만 비석에 새긴 사람도 참 대단하다는 말이 오고 갔다.
세진교(洗塵橋)비석은 도로변에 있었고 비석 건너편 계곡에 세진교 각자가 있어
차를 세워두고 계곡에 내려가 둘러보았다.
지금은 도로가 시내 북쪽으로 나 있어 시내를 건너지 않고 바로 지곡사(옛터)로 갈 수 있지만
과거에는 무지개 다리를 건너 시내 남쪽을 따라가다가 저수지쯤에서 다시 시내를 건너 지곡사로 갔던 것 같다.
시내 건너편으로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진교 비는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귀부로 삼았고, 비신과의 연결 부위는 섬세한 연꽃 문양을 둘렀다.
비문의 마모된 글자를 끼어 맞추어보니 ‘숭정기원후 팔십구년’이었다. 1716년이다.
차를 타고 나오면서 근처 수선사를 들리기로 했다.
산행이 일찍 끝난 탓에 시간이 넉넉했다.
여여문(如如門)
이걸 여여문이라 읽어내는 엉겅퀴 형님이 신기했다.
‘여여(如如)’라는 한자는 원래 산스크리트어 ‘타타타(tatahta)’의 의역으로,
‘물건 본연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이라 한다.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한다.
부처님을 다른 말로 하면 여래(如來)라고 한다.
이 말은 ‘여여(如如)하다’라는 말과 ‘오다(來)’의 합성어로서 여여 하게 온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그러니까 여래(如來)는 ‘오는 것과 가는 것’이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고 감이 같기 때문에 왔다고 했지만 온 것이 아니고, 갔다고 했지만 가버린 것도 아닌
우주에 두루 머무는 진리의 화신(化身)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더 특별난 것은 없으며 평범한 것도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여여하다는 말의 의미까지 알게 되었고, 여여하다는 말이 좋아졌다.
여여하게 거닐었다.
여여한 사람들
'정랑'이라 엉겁결에 말했는데 엉겅퀴 형이 정랑이 맞는단다.
여기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모두 한 번 그리 해 봤다.
덕분에 우리는 또 오줌을 쌌다.
깔끔한 정원에 울려 퍼지는 독경이 계속되었다.
이곳에서 에스테야 형님이 지폐 한 장을 주웠다.
이후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동안 번민하는 형님을 나는 줄곧 지켜보았다.
참으로 어이없도록 착한 에스테야 형님은 주운 지폐 한 장을 들고, 깊고 깊은 고민에 쌓여 있었다.
저러다 주운 곳에 도로 갖다 놓지나 않을까 싶어 뒤를 따라다녔다.
카페에 들어가 차를 한 잔씩 마시기로 했다.
찻값은 비쌌다.
그곳에 스님이 계셨고 에스테야 형님은 그 지폐를 주운 것이라며 스님께 드렸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찻값이라도 깎아 주려나?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절을 나오며 에스테야 형님한테 물어보았다.
그 얼마짜리 돈인데 그리 꼭 쥐고 댕깃소?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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