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3.
동강-수철.
일시:2015년 3월 15일.
산행자:상가식구 7명.
걸어간 길:동강-추모공원- 상사폭포-쌍재-산불초소-고동재-수철
산행시간:08시 ~15시 42분 (7시간 42분) 12.9km.
2015-03-15 지둘3 (5구간 동강-수철).gpx
2015-03-15 지둘3 (5구간 동강-수철).gtm
둘레길 5코스 구간으로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에서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까지 12km의 거리입니다.
동강에서 수철리까지 4개의 마을을 지나갑니다.
산청,함양 추모공원을 지나고 오봉천을 건너면, 산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한 코스입니다.
상사폭포를 지나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41봉에서의 지리산 조망은 이 구간의 최고 압권입니다.
세 번째 둘레길을 나섭니다.
동강 식당 옆 주차장에 주차하고 오늘은 아주 천천히 걷기로 합니다.
아침 시간 그리 춥지도 않고 적당한 쌀쌀함이 걷기에 적당합니다.
유키네 민박 쪽을 지나면서 외길의 도로를 따릅니다.
자혜마을로 들어가는 자혜교 삼거리에서 크게 길을 꺾어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방향으로 갑니다.
둘레길 이정표의 빨간 화살표를 따릅니다.
이 길은 어두운 과거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국가권력은 숨기기에만 급급하고 진상 규명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묻혀든 아픈 과거의 역사가
아직도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길입니다.
이 길에 올라서기 전.
이곳을 공부하며 알게 된 이야기를 일행에게 알려줍니다.
추모공원으로 가는 도로변 좌측길 옆에 희생자보존비가 있습니다.
산청, 함양 민간인학살 사건.
비교적 그나마 알려진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는 사건의 일부(거창사건)만 지칭하는 것일 뿐입니다.
전체를 포괄하는 정확한 명칭은 산청.함양.거창. 민간인집단학살사건 이라고 해야 합니다.
거창에서의 학살 이전인 1951년 2월 7일부터 이미 동일한 부대에 의해
이웃한 산청군, 함양군 일대에서도 민간인 집단학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는 특무대 문서철에서도 확인되며, 연대작전명령에 의한 공식적인 학살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11사단 9연대 연대작명에 의한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거창 사건으로만 알려진 것은 국가가 산청과 함양 학살을 의도적으로 은폐했기 때문입니다.
산청·함양·거창 3개 군 유족회는 이 사건으로 총 1,424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합니다.
<산청,함양추모공원.>
인천 상륙작전으로 북진하게 된 유엔군은 후방 안정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창설합니다.
11사단의 주 임무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잔존해 있는 인민군과 게릴라 토벌이었습니다.
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견벽청야(벽을 튼튼히 하고 들을 깨끗이 함)'를 내세워
부하들에게 초토화 작전을 독려합니다.
토벌작전이 인민군과 게릴라뿐만 아니라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확대된 것입니다.
이를 작전 명령 형태로 공식화시킨 것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보11사 작명 제5호 (보병11사단 작전명령 제5호)입니다.
이는 거창·함양·산청 민간인 학살이 일개 하급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단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자국의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닌 군대가
오히려 자국민을 향해 저지른 학살사건입니다.
<추모공원 입구 회양문.>
1951년 2월 7일.
이날은 설 다음 날로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민족 최대의 명절로 마음의 여유를 조금은
가지고 있었든 날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지리산 북쪽 자락의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의 가현, 방곡, 점촌, 서주리에
도착한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는
1개 중대당 1개 마을로 나누어 청야작전을 수행합니다.
마을에 밀어닥친 부대는 제일 먼저 마을에 불을 지릅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체 놀라 뛰쳐나온 민간인들을 위협해
산으로 끌고 가 무차별 처형해 버립니다.
그리고 가축과 곡식을 약탈합니다.
이날 하루 동안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에서 62명의 민간인이 학살됩니다.
다음날부터 부대는 학살 방법을 바꿉니다.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 상촌,하촌,
화개리 화상,주상, 함양군 유림면 송곡리 송곡,지곡등 7개 마을에서는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 변에 주민을 집결시키고 학교 교실 두 개 규모의 땅을 파게 합니다.
이 땅속에 민간인들을 들어가게 한 후 기관총으로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져 넣기도 합니다.
심지어 박격포를 조준사격 했다고도 합니다.
한꺼번에 처형하기 위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참으로 기이하여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생존자가 있었고
나중에 증언을 하게됩니다.
1951년 2월 7일 함양지역에서 705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부대는 산속에서 숙영하며
행군을 계속하여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에 도착합니다.
청연부락에서 70명을 학살하는 것을 시작으로 거창지역에서 719명을 다시 학살합니다.
거창,함양,산청지역에서 이렇게 자국의 군대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이 1,424명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 전해지고
거창 출신 신중목 의원에 의해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산청,함양사건은 묻힌 체 거창사건만 조사하게 되지만 이마저도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진상조사단을 향해 국군이 공비로 위장해 총격을 가하며 조사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해외언론과 국회의 압력으로 조사가 이루어지고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집니다.
사건 5개월 만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11사단 사단장(최덕신)은 협의가 없어 법정에 나오지도 않았고, 9연대장(오익경) 무기징역, 3대대장(한동석)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징역 3년에 처해집니다.
그러나 1년도 되지 않아 대통령특사로 그들은 모두 풀려납니다.
이후 군대로 복귀하고 군대에서 승진과 요직을 거처 예편합니다.
이후 이들은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그야말로 떵떵거리며 살게 됩니다.
사단장 최덕신은 외무장관을 거처 서독대사를 역임하고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1980년대 북한으로 갑니다.
대한민국의 민간인을 북한의 공산당과 내통한 통비분자로 몰아 학살한 사람이
북한땅으로 간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그를 영웅 대접하며 영화도 제작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살다 삶을 마감합니다.
연대장 오익경은 1956년까지 군 복무를 합니다.
학살사건 당시 중령이었든 그는
대령으로 진급까지 하고 전역합니다.
그리고 1970년대 미국에 이민을 갑니다.
대대장 한동석은 군대의 요직을 두루 거처 전역하고
516 군사 쿠데타 후 강릉과 원주의 시장을 역임합니다.
이후 보사부 행정 서기관까지 합니다.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자유당 시절 경찰 총수까지 지냈다고 합니다.
반대로,
살아남은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들 삶은 이후 어떠했을까요?
통비분자로 몰려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음은 접어두고
가족들의 시체조차도 찾을 수 없게 했습니다.
반발하거나 목소리를 내는 이들에게는 당연히
빨갱이라는 색칠을 하고 가혹한 탄압을 했습니다.
지금도, 아직도 국가권력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6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만히 있으라 합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익숙해져 살아갑니다.
아이들에게 정의를 논하고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정의롭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직은...
추모공원을 나와
오봉천을 건너갑니다.
화살표를 따라갑니다.
산길로 들어갑니다.
둘레길답게 잘 정비된 길입니다.
추모공원에서의 무거운 마음은 벗어 둡니다.
한 꺼풀 옷을 벗고 가벼운 걸음이 됩니다.
산골짜기로부터 흐르는 물소리는 아래로 흐르며 봄을 데리고 옵니다.
아직 겨울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지만 어김없는 3월입니다.
상사폭포까지 너무 쉽게 훌쩍 올라옵니다.
2011년 독오당과 함께 왔었던 곳인데 그때와는 달리 어찌 좀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폭포 밑으로 내려가 얼음이 달린 폭포를 한 장 찍어둡니다.
동강에서 4.5km 를 걸어왔습니다.
상사폭포에는
세 가지 정도의 전설이 전해져 온다 합니다.
첫 번째는 왕산 자락 마을에서 동네 처녀를 짝사랑하던 총각이
상사병에 걸려 죽었는데 죽어서도 그녀를 못 잊어 뱀으로 변해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놀란 그녀가 손으로 내리쳐 뱀은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후 여인은 상사폭포 바위로 변하고 총각은 계곡으로 변했다 합니다.
두 번째는 평민 총각이 양반집 처녀를 짝사랑했는데 이 처녀가 이웃으로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합니다.
나중에서야 처녀가 이사실을 알게 되었고 처녀도 원래는 이 총각을 짝사랑했었는데,
이 처녀가 상사바위에서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죽은 총각을 그리워하며 뱀으로 변했다는 전설입니다.
세 번째, 동네 총각을 짝사랑한 처녀가 구렁이로 변해서 총각을
칭칭 감고 놓아주지 않았는데, 총각 부모가 아무리 뱀을 떼어 내려고 해도 되지 않자
결국 부모는 뱀과 아들을 상사폭포 벼랑 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합니다.
세 가지 전설 모두 남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뱀으로 변하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오르막을 오르는 줄도 모를 정도로 쉽게 올라갑니다.
오전의 나무 사이 햇볕이 따뜻하기만 합니다.
오랜만에 지리산 자락에 들어선 식구들은 느긋한 걸음 만큼 이 길을 잘 즐깁니다.
산객의 발걸음을 잠시 잡아끌어 들이는 휴게소에 들어가 막걸리 한잔을 합니다.
둘레길을 걸으며 누릴 수 있는 재미 중에 하나입니다.
힘들어서 쉬어 가는 것이 아니라 여유로운 걸음에 느긋함이라 좋습니다.
한 모금 마신 막걸리가 트림으로 꾸역 올라오는 산길을 올라갑니다.
막걸리 탓에 제법 숨이 차오릅니다.
그러나 금방 임도 길에 올라서고 길가에 피어나는 봄을 이야기합니다.
쌍재.
쌍재는 예전 함양 휴천에서 산청방면으로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고개마루로 주막과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쌍재아래에 보부상들을 위한 제법 큰 쉼터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는 고령토가 많이 나와 채취했다고 한다.
임도 길을 따라 걷다 왕산으로 가는 삼거리를 만납니다.
고도 540의 바람재입니다.
임도 길에서 우측으로 꺾이는 산길을 따라 둘레길은 계속됩니다.
둘레길 반대편의 왕산이 둥그스름한 모습으로 보입니다.
동강에서 7km를 조금 더 걸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641봉에 섭니다.
지리산 동부능선엔 아직 겨울이 희긋 걸쳐져 있습니다.
빠꼼이 천왕봉이 보이고 그 뒤로 중봉이 더 높아 보입니다.
하봉을 따라 동부능선이 높이를 내리며 달려 내려옵니다.
앞으로 달려 나온 왕등능선으로 새봉과 산청독바위가 짐작으로 잡힙니다.
사방으로 돌아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둘레길 이 구간 중에 조망이 최고입니다.
식구들과 올해 처음 나선 둘레길에서 천왕봉을 향해 엎드려 절을 올립니다.
산에서, 그리고 위험한 세상에서 언제나 무사하게 해 달라는 염원을 담아 엎드렸습니다.
왕산과 필봉이 바로 앞입니다.
왕산: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923.2m의 산으로 왕산이란
이름은 가락국 제10대왕 양왕(讓王)의 능인 전구형왕릉이 있어 유래하였으며
옛날 가락국의 궁궐 이름인 태왕궁에서 이름을 따 태왕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이 오른 산‘이라 해서 유래된 이름이라 한다.
필봉: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해발 848m의 산으로,
서쪽으로 왕산, 동쪽으로 강구산과 이어져 있으며, 산 정상부가 붓끝처럼 뾰족한 데서 필봉이라 부르며,
여성의 유두를 연상케 해 유두봉이라고도 불렸으며, 산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일품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평화롭고 고요합니다.
어쩌면 이런 평화로움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좋아지기에 산을 오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멀리 웅석봉과 밤머리재 도토리봉이 병풍처럼 둘러 쳐져 있습니다.
함양독바위(독녀암)가 독특한 그 모습 때문에 눈에 빨리 들어옵니다.
물어보면 어디라고 대답을 척척하는 상가식구들도
이제는 지리산의 매력에 그 만큼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생강나무꽃을 비벼 냄새를 맡았습니다.
생강 향기가 폴폴 합니다.
바야흐로 꽃이 피어나는 봄입니다.
말없이 바라만 보고있어도 좋은 산입니다.
다 품어 내는 산에 안기면
비좁고 옹졸한 내 마음 몇 배로 넓은 마음이 됩니다.
억울한 그 일도,그놈도, 지금은 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려가야 할 수철리 방향입니다.
고동재입니다.
고동재.
지리산 동부능선과 연결되어 있는 수철동 서북쪽에서 방곡리로 가는 고개로
고동형으로 생겼다고 ‘고동재’라 이름 붙었다 한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
그 길에 수 많은 삶의 애환이 담겨있습니다.
결국 사람 속으로 걸었든 산길을 걷습니다.
산청과 함양으로 장사꾼들이 봇짐을 지고 넘어 가든길을 걷습니다.
밥.
요즘 아이들의 밥 문제로 내가 사는 동네가 시끄럽습니다.
왕조시대 때부터 백성이 배부러고 등 따뜻하면 태평성대라 했습니다.
배가 불러야 공부도 하고 뭐라도 합니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어려운 시대를 사셨다는 높으신 그분은
그 수돗물도 국민의 세금으로 무상 지급된 걸 몰랐는지
학교에 밥 먹으러 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이 자랑일 수는 없지만, 증명까지 하라며 아이들 먹는 밥으로
문제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날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때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 -법정스님-
밥을 먹습니다.
배를 채워야 나머지 길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길가 양지바른 곳에 앉아 오랫동안 식구들이 밥을 먹습니다.
같이 먹는 이 한 끼의 밥이 사람의 정입니다.
내려갑니다.
사람과 사람으로 연결되는 사람의 길을 따라 사람 속으로 갑니다.
등 뒤로 따라 얹히는 봄이 따뜻합니다.
무수한 시간을 살아내야 하지만 늘 이 봄 같은 마음으로 살아 가면 좋겠습니다.
수철마을.
수철마을은 옛날 무쇠로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던 철점이 있어서 무쇠점 또는 수철동이라 불리었다.
수철마을에 도착하며 오늘의 구간을 종료합니다.
동강까지 택시로 이동해 차량을 회수하고 일행을 데리러 옵니다.
수철마을 매점의 할매가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한 이상한 모양의 아이스크림
과 음료수를 너무 비싸게 달라고 하는 바람에 맨 입으로 수철마을 떠납니다.
다음 구간을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낯설고 거친 길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버려도 물어가면 그만입니다.
물을 이가 없다면 헤매면 그만입니다.
내일도 인생은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이 길 위에 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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