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지리산 둘레길

2014.12.14 지리산 둘레길(금계-동강)

지리99 수야 2014. 12. 16. 15:59

지리산 둘레길 2.

 

금계-동강.

일시:2014년 12월 14일 (일요일)

산행자:상가식구 8명.

걸어간 길:금계-의중마을-서암정사-벽송사-송대동-마적동-세동마을-송문교-구시락재-엄천교.

산행시간:08시 14분~16시 52분.(8시간 37분) 16km.

 

2014-12-14 지둘2 (4구간 금계-동강).gpx

2014-12-14 지둘2 (4구간 금계-동강).gtm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두 가지 실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시작을 했고, 열정이 충만한 사람들과

두 번째 길을 나섭니다.

후회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엄천교에서 버스를 타고 금계로 갑니다.

차량회수를 위해 금계로 다시 가지 않고 산행이 끝나는 동강에서 바로

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출발지까지 버스로 이동합니다.

8명의 식구가 금계까지 전세를 낸 버스는 한 번도 쉬지 않고 목적지에 우리를 내려 줍니다.

 

지난번 마지막 구간 금계에서 다시 길을 이어 갑니다.

추위로 단단히 무장했지만 손끝이 시립니다.

 

 

금계에서 동강 구간은 엄천강을 따라가는 단조로운 구간이라

살짝 옆으로 벗어나 서암정사와 벽송사를 거처 벽송사 능선을 넘어

송대마을로 열린 길을 따라갑니다.

의탄교를 건너 의중마을입니다.

 

의중마을.

유래 : 중말이라고도 하는 의중(義仲)마을은 의탄리의 가운데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탄소(義탄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의탄의 여울탄자를 쓰는 것은

여울목이라는 뜻에서 쓴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숯탄자(炭)를 쓰는것이 옳은 것이라고도 한다.
구형왕이 추성에 있을때 이곳에서 참나무 숯을 굽지 않았나 하는 추측설이 있다.

마을의 형성 연대는 알수 없으나 조선 선조때 함양박씨가 살았으며 경주정씨가 남원에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의중마을에서는 손이 시리고 움츠린 관계로 사진 찍을 기회를 놓칩니다.

의중마을을 지나 서암정사로 갑니다.

 

바래봉 설경의 유혹에 바래봉으로 가고 싶었으나

올겨울 바래봉 설경 못지 않은 계획을 하고 있기에 아쉬움을 접어 둡니다.

그동안 조금 험한 길로 다녔던 보람인지 둘레길을 이제 여유로워합니다.

 

서암정사로 가는 길에 산죽 터널을 이룬 멋진 길이 나옵니다.

몸도 서서히 풀리고 열기가 살살 올라오니 잔뜩 움츠린 종종걸음이 느긋해집니다.

발아래 소복 거리는 눈이 미끄럽지 않고 적당합니다.

 

산죽 터널을 지나 작은 언덕을 올라서니 바로 서암정사가 보입니다.

 

서암정사 (瑞岩精舍).

소재지; 경남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5번지  

함양8경 중 제6경 서암석불이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지리산 서암정사는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벽송사로부터 서쪽으로 600여m 지점에 위치하여

천연의 암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이다.
한국전란으로 인하여 황폐해진 벽송사를 다시 재건한 원응스님이 이 도량을 찾아 장구한 발원을 세우고

지리산의 장엄한 산세를 배경으로 수려한 자연자원과 조화롭게 자연암반에 무수한 불상을 조각하고

불교의 이상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세계를 그린 조각법당을 10여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그 화려함과 웅장함이 과히 장관을 이루고 있다.
사찰 입구에 불교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대방광문이 있고

바위에 조각된 사천 왕상을 지나 도량안으로 들어서면 아미타여래가 주불이 되어

극락세계를 형상화한 석굴법당이 있고, 도량 위편에는 무수한 불보살이 상주하는 광명운대,

그리고 스님들의 수행장소인 사자굴등이 있다.
이는 모두 자연의 암반에다 굴을 파고 조각을 하므로써 불교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도 특이한 기법을 보이고 있어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 계곡중 아름답고 웅장하기로 유명하여 3대 계곡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칠선계곡의 초입에 위치하고 있어,

연중 많은 신도 및 문화 탐방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 함양군청>

 

 

摩河大法王 (마하대법왕)  크도다! 법의 왕이시여

調御三千界 (조어삼천계)  온 세상을 조화롭게 거느리시도다.

恒住寂滅殿 (항주적멸전)  항상 적멸의 궁전에 머물러서

常放大光明 (상방대광전)  끊임없이 광명을 발하시도다.

 부처님께서 상주하여 설법하고 계심을 일깨워주는 말이라고 합니다.

 

대방광문(大方廣門)이라 새겨진 석문(石門).

이곳을 지나면 대웅전과 굴법당이 나옵니다.

 

 

석문을 통과하면 바로 보이는 대웅전.

 

석굴법당(石窟法堂).

 

법당 아래 연못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10여 분 만에 서암정사를 돌아보고

나오며 벽송사로 향합니다.

서암정사에서 벽송사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갑니다

 

벽송사(碧松寺)는

조선 중종 시대인 1520년 벽송지엄(碧松智嚴)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행하여 도를 깨달은 유서 깊은 절이다

한국전쟁으로 시작된 지리산 빨치산들의 암약(당시 벽송사는 빨치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됨)으로 말마암아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는 슬픈 역사를 맞이하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구한원응(久閒元應)대사의 원력에 의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목장승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찾는 이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선방뒤 탑전앞에 천년의 세월을 묵묵히 서 있는“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의 전설 또한 유명하다.

예로부터 목장승에 기원하면 애정이 돈독해지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으면 건강을 이루고 한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며,

미인송에 기원하면 미인이 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벽송사 선방에서 도인이 유래없이 많이 나와서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만 보며 벽송사 경내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미인송과 도인송 목장승에 관해 잠깐 이야기를 하고

입구에서 우측으로 난 산길로 갑니다.

우리 식구들은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는 모르지만

미인송에 빌어서까지 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줌마도 없고,

도인송의 기운을 받아야 할 아저씨도 없다 합니다.

해서, 문고리를 잡아 성불할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 놓았습니다.

 

 

벽송사를 지나 부용암과 초월암 갈림길에서 산길을 따라 능선으로 오릅니다.

능선 오름길 우측의 부용암과 초월암을 담아보려 혼자 몇 걸음 다녀옵니다.

 

고도를 높이는 산길이 유순합니다.

잡목을 헤치고, 코가 닿을 듯 경사진 능선이나 암벽이 아닌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길이니 유순하다는 표현을 합니다.

 

벽송사 능선 710봉 아래로 올라서고 잠시 쉬어갑니다.

멀리 서북능선과 바래봉은 탄성이 절로 나오는 설산입니다.

벽송사 능선을 따라 산길을 한참 올라갑니다.

 

함양독바위로 가는 산악회를 만나고 잠시 쉬면서 길을 내어줍니다.

지난해 겨울 엄청나게 고생하고 내려온 향운대 쪽을 바라보며

힘들었든 그날의 추억담을 더듬어도 봅니다.

벽송사 능선 782봉 아래 갈림길에서 송대마을로 내려갑니다.

능선으로 계속 올라가면 상내봉으로 길은 이어지게 됩니다.

제법 쌓인 눈으로 길이 미끄러워 용을 쓰며 내려갑니다.

뒤에서 보니 한 두어 사람이 엉덩방아를 찧기도 합니다.

 

송대마을(12시 24분)

경남 함양군 휴천면 송대마을은 부처님이 누워 있는 능선 모습을 뒷산으로 둔 마을입니다.

소나무와 대나무가 많아 송대라는 이름이라 합니다.

선녀굴에서 발원한 물이 이곳의 식수로 사용된다 합니다.

선녀굴은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마지막까지 숨어 있었던 곳입니다.

어떤 까닭인지

예전 지리산 빨치산루트 안내소가 화장실로 개조되어 있습니다.

 

송대마을에서 내려오며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습니다.

이후의 길은 산길이 아닌 편한 길이라 마음 놓고 느긋하게 한잔합니다.

긴 점심시간을 보내고 다시 길 위에 섭니다.

 

송대마을에서 내려오는 길에 견불사 입구입니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상내봉이 보일 것 같습니다.

천연와불성지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점심을 먹고 움직이는 길은 숨이 찹니다.

송대마을에서 견불사 방향이 아닌 마을 옆 임도를 따라가는 길이 위쪽으로 있었지만

무심코 내려가는 길로 내려섰다 다시 임도로 올라가는 길 고갯마루에서 쉬어갑니다.

살다 보면 간혹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럴 때 다시 길을 찾겠다는 의지마저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버리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 미래에 다가올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적당히 의지를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온 날이 그렇게 부끄럽지만은 않습니다.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송대마을을 지나고 고양터를 지나 마적동에 이릅니다

마적동이라는 흔적만 남은 곳에서 한차례 길은 굽이 돌고 아래로 엄천강이 보입니다.

길을 따라 걷다 좌측의 엄천강 쪽으로 오래된 소나무가 발길을 끌어들입니다.

엄천강을 바라보며 400년을 지켜온 소나무 쉼터.

소나무 바로 옆의 장독바위도 볼거리며 장독바위 위에 돌을 던져 올려놓으면

병이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합니다.

소나무 쉼터에서 내려다보는 용유담이 이 소나무와 묘하게 잘 어우러져 인상적입니다.

어쩌면 이제 이 모습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이야기합니다.

400년 전에도 이곳에서 용유담을 내려 보았을 이들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 이 시대를 지나 앞으로도 이 모습으로 후세 사람들이 이곳에 서서

용유담의 전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엄천강을 좌측에 두고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엄천강과 맞닿아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이 있지만 우리는 도로를 고집합니다.

세동마을을 지나고

송문교 건너 와룡대를 봅니다.

멀리서 사진 한 장으로 기록만 하고 지나갑니다.

 

송문교를 지나며 멀리 바라보이는곳에 한남마을이 있습니다.

임천이 흐르는 함양군 휴천면 한남마을 주변에 ‘새우섬’이 있다.

강물이 큰 S자로 흐르면서 두 줄기로 갈라져 중앙에 자연스럽게 등굽은 새우처럼 생긴 섬이 형성된 것이다.

지금은 산 어귀쪽 물줄기가 메워져 한줄기로 흐르지만 예전에는 두 줄기여서 고립된 섬이었다.
이곳이 세종의 12번째 아들이자 비극의 주인공 한남군 ‘이어’가 유배된 곳이다.

한남군은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소생으로 세종의 손주, 즉 단종에게 젖을 물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인연으로 훗날 어린 단종이 왕위를 잇자 혜빈은 내명부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그러나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뺏기자 혜빈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다.
1456년 단종 복위운동이 있었으나 실패해 이를 주도했던 성삼문 등 사육신은 영월에 유배되고,

연루됐던 혜빈 양씨는 청양으로, 아들 한남군 ‘이어’는 세조(수양대군)의 명으로 목숨만을 건진 채

함양 임천 새우섬에 유배된다.
그는 새우섬에서 고립돼,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단종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고루한 삶을 이어간다.

이듬해 어머니 희빈마저도 교수형으로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자신은 점점 조여오는 생명의 위협에 단 하루도 편한 잠을 이루지 못했을 터이다.

결국 응어리 진 애환을 가슴에 안고 죽은 듯 살다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새우섬은 대왕의 아들이었지만 비정한 권력 앞에 절망하고,

또 생의 무상함에 좌절한 젊은 왕자의 영혼이 서린 곳이다.

새우섬 건너편에 그의 이름을 딴 한남마을이 있고,

함양읍 교산리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그의 묘가 있다.
이 구간에는 한남군의 사연 외에도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애환을 글로 남겼던

이른바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주인공 점필재, 김종직이 넘었던 구시락재도 있다.

그는 사후에 조의제문이 문제가 돼 부관참시 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먼저 공부해서 알고 있는 위 내용을 일행에게 알려주며 걷습니다.

상가식구들은 산행대장 하나는 잘 만난 거지요.

 

"어느 곳에도 없는 친절하고 멋진 산대장과 함께하는 것은 행운이다"

뭐 가끔 이런 식으로 박수를 유도하기는 해도 사실이니까요.

 

 

 

한 구비를 돌아갈 때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풍경에 지루함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소림농원을 지나고 강을 따라 산길도 한 구비를 S자로 따라 돌아갑니다.

 

소림농원을 지나고 언덕을 오르면 우측으로 적조암으로 가는 도로가 있습니다.

적조암에서는 독녀암(함양독바위)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 곳입니다.

점필재 김종직이 걸었든 길.

하룻밤을 자고 갔다는 고열암을 비롯한 선열암 ,신열암,등의 폐사지와

환희대,노장대동,안락문, 선녀굴등 함양독바위로 알려진 독녀암으로 가는 산길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둘레길은 이렇게 방향과 거리가 잘 나타나 있어 참 편리합니다.

이제 동강까지는 1.7km가 남았습니다.

운서마을을 지나갑니다

원래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면 금계에서 10km가 되는 지점입니다.

 

오룩스맵을 한 번 들여다볼 겸 전화기를 켜니

문자가 들어와 있습니다.

문자가 귀찮은 나는 통화를 합니다.

화장산 산행을 마치고 주암식당에 도착했다는 유키님입니다.

이제 산지골 펜션앞이라고 하니 일몰 전 귀가를 지켜야 하므로 만날 기회는

해가 좀 더 길어지는 날로 미루자 합니다.

내 오늘 문제의(?) 그 남자 테리우스를 정면으로 볼 마음이기에 메뉴를 물어보았습니다

친절한 유작가

메뉴판을 찍어서 전송해 줍니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점점 내 인생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는 생각.

예전보다 사는 것은 날로 팍팍해지고 힘이 드는데도 나는 내가 점점 마음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이제는 미래의 걱정을 미리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시작 할 때는 멀기만 하고 아득하기만 하든 길도

걷다가 보니 도착을 하는 것처럼

그냥 걸어가면 되는 것을 미리 멀다고 예단하고 걱정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았습니다.

길을 걷는다는 것은

때론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산등성이와 논과 밭을 지나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는 길을 따라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걸어갑니다.

 

언덕에 올라서면 구시락재 입니다

왜 구시락재 인지 아느냐 물었더니

구시렁대면서 걸어서 구시락재가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런가?

 

나 하나쯤이야.

나 부터 먼저.

 

구시락재는 운서마을에서 동강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입니다.

겨울이라 그런지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이 없어 썰렁하고 한적합니다.

 

추운 날씨에 개 귀찮은지 목만 내밀고 꼼짝 않는 견공이

한적한 고갯마루의 썰렁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듯합니다.

 

운서마을에서 산길을 넘어와

고갯마루에 서면 탁 터인 넓은 들판과 유유히 흐르는 엄천강에

잠시라도 멈추어 서서 바라보게 되는 조망이 펼쳐집니다.

 

이 길은 또 한 분의 대쪽 김종직의 사연을 담고 있다.

들녘 가운데 나무 군락지가 그의 유적지다.
점필재, 김종직이 누구던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유두류록과 부관참시다.

그는 세조의 왕위찬탈을 못마땅히 여겼다.

1457년 왕위찬탈을 비판하고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이른바 조의제문을 지었다.

그를 따랐던 사림 김일손이 이 문장을 사초(史草)에 넣으면서 사화의 빌미가 된다.

이 사실이 김종직이 세상을 떠난 뒤인 1498년(연산군4) 훈구파에 발각되면서

부관참시를 당하고 관련된 사림들도 죽임을 당한다.

사초 때문에 일어난 조선 최초의 무오사화(戊午士禍)다.

그는 지리산 유람 기행물 유두류록을 남겼다.

 

동강에 도착하고 마을을 지나며

눈에 익은 집을 찾습니다.

 

열정의 강도는 아는 만큼 만들어지고

보는 만큼 나온다.

그 열정은 보고 걷는 만큼 또 알아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이 높아지는 식구들은 다음 길의 시작지점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주암식당엘 갔습니다.

어탕국수와 소주 한잔으로 추위를 몰아내고

벌써 성급하게 따뜻한 봄날을 기다리듯이 우리는 다음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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