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 5.
일시:2015년 5월 24일 (일요일)
산행자:상가식구 8명 + 에스테야님 (총 9명)
걸어간 길:(지리산 둘레길 7구간). 어천마을- 웅석봉 하부헬기장- 임도-점촌-탑동-다물교육원-운리.
산행시간:09시~16시 (휴식, 긴 만찬 포함 7시간). 거리:대략 11km.
2015-05-24 지둘5 (7구간 어천-운리).gpx
2015-05-24 지둘5 (7구간 어천-운리).gtm
이번 둘레길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어천마을에서 운리마을을 잇는 약 13.3㎞의 코스다.
지금까지의 터벅 터벅 걷는 둘레길과는 다르다.
웅석봉 8부 능선까지 된비알이 한 시간 이상 계속되기 때문이다.
상가식구가 다섯 번째로 이어가는 둘레길 7구간이다.
원래 이 구간은 아침재에서 시작해 웅석봉 하부헬기장, 점촌마을, 탑동마을, 단속사지,
다물민족학교를 지나 운리까지 걸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상가식구는 어천에서 아침재로 가지 않고
어천마을에서 웅석봉 이정표를 따라 어천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올랐고
하산길에 탑동마을 단속사지를 보지 못하고 운리까지 갔다.
하부 헬기장에서 웅석봉을 올라가지 못했던 것과
지름길로 질러 먹고, 잘라 먹은 길이 아쉽다.
이 7구간 둘레길에서는 지리산 주능선을 볼 수 없다.
주능선의 조망은 웅석봉을 올라야만 가능하다.
지리99 산정무한 행사 마지막 단체 사진촬영을 하고는 바로 단성면 어천마을로 이동했다.
지난번 아침재를 넘어와 끝낸 길에서 다시 길을 이어간다.
각자 배낭에 짐을 분배하고 채비를 끝내자 단체 사진 대열로 선다.
어천마을은
단성면의 최북단에 위치한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웅석봉을 동으로 경호강을 두르고 있다.
이 마을에 우천(愚川 ) 권극유 (權克有 . 1608-1674 )가 상당 기간 동안 머물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시기는 1660년 경으로 보고 있다. 약 350년 전이다.
그의 호는 :어리내 (愚川 )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현 지명은 愚川에서 漁川 으로 바뀌어 진 것이다.
웅석봉 가는 이정표를 따라 마을 뒤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포장길을 따라가던 길이 한차례 굽이 돌고 산 중턱 기슭에 펜션인지 일반 주택인지
쌈박하고 간지나는 집 앞으로 길이 계속된다.
이 집을 지나면 웅석봉에서 내려오는 어천계곡이 길의 우측에 위치한다.
포장도로는 여기서 끝이 나고 초록의 산그늘이 시원스레 펼쳐진 산길이 환영하듯이 그 길을 열어준다.
어천 계곡의 투명하고 맑은 물에 손이라도 담그면 이 계곡의 청정함이 그대로 몸으로 들어 올듯하다.
아침재에서 걸어오면 계곡을 건너 이 지점과 만나게 된다.
어천에서 아침재로 가지 않고 지름길로 온 까닭에 이제 둘레길과 합류하게 된다.
빨간 화살표는 역시나 걸어가야 할 방향이다.
운리까지 9.5km이다.
어천 계곡은 이제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발길과는 멀리 떨어지게 된다.
지난밤 산정무한의 무한 약발인지 땀이 쉴 새 없이 흐른다.
5월의 폭염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더위 탓이겠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땀에는 그동안 찌든 술독도 같이 배출되는 느낌이다.
사부작 거리며 걷던 길이 갑작스레 경사를 세우자 9명의 대열은 길게 늘어진다.
에스테야 형님이 앞장을 선다.
경사가 만만치 않다.
길은 지그재그로 앞길과 간격을 좁히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길을 따라 사람도 지그재그로 그 길 위를 따른다.
앞에 선 사람이나 뒤에 선 사람이나 힘들기는 매한가지 일게 다.
다만, 이런 길을 올라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조금은 있을 것이다.
앞도 보이지 않은 오름길을 죽으라 기어올라 본 경험이 많을수록
이런 길이 쉬운 법이다.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사람의 인생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배낭을 내리고 한차례 휴식을 한다.
숲 속은 잠시만 앉아 있어도 시원함이 감긴다.
최대 난코스인 웅석봉 하부헬기장까지 계속 된비알로 고도를 높인다.
트인 조망도 없는 경사길을 지그재그로 땅 만 보며 올라온다.
앞선 에스테야 형님과 하부헬기장임도 길로 나오자 햇볕이 따갑도록 내리쬔다.
임도 내리막은 청계 방향이다.
지형도를 볼 필요도 없이 우측으로 웅석봉이 버티고 있다.
우측 능선을 따라 웅석봉으로 바로 붙는 길이 빤히 보인다.
에스테야 형님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웅석봉을 오르고 싶어한다.
후미의 식구를 기다리며
나무그늘을 찾아 길가에 앉았다.
웅석봉을 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후미에 식구들이 합류하고 의논 끝에 웅석봉은 패스하기로 한다.
발목이 아프다는 나의 핑계가 제일 크다.
이 길을 걷게 된다면
웬만하면 웅석봉은 꼭 올라 보시길 권한다.
후다닥 걸어 오르면 그렇게 시간을 준 만큼 주능선의 기막힌 조망이
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이제 길은 웅석봉의 허리를 흉물스럽게 깎아 놓은 임도를 따라 걷는 내리막길이다.
우측으로는 달뜨기 능선이 덕천강을 향해 엎드렸다.
웅석봉 하부헬기장.
나비가 꽃을 찾는다.
산을 헤메는 산꾼이 다름아니다.
경사길을 700여m 오르고 난 이후의 길은 아늑하리만큼 편하게 느껴진다.
이제야 웃음 띤 얼굴로 돌아보는 여유가 생긴다.
길을 잃거나 할 염려가 없으니 선두를 도맡아 걷는 에스테야 형님은
식구들과 잘 어울려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타고난 친화력으로 형님과 걷는 사람들이 즐거워한다.
한 구비 저곳을 돌아서면
아직도 아득히 멀게만 보이는 길이지만
참으로 정직하다.
내 발로 걷는 만큼, 그만큼만 갈 수 있는 산길은 늘 정직하다.
황매산이 눈으로 잠시 들어 왔다.
가장 가까운 모습을 담으려는 욕심이 그 모습을 담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은 언제나 순간이다.
아래로 산청의 모습이 술병의 작은 글씨만큼 보이다가
걸을수록 돋보기로 보는 듯 확대된다.
웅석봉 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작은 계곡을 만드는 곳에서 점심을 먹는다.
신발을 벗고 넓은 반석 위에서 유유자적 먹는 점심이다.
나누어 매고 온 음식으로 아홉 명이 포식을 한다.
한잔 두잔 나누어 마시는 반주는 잘 익힌 고기와 함께
풍족하고 만족한 만찬을 즐기게 한다.
하물며 걷는 동안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다 주워담는 에스테야 형님은
우리가 앉았든 자리를 아니 온 듯 깨끗이 정리한다.
포장도로의 단순한 길이지만 포만감의 걸음은 자꾸 휴식을 부르고
게으름을 수반 한다.
아무 데나 앉지도 않든 사람들이 이제는 자연스레 눕기도 한다.
술은 내가 먹었고 술값은 다른 사람들이 한다.
이 분을 누가 4대를 이어온 명의라 하겠는가.
술은 같이 마셨는데.
영락없는...
때죽나무꽃이 만발했다.
위로 쳐다보며 향기를 맡았다.
하얀 꽃들이 밤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 같다는 생각을 말없이 혼자서 했다.
우측으로 언뜻 보인 능선에 관해 이야기 한다.
달뜨기 능선을 이야기해 준다.
달뜨기 능선은 지리산 하봉 일대 조개골 비트에 있던 빨치산들이
이 능선 위로 떠오르는 달을 보며,
두고 온 가족과 고향 생각에 가슴 아파했다는 회한과 설움의 능선이다.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에서 달뜨기 능선이 나온다.
『앞서 걷던 문춘 참모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 정면을 바라보더니
뒤를 돌아보고 감격 어린 소리로 외쳤다. "동무들! 저기가 달뜨기요.
이제 우리는 지리산에 당도했소." 거산(巨山)의 모습이 강 너머 저 쪽에 나타나 있었다.
가까운 곳은 선명한 푸르름이고, 멀어져 감에 따라 보라색으로 변하고,
아득한 정상은 신비로운 빛깔 속에 안겨 있었다.
달뜨기는 지리산의 초입이다.
남부군은 드디어 그 긴 여로를 겪어 목적한 곳 지리산에 들어선 것이다.
수백의 눈동자가 일시에 그 신비로운 웅봉(雄峯)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하는 탄성이 대열 속에서 바람 소리처럼 일었다.
여순병란 이래의 빨치산들이 마치 고향을 그리듯 입버릇처럼 말하던 달뜨기가 아닌가.
박태영으로서도 감회가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열린다'라고 한
이현상의 말과 '과연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을까'라고 쓴
홍행기의 탄식이 뒤범벅 된 감정으로 넋을 잃고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근처 성불정사에서 달아 놓은 연등인 것 같다.
나무 높은 곳에 매달린 연등을 어떻게 달았을까를 궁금해한다.
그리움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달뜨기능선에 도착한 빨치산들이 그러했듯이.
지리산은 그리움이다.
탑동.
단속사지로 가는 둘레길이 우측으로 있다.
점촌을 지나 탑동으로 가는 길에서
단속사지를 보지 않고 도로를 따라간다.
이 결정도 순전히 내가 내린 결정이고 식구들은 그래야 하는 줄로만 안다.
점심때 먹은 술 탓을 하지만 나는 솔직히 단속사지를 깜빡 잊고 있었다.
혹, 이 길을 걷게 되는 이는 꼭 웅석봉과 함께 단속사지도 놓치지 말길 바란다.
이번 둘레길에서 두 번째로 아쉽고 후회되는 부분이다.
운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노고단을 찾아 잘못 들어 온 택시에 길을 아주 열심히 알려주는
마음씨 착한 에스테야 형님을 믿고 택시는 다시 돌아서 나간다.
에스테야 형님이 엄청난 길치 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좀 불안 했지만 더 묻지 않았다.
형님은 뿌듯해 하고 있다.
단속사지(斷俗寺址).
세속과 연을 끊다’라는 뜻을 가진 단속사는 정유재란 때 불탔다.
748년 창건했으니 춘풍추우(春風秋雨.봄바람
850년 동안 영화를 누리다 전쟁으로 폐사됐다.
단속사는 대찰이었다.
입구에 미투리(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신발)를 벗어 놓고 절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미투리가 썩어 문드러져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2기의 동서 3층석탑과 당간지주의 위치로 봐서 큰 절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심지어 이 절에서 1km 떨어진 곳에 입구로 추정되는
광제암문이 있으니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은 당시의 영화는 온데간데 없고 3층석탑 2기, 당간지주, 길바닥에 기왓장이 나뒹구는,
그야말로 이름처럼 세속과 연을 끊고 오랜 시간 침묵이 지속되고 있다.
<사진은 '생명평화 지리산 둘레길'에서 퍼옴>
정당매(政堂梅).
탑동마을. 단속사지에 ‘정당매(政堂梅)가 있다.
수령 650년, 높이 2m, 현존 최고령 매화 중 하나이다.
남명도 보았고 김일손도 보았던 그 매화나무다.
매년 봄이면 특유의 하얀 꽃을 피운다.
그러나 정당매는 안타깝게도 세력이 다해 고사됐다.
옆에 새순이 돋아 자라고 있으나 그 역시 신통치가 않다.
고려 말 진주인 통정공 강회백(姜淮伯·1357~1402)이 단속사에서 공부해 과거에 급제했다.
그가 공부할 때 매화를 심었고 벼슬이 정당문학에 올라 정당매라 했다.
지금의 매화목은 그의 증손 강희안이 다시 심은 것이다.
이런 내용은 강희안의 저서 양화소록에 남아 있다.
분홍빛이 은은한 남사마을 원정공 하즙의 원정매.
산천재에 있는 조식의 남명매와 함께 산청 3매에 속한다.
<'생명평화 지리산 둘레길'에서 퍼옴>
다물민족학교를 들여다 보았다.
에스테야 형님에게 뭐하는 곳이냐고 물었다.
당연한 대답을 들었다.
운리마을 주차장 정자에 식구들을 쉬게 하고
차를 회수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어천으로 간다.
나를 믿지 못하는 에스테야 형님이 굳이 함께 나서며
아우를 사랑해서 같이 갔다 오겠다고 한다.
18,000원의 택시비를 내고 어천에서 두 대의 차를 회수하여 돌아온다.
이틀간의 긴 여정으로 조금은 피곤했지만, 여전히 식구들은 밝은 표정이다.
가야 할 길을 저장한다.
마무리를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가
유키님이 하는 데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생각을 굴렸다.
눈 만 아프고 쓸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는 말이라고는
이 말이 전부다.
'누가 뭐라 해도, 좀 힘들어도,
나는 내 꼴리는 대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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