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13.03.03 왕산-필봉산

지리99 수야 2013. 3. 4. 02:18

왕산

독오당 40차 정기산행 & 2013년 시산제 산행

일시:2013년3월3일

참석자:산나그네님,다우님,에스테야님,귀소본능님,수야.

코스:구형왕릉-왕산사지터-수정궁터-류의태약수터-망경대-왕산-여우재-필봉-특리 동의보감촌.

거리,소요시간:8.4km.(6시간38분).

 

 

고독했고, 외로웠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고 느낀 그때.

언제부터인지 웃음은 사라졌고, 날 선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변해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된 그때부터

나는 산으로 갔다.

철저하게 혼자서.

신기했다.

산을 오르며 땀을 흘리는 동안 수많은 잡념은 사라지고 혼자임에도 고독함과 외로움은 꼬리를 감추었다.

오로지 아무런 생각도 없는 무아의 경지 같은 몰입의 상태를 지리산에서 맛본 뒤부터는 환자가 되어 버렸다.

그 이후 내가 사는 세상은 그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리고 순전히 내경험에 비추어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지리산을 가는 사람은 그만큼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일지 모른다는...

 

 

<시산제>

2013년 독오당 시산제를 올린다.

무사 안전 산행을 기원하며...

 

 

 

<호능각>

왕능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묵었다는 호능각.

 

[傳 仇衡王陵 전 구형왕릉]
국가지정 사적 제214호(‘71. 2. 9)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왕산 기슭.
이릉은 가락국의 제10대 임금이자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무덤의 형태는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잡석으로 방형의 단을 이루면서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 올려 모두 7단을 마련한 돌무덤이며 상면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토분과는 전혀 다르다.
특이한 점은 전면 4단째에 작은 감실이 마련되어 있는 것인데 그 용도는 알 수 없다.

높이는 7.15M이며 무덤 앞의 비석, 석물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 세운 것이며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축대, 교량 등을 정비하였다.


동양에서는 보기 힘든 피라미드형 왕릉으로,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가야 영토를 넘겨줄 때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지키지 못한 탓에 죽어도 임금 자격이 없다고 돌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석조 왕릉이라고 한다.

구형왕릉 주변에는 등나무나 칡 능쿨이 뻗지 못하고

위로는 까마귀와 참새도 날지 않으며

이끼와 풀이 자라지 않는 등의 신비함이 있다고 한다.

 

<구형왕>

금관가야(金官伽耶)의 제10대 왕(521~532 재위).

구충왕(仇衝王) 또는 구해왕(仇亥王)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겸지왕이며, 어머니는 각간(角干) 출충(出忠)의 딸인 숙(淑)이다.

김유신의 증조부이기도 하다.

532년(법흥왕 19) 왕비 및 세 아들 노종(奴宗)·무덕(武德)·무력(武力)과 함께 신라에 항복하여

법흥왕으로부터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금관가야는 멸망했으나 진골귀족으로 신라에 편입되어 신김씨(新金氏)라 칭하면서

신라의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아들 무력은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聖王)과 좌평(佐平) 4명을 죽이는 큰 공을 세우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워 각간의 벼슬까지 올랐다.

 

왕능의 건너편 암벽에는 사각형의 또렷한 모습이 보이는데 안에 김해김씨 족보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고 귀소본능이 전해준다.

 

 

 

 

[왕산사지]
경상남도 기념물 제164호(‘97. 1. 30 지정) 금서면 화계리 산1번지 일원
전 구형왕능의 윗쪽 산 속에 있으며, 약 200여년전에 마을사람들이 산에 올라가서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만나 왕산사에 들러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왕산사에는 언제인가 부터 법당 들보위에 커다란 나무궤가 하나 얹혀 있었는데

누구도 그 내력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그냥 손댈수 없는것으로만 전하여 지고 있었다.

그런데 비를 피하는 일행중에 민경언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평소에 담력이 센 분으로서

주지스님과 일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궤를 내려서 열어보기에 이르렀다.

그랫더니 그 속에는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그리고 활과 칼같은 유물이 나왔고

또한 명승 탄영의 왕산사기등이 나와서 이를 고증하여 왕능을 다시 찾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왕산사지는 수정궁(가락국시조대왕 별궁지)과 같은 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망경대

조선개국에 반대한 고려 공양왕 예의판서 민안부선생의 충절을 기리는 망경대


 

 

 

필봉산은 봉우리가 붓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산청 사람들은 산청에서 문필가나 선비가 많이 배출되고 있는 까닭은 이곳에 필봉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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