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중경팀 정기산행
일시:2022년 04월 24일
산행자:산유화, 연하, 황순진, 권영구, 최옥희, 최정남, 성주숙, 수야 (8명)
걸어간 길:순두류-로타리 대피소-상봉-장터목-유암폭포-중산리 주차장
산행시간:07시52분~16시49분(8시간 56분) 11km
프롤로그
미리부터 이미 과녁에 명중하도록 쏘아진 화살
백 퍼센터 명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 같은 게 운명이라 한다.
이 운명은 제 할 일을 망각하거나 늦추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외면하거나 거부해봐야 소용없는 일들이 있다.
태어나는 일과 죽는 일이 그렇고, 누군가의 자식이 되는 일이 그러하며,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 그렇다.
아마 내가 지리산과 엮이게 된 것도 어쩌면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겠다.
그러므로 지리산에서 만나고 맺어진 인연들도 또한 미리 명중하도록 쏘아진 그 화살은 아닐까.
1.
천왕봉 중봉 써레봉에서 급경사가 쏟아져 내리다가 순탄한 평원을 이룬 곳.
두류산이 순하게 흘러 평지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 순두류라 한다.
버스에서 내린 순두류엔 벌써 햇볕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 기분 좋은 그런 종류의 햇볕이었다.
같은 버스를 타고 온 등산객들의 밝고 활기찬 소란스러움이 연녹색 잎사귀에 난반사되는 햇살 같았다.
산객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난 뒤 우리는 맨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덕산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산유화 누나를 만났다.
중경팀과의 산행이 얼마 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 멀다.
그동안의 안부를 길게 물었다.
부상자와 개인 사정으로 이번 중경팀 정기산행은 유화 누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 천왕봉을 올랐다.

정규등로를 따라 천천히 꾸준히 오르는데 버스에서 내려 먼저 앞서 간 사람들을 하나 둘 추월해 나갔다.
어쩐 일인지 두 최여사는 초반부터 시종 선두에서 힘이 넘치는 듯 이 날은 쉬자는 말도 없었다.
따라가는 동안 내내 숨이 찰 정도였다.
내 속에만 넣어 두고 한 번도 말해 본 적이 없는 말이지만 중경팀의 여성 산꾼들은 참 강인하다.
사람은 최악의 상황, 극한의 상태, 어렵고 가장 힘든 때, 바로 그때 그 맨 얼굴 본모습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동안 산에서의 경험으로 비추어 보건대 그녀들은
어둡고, 춥고, 길이 아득하게 멀고, 진정 힘들 때마다 침착했고 서로를 격려하고 먼저 자신들이 아닌 다른 이를 챙겼다.
맹자 할배가 그런 말씀을 하셨단다.
득도다조(得道多助)
강한 사람은 힘이 센 사람도 아니고, 지위가 높은 사람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거나 학력이 높은 사람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도와주는(助) 사람이 많은(多) 사람이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을 이기지는 못한다.
그 사람이 잘되기를, 쓰러지지 않기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많으면 그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주위에 도와주는 사람이 많은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다.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게 되기 위해서는 인심을 얻어야만 한다.
평소에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진다.
이것을 득도다조(得道多助)라 하는데 '도를 얻은 사람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라는 뜻이란다.

순두류에서 출발해 1시간 20분 만인 9시 15분에 로터리 대피소에 닿았다.
배낭을 내리고 연근을 간식으로 나누어 먹었다.
몇 해전 이곳에서 영구 형님을 처음으로 만났었다.
이후 지리산 곳곳을 같이 오르고, 골골을 같이 걷고 있다.
사람의 인연은 설명될 수 없는 무언가로 연결되는 것 같다.

2.
사람이 우뇌의 특정 부분에 충격을 받으면 사람들의 얼굴을 세밀하게 구분하거나 기억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로터리 대피소에서 옆에서 쉬며, 같이 올라가든 어떤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작년에 혹시 대소골에 가지 않았는지.
그때 일행들과 점심으로 카레를 먹고 있더란다. 나를 그때 보았는데 기억한단다.
그날 심원 마을 입구에서 심원 샘터까지 차 회수를 하러 갈 때 아주 잠깐 차를 태워준 사람들이 자기들이란다.
대단한 눈썰미와 기억력에 많이 놀랐다.
나는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다른 것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특히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해 난처할 때가 많다.
우뇌의 특정 부분에 충격을 받아 그런 것이라면, 충격을 받아도 심하게 받았지 싶다.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수 십 년 만에 만나서 같이 밥 먹고 술 먹고 노래방까지 같이 간 여자 동창을 다음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다.
길 반대편에서 어떤 여인네가 나를 보면서 자꾸 웃으며 걸어오는 거라. 이거 뭐고?, 저 여인네가 실성을 했나?, 왜 자꾸 웃지?
어라 이거 작업 들어오는 건가? 온갖 생각을 했다. 먼저 아는 척할 수도 없고 그냥 지나갈까 했는데.
그때 그 여인네 내 앞에 딱 서드니 '야!'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서야 아, 이 사람은 나를 아는 사람이다 싶어 어정쩡하게 '어어~' 했지만 누구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미치겠더라.
그 친구가 그러더구먼 술도 먹지 않은 아주 멀쩡한 맨 정신으로 연락처도 주고받았고, 자주 보자고 까지 했다고,
그리고 이런 말을 남겨주었다. 너는 '1급 안면인식 장애'다.
이 정도인 내가 대소골에서 스치듯 지나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대소골에서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하산 후 잠시 잠깐 차를 얻어 탄 기억은 있지만 그 사람을 기억해 낸다는 것이 나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은 사람뿐 아니라 사람의 이름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는 사물의 이름도 생각이 안 날 때가 많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나만 이런 게 아니라 주위에 물어보면 다 비슷비슷하다는 거다.
술을 끊어야 되는 되는가 싶다가도 다들 그렇다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한다.

3.
세존봉 문창대가 저 건너편으로 조망되었다.
언제나 산에서 바라보는 조망은 가슴을 열어젖히게 한다.
웬만한 일에는 화도 내지 않을 것 같은 이런 넓은 마음이 어찌 된 영문인지 저 아래로 내려가면
언제나 바로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는지 모를 일이다.

얼레지가 군락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 얼레지 꽃은 고개를 살짝 숙인 수줍은 모습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대담하고 요염한 매우 파격적인 봄 꽃이다.
얼레지 꽃을 김훈 작가는 <내 젊은 날의 숲>에서 이렇게 묘사하였다
'꽃은 식물의 성기라는데, 눈을 뚫고 올라온 얼레지 꽃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암술이 늘어진 성기의 안쪽을 당돌하게도 열어 보였다.
눈 위에서 얼레지 꽃의 안쪽은 뜨거워 보였고, 거기에서도 쟁쟁쟁 소리가 들리는 듯싶었다.'
그래서일까 얼레지 꽃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 질투'란다.
얼레지 꽃잎은 6개이며 수술도 6개이다.
씨앗에서 싹이 터 꽃이 되기까지 7년이 걸린단다.

개별꽃
나는 개별꽃을 깊이 들여다볼 때마다 어떤 경우에도 끝끝내 자기 할 말 다 하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가지곤 한다.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지만 분명한 존재감으로 자신만의 개별성으로 피어 있는 모습 때문일까.
딱 그런 느낌이다.
훌쩍훌쩍 울면서도 자기주장을 절대 굽히지 않고 저 할 말 다 하는 딸아이 같은....

4.
상봉이 가까웠다.
전망대에서 깊이 숨을 들여 마셨다.
천왕봉. 지난해 12월에 올랐으니 근 5개월 만이다.
지금까지 나는 천왕봉을 몇 번이나 올랐을까.
일 년에 두서너 번은 올라간 것 같은데 정확히 몇 번을 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웅석봉과 달뜨기능선

황금능선

막바지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쇳덩이를 매단 것처럼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정상을 올려다보지 않고 바로 앞만 바라보고 꾸준히 천천히 한 계단 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힘이 들수록 멀리 보지 않는 것이 좋더라.
매번 오를 때마다 여전히 이 구간은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차다.
혓바닥이 널어져 여름 삼복더위에 내놓은 개 혓바닥처럼 할딱거렸다.
아무리 살아도 삶에서의 고통은 익숙해지지 않는 것처럼 산행과 삶은 많이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천왕봉 1915m
정상석에는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길게 서서 사람들이 기다렸다.
은행에 가면 번호표 뽑는 것처럼 번호표라도 나누어 주어야 될 성싶었다.
한 번만 더 찍자는 사람과 웬만하면 뒷사람을 위해 좀 비켜 달라는 소란으로 옥신각신하였다.
정상석만 찍고 얼른 아래로 내려갔다.

일월대(日月臺)
천왕봉 정상석 남쪽의 바위면에 일월대 석각이 햇볕에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
상봉, 천주와 더불어 천왕봉의 다른 이름이다. 요즘으로 치면 닉네임 정도라 해도 될까.
기록으로 보면 저 석각은 100여 년 전쯤에 새겨진 것이라 한다.
죽헌 정태현(1858~1919)의 글씨이며 정태현은 일두 정여창의 14대 후손으로 충북 관찰사, 가선대부 등을 역임한 관료라고 한다.

천주

5.
상봉에 맨 먼저 올라온 터라 일월대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쉬면서 후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차례 일행들이 내가 있는 곳으로 알아서 찾아왔다.
막걸리 한 병을 거의 다 비워 갈 때쯤, 연하 형님이 자신의 배낭은 맨체로 배낭 하나를 더 둘러매고 올라섰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산유화 누나가 급체인지 너무 힘들어해서 누나 배낭을 가져왔단다.
대체로 이럴 땐 훌륭하고 감동적이며 바람직하다고 칭찬을 해야 마땅하겠지만 우리는 동시에 의논이라도 한 듯이
배낭을 버리고 사람을 업고 오지 않은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어떤 세계에 들어가 그 일원이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의 비판을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연하 형님은 우리의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 보아 우리 세계에 속한 사람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산유화 누나는 급체 처치 전문가의 손길로 등을 두드리고 주물러고 바늘로 손가락을 따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해졌다.
그 결과 나를 저렇게 세우고 사진도 찍어 주었다.

제석봉으로 가는 길 통천문 위에서 걸음은 한참을 멈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을 그냥 지나쳐 가기가 아까워서였다.
진지한 열락, 심란한 쾌감, 뻐근한 행복감 같은 모순적인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시간은 짧기만 했다.

통천문을 지나고 제석봉으로 가는 길은 편안하게 좌우의 조망을 즐기며 걸을 수 있어 마음도 몸도 가벼웠다.

제석봉 전망대에서 돌아본 천왕봉
연하 형님은 혼자서 살펴야 할 것이 많은 것인지, 우리가 모르는 수작이 있는 것인지, 다른 여성 산꾼들 속에서 우리를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연하야아~ 소리를 쳐 부르자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듯 빠르게 전망대의 우리들에게로 달려왔다.
마치 나쁜 짓 하다 들킨 사춘기 소년 같았다.

제석봉의 고사목은 점점 사라져 몇 개 남지도 않았다.
사라진다는 것은 늘 안타깝다.

6.
매우 보기 싫은 사람이나 극히 혐오스러운 언행을 마주 할 때 우리는 흔히 '밥 맛이다.'는 말을 쓴다.
이때 '밥 맛이다'라는 것은 '밥 맛이 없다'는 말이다. '밥이 맛이 없을 정도로 정나미가 떨어진다'는 의미이다.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인 밥이 먹기 싫을 정도이니 심각한 상황인 거다.
최소한 살면서 누구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정도로 밥맛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밥 상을 펼쳐놓고 쓸데없는 생각을 펼치고 있는데 한 무리의 청년들이 우리 옆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그들이 펼친 밥상에 김치라도 있었으면 좋을 것 같다며 오지랖 넓은 아줌마들이 처음에는 김치를 가져다주었고,
아들 같다며 나중에는 이것저것이 그쪽으로 옮겨갔다.
고마워하고 감사해하는 청년들에게 밥맛 없는 꼰대들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대구에서 왔다는 청년들의 젊음이 봄 산 같이 싱그러웠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우리의 한 시절이 거기에 있었다. 무척이나 부러웠다.




로터리 대피소에서부터 허옇게 살키를 많이도 내놓고 우리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든 젊은 처자들이 있었다.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산에서 굳이 저렇게 벗어야 하는가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꼰대가 분명하다.
나중에 하산길에 앞에서 쉬고 있는 그들을 보았는데 햇볕 아래 드러낸 맨 살은 김이 모락모락 날지경으로 벌겋게 익어 있었다.
상처에 소금물이 들어간 것처럼 바라본 내 몸이 따끔거렸다.
이 코스 하산길은 늘 지루했다.
무릎이 뻐근했다.
유암 폭포에서 쉬었다.
언제 갔는지 영구 형과 연하 형님이 폭포의 위쪽에 가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포즈를 요구하며 사진을 찍는 척하였다.
"아직도 멀었나." 하고 물어 올 오랫동안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사진은 사실 찍지 않았다.

사람은 자신이 잘 아는 공간,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공간에서 가장 빛난다.
화가는 아틀리에에서, 음악가는 무대에서, 요리사는 레스토랑에서 처럼.
산꾼들은 당연히 산에서 빛나야 한다.
산에서 산꾼처럼 산꾼다운 웃음으로 웃고 싶어 진다.
석가모니 부처가 인도의 영취산에서 많은 대중을 모아 놓고 설법을 하던 중
깨달음에 이른 그 진리를 말로서 설명할 수 없어서 연꽃을 들어 보였다.
이때 제자들은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때, '마하가섭'만이 이를 알아보고
역시 그 깨달음을 말로서 대답할 수 없어서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부처님은 그제야 "나의 법은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하고 법을 부촉하셨다.
염화시중은 바로 대중에게 연꽃을 쥐어 보인다.라는 뜻이다.
마하가섭의 미소는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는 뜻으로 이심전심과 같다.
이때의 미소를 '염화시중의 미소'라 하는데 산을 다 내려서자 모두의 얼굴에서 바로 그 염화시중의 미소가 번졌다.
산꾼들의 웃음이기도 했다.

에필로그
지리산을 좀 다녔다고, 좀 안다고 자부하며 초심을 내팽개치지는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밥 맛이다.'말은 듣지 않고 살아야 할 터인데 산행기랍시고 괴발개발 흘린 글들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가끔 있다.
해변에서 물장구 몇 번 쳐보았다고 바다를 다 안다고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오만은 없었는지 자꾸만 자기 검열이 심해진다.
그러면서도 은근한 욕심을 버릴 수가 없다.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많이, 더 오래 지리산에 들고 싶다.
내 운명의 인연들과 어디까지 어떤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른다.
이미 명중하도록 과녁을 향해 정해진대로 나아가는 운명의 화살에 맞껴 볼 수밖에.
그래서 궁금하다. 궁금하니 갈 수 있는데 까지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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