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싯골
일시:2021년 01월 24일 일요일
산행자:산유화, 권영구, 황순진, 수야
걸어간 길:소막골 야영장 주차장- 손싯골- (가)장당능선-관음암불상터-석남사지-우량기-장당골-내원사
산행시간:08시 10분~17시 18분 (9시간 08분) 11km
오룩스 맵 지도에는 손싯골과 소막골이 같이 표기되어 있는데 오기 인 듯하다.
소막골은 계곡을 기준으로 매표소 야영장 다리 건너편 계곡인 것 같다.
소막골은 옛날에 소(牛)를 키우는 외양간이 있다 하여 "소막골"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손싯골은 현지인들이 '손씨골'로 부른다고 하였다.
중국 극동 지방에서 자라는 '모소'라는 대나무가 있다고 한다.
이 대나무는 씨앗을 뿌리고 4년 동안은 3cm밖에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4년 동안 3cm라면 1년에 1cm도 성장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5년이 되는 해부터는 6주 동안 매일 30cm씩 자라는데 15m 이상을 자라 울창한 대숲을 이룬다고 한다.
3cm밖에 자라지 못한 4년의 시간은 땅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다.
그것은 기다림이다.
겨울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기다림을 통과하여야만 봄을 맞이 할 수 있다는 자연의 숭고한 가르침이 겨울이다.
매서운 한파와 한설을 견디어 내고 난 뒤에야 매화는 추위 속에서 꽃망울을 피워낸다.
매화 같은 인동한매(忍冬寒梅)의 생리로, 모소 대나무의 기다림으로 견뎌 내야 하는 계절이 겨울이다.
뼛속까지 닿는 냉기라 할지라도 참고 걷다 보면 봄은 저기 어디쯤에서 마주 오리라.
나는 그 기다림을 지금 살아 내는 중이다.
8시 10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산행 준비가 끝난 산유화 누님은 한참을 곁에 서서 기다렸다.
등산화 신고, 스틱 길이 맞추고, 배낭 짐 정리, 옷 벗고, 옷 입고, 오룩스 켜고....
"다 됏나?" "다 됐지 시 푼데 예."
그러나 저만치 걸어가다가 차에 두고 온 카메라를 다시 챙기고서야 산행은 시작되었다.
소막골 야영장 다리를 건너자 막아 놓은 다리 끝 부분을 넘어야 했다.
비를 맞아 물기가 남아 있는 난간의 둥근 나무는 매우 미끄러웠다.
경쾌하게 사뿐히 넘어갈 수 없는 장애물을 조심스럽게 모두 무사히 넘었다.
다리를 넘자 말자 딱 버티고 선 산은 가야 할 희미한 방향마저 감추고 있었다.
좌우를 자세히 살피다 좌측으로 난 희미한 길 흔적을 찾아냈다.
이후 길은 의외로 선명하였다.
봄이라 하여도 무방 할 만큼 날씨는 포근했다.
잔뜩 껴 입은 옷이 부담되었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졌다.
미끄러운 계곡을 피해 계곡 옆 사면의 길을 걷기 위해 애를 썼다.
습기를 머금은 돌과 얼어 있는 계곡은 위험하고 까탈스러웠다.
유화 누님은 예전 산길 탐구를 하면서 완결하지 못한 이 길을 이어 보고 싶어 했다.
붉은 점선을 따라 초반 길은 잘 다져져 있었다.
절묘한 균형으로 버티고 있는 바위를 지나갔다.
이쪽에서만 보면 절묘하였으나 저쪽에서 보면 그저 큰 바위 하나가 바위 위에 걸쳐져 있었을 뿐이었다.
요즘 읽고 있는 신영복의 <담론>에 나오는 이양역지(以羊易之)가 생각났다.
이양역지(以羊易之)
맹자가 인자하기로 소문난 제나라 선왕을 찾아가서 자기가 들은 소문을 확인합니다.
소문은 이런 것입니다. 선왕이 소를 끌고 지나가는 신하에게 묻습니다.
“그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혼종 하러 갑니다.” 혼종이란 종을 새로 주조하면 소를 죽여서 목에서 나오는 피를 종에 바르는 의식입니다.
소는 제물로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 소가 벌벌 떨면서 눈물을 흘렸던가 봅니다.
임금이 “그 소 놓아주어라”라고 합니다. 신하가 “그렇다면 혼종을 폐지할까요?” “혼종이야 어찌 폐지할 수 있겠느냐.
양으로 바꾸어서 제를 지내라”라고 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요컨대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以羊易之) 지시한 적이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자, 왜 바꾸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묻습니다.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사지로 끌려가는(穀觫若 無罪而就死地) 소가 불쌍해서 바꾸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양은 불쌍하지 않습니까? 양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험담처럼 큰 것을 작은 것으로 바꾼 인색함 때문이 아니었던 것 역시 분명합니다.
맹자는 선왕 자신도 모르고 있는 이유를 이야기해 줍니다.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소를 양으로 바꾼 이유는 양은 보지 못했고 소는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맹자의 해석이었습니다.
우리가 『맹자』의 이 대목에서 생각하자는 것은 ‘본 것’과 ‘못 본 것’의 엄청난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생사가 갈리는 차이입니다. 본다는 것은 만남입니다.
보고, 만나고, 서로 아는, 이를테면 ‘관계’가 있는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의 엄청난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곡속장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쏟아져 내려오는 계곡 물에 뿌리가 거의 다 드러난 채 위태로운 삶을 지탱하고 있는 나무 곁에서 쉬었다.
간혹, 상가에 조문을 가거나 가까웠든 인연의 부고를 받았을 때 죽음에 대한 생각이 오래 머물 때가 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다소 철학적(?)이고 깊은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돌아서면 빠르게 그것들이 잊히고 현실에 바둥거리는 모습으로 돌아와 버리곤 한다.
그 생각들 중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조르바처럼 또, 연암 박지원과 같은 산뜻한 낙화를 꿈꾸어 본 적이 있다.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듯이 생의 마감 또한 그러하겠지만 될 수 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든 유화 누나가 그랬다.
병풍 뒤에 누워서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면서 떠나갈 때 그때 꼭 이리 이야기해 주마고.
"내 카마 먼저 간 끼네 좋나, 우리 이야기 들어면서 죽은 기네 좋나"
흠.... 이 말의 전제에는 유화 누나는 반드시 나를 먼저 보내겠다는 것이 아닌가.
계곡을 한 참을 오르자 한 무더기 얼음이 겨울임을 알려 줄 뿐 장갑을 벗어도 아무 지장이 없을 만큼 날씨는 따뜻했다.
땀이 삐질삐질 솟았다.
지금까지 내의를 입지 않고 살았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추위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딴에는 단단히 준비를 한다고 오늘 내의를 입었다.
하필이면 이리 포근한 날.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나처럼 미련한 사람이 세 사람이 더 있었다는 것이 다소 위로가 되었다.
계곡을 따라 길은 고도 660m 합수지점 부근에서 우측 계곡으로 이어졌다.
우측 계곡을 100여 m 올라간 길이 750m 부근에서 사라지며 찾기가 어려워졌다.
계곡을 치고 오르기엔 앞에 보이는 잡목에 벌써 기가 질렸다.
누군가 지나간 흔적이 우측의 능선을 향해 있었고, 그 길이 고생을 덜 할 것 같은 예감으로 다가왔다.
두 형들의 생각도 같았고, 유화 누나도 동의했다.
능선으로 치고 오르는 길은 삐딱하게 비탈진 채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못되게 굴었다.
매우 숨차고 힘이 들었다.
오르막은 가소롭다는 듯 오를수록 더욱 고개에 힘을 주고 반항했다.
오르막뿐이라면 다소 이겨 낼 만하였겠으나 뻗친 된비알에서 만나는 키 큰 산죽은 죽을 맛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오름길의 거칠고 까칠한 키를 훌쩍 넘는 산죽을 헤치고 헤쳤다.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 경에게 기자 물었다.
"어떻게 그 높은 곳을 오를 수 있었습니까?"
"한 발 한 발 걸어 올랐습니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살아 내는 삶이 투영되는 심오한 답변이다.
그렇게 올라갔다. 한 발 한 발 씩 걸어서.
첫 조망이 펼쳐졌다.
시원하였다. 흐르는 땀이 식어 들었다.
왕등재를 지나 온 동부 능선이 깃대봉에서 꺾여 웅석봉을 향하는 산줄기를 따라 시선이 이동했다.
능선에 올라서고 난 뒤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동부의 능선에서 분기하여 뻗어 내리는 치밭목 능선이 이어져 내려오는 장당골 바로 위 능선이다.
이 능선의 산죽들도 만만한 기세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관음암 불상터로 가는 능선길 내내 산죽은 무자비하게 가로막고 할퀴고 잡아당겼다.
물기까지 머금은 것들의 거친 저항은 참으로 억측스럽고 악착같았다.
모자를 벗어 버린 내 머리에서는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산죽을 헤엄치다 뒷사람이 따라오나 싶어 돌아보면 유화 누나가 등 뒤에 바짝 다가와 있곤 했다.
지도에 조망봉으로 표기된 곳에서 상고대가 만연한 상봉을 보았다.
지나 온 노고가 아깝지 않은 광경에 경탄하였다.
저곳에 있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기도 하였지만, 짝사랑하는 누군가를 담장 넘어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지긋하고 아련한 가슴 뜀이 더 좋지 않느냐고 내가 말했든 것 같다.
내가 말해놓고도 너무 좋은 비유인 것 같았다.
아무도 호응 해 주지 않았다.
지가 말해놓고 지 혼자 도취하였다.
조망봉 위에는 영구 형님 혼자만 올라갔다.
배가 몹시 고파왔다.
걸음은 저절로 빨라졌다. 빠른 걸음으로 도착한 관음암 불상터에서 예의상 그래야 될 것 같아 먼저 예를 갖추었다.
황후의 밥상이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산중에 펼쳐졌다.
은의님이 꼼꼼하게 일일이 챙겨서 보내준 것들이었다.
200만 원짜리 값비싼 담금주를 음미하였다.
뒤이어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맑고 영롱한 병 속의 그것들로 인해 아주 쉽게 모두는 마음의 문을 열어젖혔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한 정현종의 시(詩)에 나오는 그 섬에도 아마 술이 있으리라.
첫사랑에 대한 회고가 순진 형님과 영구 형님을 거쳐 나까지 이어지고 유화 누나까지 슬쩍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술의 위대한 순기능이다. 진솔한 인간관계를 연결하는 매개체임을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그 첫사랑의 이야기에는 모두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가슴만 설레다 결국 손도 한 번 못 잡아 보고 끝났다는 것이다.
그 애잔함이 있었기에 여태 생생히 기억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신라의 두온애랑 이라는 화랑이 어떤 연유로 사망하였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비는 애절함으로 관음바위 위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였다.
비로자나불은 현재 내원사 비로전에 모셔져 있다.
불상이 있었든 곳에서 발견된 사리합에 새겨진 명문에는 조성 연대와 경위를 간략하게 기록해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다.
'원하여 바라는 것은,
두온애랑의 영신과 이것을 본 사람이나 향하여 정례(頂禮)한 사람이나
멀리서 듣고 와서 수희(隨喜-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자신의 일처럼 따라서 함께 기뻐함)하는 사람이나
그림자 가운데를 지나간 이나 불어서 지나간 바람이 지나간 곳의 모든 곳에 있는 일체의 중생이나
모두의 삼악도(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업보가 소멸하여 스스로 부처인 것을 깨닫고
세상을 뜨도록 다짐하는 것이다.'
-지리구구 문화유적명소방 [관음암(觀音巖)] 탐구시말 - <두온애랑>을 위한 진혼곡 꼭대님 계시물-
아마도 두온애랑의 부모는 그 절절한 애절함으로 불상 조성을 하였으리라.
요약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는 말이다.
나의 이해가 왜소하고 협소하기에 오류가 있다면 바로 잡아 주시길 바란다.
이곳은 벌써 여러 번 왔었든 장소이다.
두온애랑의 사연 속에서 나는 문득 세월호를 생각했다.
상봉의 구름이 벗겨지며 그 모습을 한동안 맑게 보여 주었다.
여러 방향에서 보게 되는 천왕봉은 그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나는 조금 멀찍이서 이렇게 바라보는 천왕봉의 모습을 좋아한다.
뭔지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 저곳의 기운이 느껴지는 듯도 하고
어떤 대단한 일을 끝내고 맞이하는 뿌듯함과 칭찬의 말을 듣는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이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는 말, 그 함축된 말은 언제나 "아! 좋다."이다.
석남사지에 들였다.
산유화 누나의 탐구성은 여전히 왕성하여 맨 위 상단부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다 왔다.
몇 번 와 보았다는 핑계로 순진 형님과 나는 그동안 아래에서 노닥거렸다.
와 본 경험과 횟수는 누나가 훨씬 많겠지만 누나는 그르려니 하며 우리를 타박하지 않았다.
하산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우량계 앞 까지 단숨에 내려왔다.
임도를 따라 걷는 길은 그야말로 뒷짐을 지고 걷는 여유 있는 산보였다.
낮에 걸려있는 밤의 징표는 새삼스럽고 특이하게 느껴졌다.
여유 있는 걸음은 콧노래 마저 흥얼거리게 하였다.
이미 밑천이 소진되고 없는데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자꾸 해 보라는 유화 누나의 보챔은 이제 공허했다.
물 위를 걷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한 발이 물속에 빠지기 전 다른 발을 옮겨 놓으면 물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분명히 맞는 말이지만 성공 확률은 단언컨데 제로이다.
내원사에서 유화 누님 동생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유화 누나가 차량 회수를 부탁하였다.
순진 형님과 동생분은 소막골 주차장으로 차를 회수하러 가고 그동안 우리는 내원사를 둘러보았다.
몇 번을 들린 곳이라 조용하고 빠르게 이곳저곳을 보고 지나갔다.
유화 누나는 입구 계곡에 매달린 호박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혼자서 그곳으로 갔다.
"내가 하늘에 별을 따 달라고 하나, 달을 따 달라고 하나, 그저 호박 하나 따 달라는데 그것도 못 들어주나" 카면서....
오늘은 비로전에는 들어 가 보지 못하였다.
삼층석탑을 둘러보고 명옹대, 만화담 각자를 보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한 지붕 아래 칠성각, 천왕각, 산신각 3개의 전각이 모여 있었다.
명옹대(明翁臺),만화담(萬花潭)
명암 정식(1683~1746)의 글씨라고 하였다.
일단 한문은 머리부터 아프다.
엉겅퀴 형님께 물어보았다.
명옹(明翁)은 명암 정식의 자호라는 것이다. 명암이라는 호 이외에 다른 호 정도인가 보다.
옹(翁) 자는 명나라에 자신을 낮추어 쓴 정도의 뜻이라 이해하면 되지 싶었다.
명나라의 유민을 자처하며 의리를 지키고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다는 조선의 선비.
숭명배청(명나라를 숭배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의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는 있겠으나 지금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사대주의가 아닌가 하고 반문도 해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들의 나라를 소중화(작은 중국)로 여기는 일류 선비들 보다
자신을 삼류 선비로 지칭하며 청나라를 배워야 한다는
연암의 북학이 나는 훨씬 더 감동스러웠음을 숨기지 않겠다.
명옹대 각자 아래 바위의 옆에 있다고 한 만화담(萬花潭) 글자는 도통 보이지 않았다.
각자를 찾아낸 산유화 누나 조차도 찾지를 못했다.
도화동으로도 불린 내원 계곡의 봉숭아꽃과 크고 작은 폭포로 인해 새긴 각자라고 엉겅퀴 형님이 알려주었다.
덕분에 지리구구에서 관련된 글들을 찾아서 다 읽었다.
학교 다닐 적에 내 공부를 이리 했더라면 아마도 큰 일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여러 삶의 형태 중에
뱀처럼 사는 삶과 새처럼 사는 삶을 비교한 글을 본 적이 있다.
하늘 높이 날며 우아하게 사는 새의 삶이 희망과 이상도 같이 높고 거룩한 삶이라면,
땅을 맨 몸으로 기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낮은 현실적인 삶을 뱀에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리구구에 올라오는 산행기의 글 들을 좋아한다.
어떤 유명 작가의 글 보다 힘이 느껴지고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직접 산을 걸어 올라 체험하고 몸으로 쓴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수미상관의 완결성도 없고 두서도 없는 내 산행기가 늘 부끄럽고 졸렬하지만 산행기 방에 올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도 그것이다.
산꾼이라면, 그곳을 가 본 적이 있는 산꾼이라면, 깊은 의미를 담지 않은 문장이라 할지라도 무슨 말인지
소통되리라 믿기 때문에 나는 산행기 올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글을 올리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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