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불재-삼신봉
행동팀103-지리 80차
일시:2020년 5월 10일
산행자:연하,노을,노을지기,최옥희,최정남,최규다,들풀,이종철,최미희,둘렘이,수야 (11명)
걸어간 길:청학동 주차장-미륵암 옛길-미륵암터-외삼신봉-갓걸이재-
삼신봉-내삼신봉-송정굴-하동 독바위-삼성궁 사거리-삼성궁-삼성궁교
산행시간:08시 40분 ~17시 18분 (8시간 38분) 9.5km
1차:3월 8일:외둔-성재봉-원강재
2차:4월 12일:원강재-상불재(삼성궁 삼거리)
3차:5월 10일:상불재-삼신봉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뺌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도종환-

세 번째 이어가는 길
세 번 다 산행 전 날 비가 내렸다.
덕분에 깨끗하고 맑은 공기는 덤으로 따라왔고, 구름이 낮게 깔리며 만들어 내는
지리산의 풍경에 흠뻑 빠져 들었다.
5월의 풋풋하고 싱그러운 신록의 숲 속을 걷는 걸음이 경쾌했다.
밤새 생각보다 많은 비가 내린 모양이다.
계곡의 물소리는 우렁찼다.
빠르게 멀리 걸어야 할 코스가 아닌 이상 서두르지 않아도 될 길이다.
미륵암터를 거처 외삼신봉을 거치는 우회길을 더 넣어 코스를 그렸다.
정규등로를 벗어나 미륵암 옛길로 접어들고 묵은 길 흔적을 따라 미륵암터에 당도했다.
등로에서 불과 200여m의 거리에 불과했다.
표지기가 다 사라진 길은 긴가민가 할 정도로 희미했다.
최대한 트랙을 따랐지만 살짝 벗어나는 경우도 조금 있었다.
미륵암 터에서 배낭을 내리고 한참을 쉬었다.
독오당 산행 때 점골(정골)로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었다.
박산행 후 누군가 놓고 간 물건들은 다시 사용할 목적인지 정돈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미륵암은 일제 강점기 말쯤 중수를 했었든 곳이다.
'미륵암 중수 기념'각자가 그리 추증할 수 있는 근거였다.
폐사지의 허허로움은 환하게 피어나는 봄 꽃들에 잠시 가려져있었다.
미륵암터에서 100여m 더 고도를 높여 외삼신봉에 올라섰다.
1,288m 외삼신봉에 숨차게 올라서자 흘린 땀에 대한 보상 치고는 과분한 풍경이 펼쳐졌다.
구름이 살짝 가려 송두리째 들어내지 않아 더 섹시 해 보이는
상봉을 필두로 그야말로 그림 같은 세상이 푸르고 맑게 눈 앞에 다가왔다.
망막에 새기듯이 사방을 천천히 훑었다.
가야 할 능선의 쇠통 바위와 하동 독바위가 선명했고,
걸어서 지나 온 길들도 멀리 아주 길게 보였다.
내려가야 할 길에 가는골과 삼성궁은 또렷하게 가까운 듯 보였다.
몹시 분답했고, 분주했고, 소란스러웠다.
환장하겠다는 감탄사가 조금 수그러들고 난 뒤 단체로 사진을 찍었다.
인생은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비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다.
인생은 원래 고단하고 억울하고 불안하다. 그런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 정상이고 그런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버팀이 되고, 사람은 그렇게 사람 속에서, 그렇게 사람들과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억울하고 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복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이 또한 인생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이 맺어준 그런 좋은 인연에 나는 늘 감사하다.


웃지 마라
그 미소 때문에 눈이 부시잖소!.

건너편으로 관음봉 거사봉 시루봉 회남재를 지나 삼신지맥이 길게 능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외삼신봉에서 한바탕 놀고 난 뒤 갓걸이재로 향해 갔다.
배낭 없이 마주오는 몇 사람의 산꾼들을 만났다.
아마도 갓걸이재 부근에 배낭을 두고 외삼신봉을 왕복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분들이 갓걸이재에 벗어 놓은 배낭을 지나쳐 바로 삼신봉에 올라갔다.

삼신봉에 올라서고 주능선을 향해 마주 섰다.
단천골과 단천지능 너머로 운무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주능선이 동서로 길게 펼쳐졌다.
다음에 이어서 걸어갈 길도 눈으로 먼저 살펴보았다.

가야 할 내삼신봉은 닿을 듯이 가까웠다.

지리산 봉우리 이름 가운데 신(神) 자를 붙인 곳이 흔치 않은데
주능선 세석고원에서 흘러온 10km의 산맥이 맞닿은 영신봉과 삼신봉은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다.
청학동에서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오른쪽 외삼신봉이 1,286m,
왼쪽의 내삼신봉이 1,355m로 가장 높으며, 가운데 삼신봉이 1,290m로 주능선에서 건너온 산맥이
좌우로 갈라지는 곳이다.
삼신봉은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100리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최고의 전망대이다.

삼신봉에서도 오래 놀았다.
주능선을 따라 온전히 봉우리마다 이름을 짚어냈다.
따뜻한 햇살 아래 철쭉은 사람들의 웃음 같은 화사함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부부는 힘도 좋고, 사이도 좋았다.
젊고 힘이 좋아 금실이 좋은 것인지, 사이가 좋아 딱 붙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빠르게 걷고, 앞서서 걸었다.
★부부금실(夫婦琴瑟) :본 뜻
금실은 본래 거문고와 비파를 뜻하는 금슬(琴瑟)이 원말이다.
거문고와 비파 소리의 어울림이 아주 좋다는 데서 온 말이다.
바뀐 뜻
금실은 본래 ‘금실지락(琴瑟之樂)’의 준말로서,
부부 사이의 다정하고 화목한 즐거움, 부부간의 애정을 뜻하는 말이다.

내삼신봉에서는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먹었다.

삼신봉에서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다음에 걸어야 할 남부 능선.
그 능선을 배경으로 잘 걷고 힘 좋고 부부금실도 좋은 최미희 님을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영신봉도 천왕봉도 계속 구름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지리 동부의 능선과 그 넘어의 산들도 선명하였다.


서북방향은 구름이 뒤덮여 구름바다를 이루었다.
마치 하늘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야 할 능선 넘어 광양의 억불봉 백운산 도솔봉이 가까운 듯 보였다.

넓게 파노라마로 남부 능선과 주능선을 잡아도 보았다.

화개장터 같은 점심을 먹었다.
있을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다양하고 푸짐한 점심을 1시간 40분 동안 느긋하게 즐겼다.
송정굴을 들여다 보고는 바로 쇠통바위를 향해 걸었다.

쇠통바위는 몇 사람만 올라갔다.
팀장님이 한 번도 올라보지 않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가고 나머지는 아래에서 쉬었다.
두 개의 큰 바위가 머리를 맞댄 채 비스듬히 서 있고
그사이에 열쇠 구멍과 같은 구멍을 남겨 놓아 쇠통과 같은 형상을 한 쇠통바위.
열쇠 같은 바위가 이 쇠통바위에 맞물리면 천지개벽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동 독바위까지 그야말로 쉬지 않고 단숨에 도착했다.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개머리같이 생겼다고 멀리서 바라보며 그렇게들 말했다.

청학동 아래 묵계 저수지의 저 물은 하동호로 흐르고 다시 섬진강을 거처 남해바다로 흘러간다.
사진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남해의 섬들이 선명했다.
오랜만에 눈은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시원해지고 밝아졌다.


이 세상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고 한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이다.
길은 걸어가 봐야 길을 알게 되고, 산은 올라가 봐야 그 산을 알 수 있다.
사람은 겪어 보아야 그 사람을 알게 되고 그 사람의 마음도 보이게 된다.
반듯하며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겸손함에다 따뜻한 가슴까지 가진
참 괜찮은 이 사내와 내가
한결같은 무게로, 따뜻한 가슴으로 오래도록 함께 이 산을 같이 오르게 해 달라고 손을 모았다.

자꾸 왜 이러세요.
그렇게 웃으면 진짜 눈을 못 뜨겠다니까.
눈이 하도 부셔서

산죽밭을 제법 헤치고 삼성궁 삼거리에 내려섰다.
이곳 삼성궁 삼거리에서 삼신봉까지 가는 것이 원래 걷는 방향이다.
그러나 처음 형제봉에서 처럼 오늘도 역방향으로 돌아 이곳과 닿았다.
삼성궁 삼거리에서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많이 파이고 흘러내려 급경사에 미끄러웠다.
로프를 잡거나 길 옆으로 붙어 내렸다.

내려오든 길에 삼성궁 방향으로 막아놓은 길을 넘어 팀장님이 앞장서 들어갔다.
한 잎이 다른 잎을 이끌고 벽을 넘어가는 담쟁이처럼 모두 같은 길로 들어갔다.
돌로 쌓은 성벽이 나타났고 넘지 못한 우리는 계곡을 넘어 진입을 시도했다.
가보지 않은 산길이라 들어갔을 뿐 입장료를 내지 않기 위한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입장료는 1인 7000원이었다.
아이고야 7만 7천 원.... 7만 7천 원이면 캔 맥주가 몇 개고?


아주 오래전 들어와 본 삼성궁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다.
계곡 옆으로 어마어마한 넓이에 돌로 쌓은 성벽과 돌탑들.
구석구석을 돌아보지는 않았고 입구 방향으로 걸으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청학동 주민들은 모두 강대성(姜大成, 1898〜1954)이 창시한 유불선갱정유도교(儒佛仙更定儒道敎)라는
신흥종교를 믿고 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 이곳에 모여들어 마을을 형성하였다.
갱정유도는 단군계 신흥종교로 일명 일심교라고도 하는데,
그 정식 명칭은 ‘시운기화 유불선동서학 합일대도 대명다경 대길유도 갱정교화일심
(時運氣和儒佛仙東西學合一大道大明多慶大吉儒道更定敎化一心)’이다.
남원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지리산 청학동에는 수련소를 설치해 놓았다.
갱정유도의 사회적 표상은 집단생활을 한다는 것 이외에도, 신도는 한복에 푸른 조끼를 입고
남자와 여자가 모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길게 늘어뜨린다는 점이다.
성인이 되면 옛 선비들처럼 상투를 틀고 큰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다.
자녀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고 서당에 보낸다.
특히, 현대문명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라는 점이 갱정유도의 큰 특징이다.
또한, 주색초(酒色草)를 엄격히 금하나, 때로는 허용하기도 한다.
청학동은
1956년경 신흥 종교인 갱정유도인(更定儒道人)들이 외부에서 들어와 학동마을에 정주하면서부터였다.
집단 신앙촌의 독특한 경관 구성과 삶의 방식이 주위에 알려지고, 동시에 매스미디어가
도인촌의 장소 이미지를 복고적인 향수와 신비적인 공간으로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이에 갱정유도인들도 도인에서 청학동 사람으로 정체성을 바꾸며, 1986년에 청학동으로 명명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현대의 묵계리 청학동 도인촌은, 지리산 청학동이라는 이상향의 장소 이미지로 포장되면서
관광지로서의 이상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높이 나는 새는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린다.
심지어 뼈 속까지 비워야 한다.
많은 것을 가질수록 높이 날기 어렵다.
여전히 아직도 많은 날 나는 산에 들 것이다.
산을 오를 때마다 높이 나는 새처럼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혼자가 아니라 함께 같이 오르고 같이 내려오기 위해 나는 내가 버려야 할 것을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 하나를 더 했다.
기왕이면 웃고 살자.
눈이 부시도록 환한 저 웃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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