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능선
일시:2017년 6월 27일~28일
산행자:수야
걸어간 길:(27일) 거림-자빠진골-한벗샘-남부능선-석문-영신대-영신봉-세석대피소
(28일) 세석대피소-촛대봉-청학연못-거림골-거림
마음은 장렬하지만, 몸은 허망하기만 하다.
마음을 따르지 않는 몸이지만
그래도 지리산에 가야겠다.
남들 하루 만에 오고 갈 거리를 나는 이틀에 가면 될 일이다.
세석대피소 예약을 했다.
이번 주말 독오당 정기 산행도 있으니, 짧게 갔다 오라는 대장님의
염려스러운 전화를 받는다.
머릿속에 그린 산길 3분의 1을 버린다.
거림에서 걸어 오른다.
오가는 산꾼 하나 없는 평일 산길은 한적하다.
몸도 마음도 배낭도 다 가볍다.
약하게 뿌려대는 비는 이미 상관없는 일이다.
혼자 걷는 길
여러 생각이 엉겨 붙는 시간이 지나간다.
몸이 슬슬 풀린다.
잡생각이 사라진다.
머릿속이 단순해지면 마음이 느긋해지는 법이다.
아~ 조오타!
미친놈이다.
2008년 가을 자빠진 골을 혼자 올라갔다.
오룩스맵이 없었던 그때는 산행기를 읽고 또 읽고 주요 구간은 메모까지 해서 다녔다.
자빠진골을 찾아 들어가는 기준으로 삼았던 구조목 03-03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세상은 편리하고 빠르게 진화하고 발전한다.
참,좋은 세상이다.
이 좋은 세상 오래오래 지리산을 다니고 싶다.
어제저녁 배낭을 꾸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딸래미가 그랬다.
"내 인자 열여덟 살이다. 아직 할 일 많다. 조심해서 잘 댕기야 된다. 다치지 말고"
마누라 잔소리는 귀 닫고 무시하며 살았는데
딸 말은 귀 쏙 들어온다.
계곡을 건너 자빠진골 초입으로 들어간다.
별 감흥 없는 이 골을 오르는 이유는 남부능선에 붙기 위해서다.
표지기 하나 없는 초입이지만 오룩스맵으로 단번에 찾아갈 수 있다.
극심한 가뭄에 개울물이 졸졸 흐른다.
자빠진골은 산청의 거림과 하동 의신을 오고 간 소통의 길이였을 것이다.
지금이야 산꾼들도 잘 찾지 않아 길이 묵었지만 길이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했으리라.
너들길이 펼쳐진다.
나뭇잎에 모인 빗방울이 떨어진다.
혼자 걷는 길 발목이라도 삐끗하면 낭패다.
천천히 조심조심 걷는다.
지금까지 산을 다니면서 한발 한발 이렇게 신경을 쓰며 조심하기는 처음이다.
딸아이 말이 자꾸 떠올라서다.
내 인자 열여덟 살이다.....
표지기 없는 계곡에서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다.
사랑합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한벗샘에 닿았다.
식수로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잠시 멈춘 사이 모기가 떼로 몰려든다.
얼른 걸음을 옮긴다.
산죽을 헤치고 나간다.
물기 머금은 산죽이 제법 더 세다.
칙칙한 산죽을 헤치며 나가는 동안
이름 모를 이상한 벌레가 온몸으로 새까맣게 옮겨붙는다.
산죽을 통과할 때마다 느끼지만 늘 섬쩍지근한 느낌이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
목책으로 막아놓은 구조목 14-10 앞으로 남부능선에 닿는다.
배낭을 내리고 옷을 털고 한숨 돌린다.
고도1,195m이다.
지금부터 오르락내리락 능선을 걷게 된다.
세석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남부능선은 지리산 주능선 영신봉에서 남으로 길게 맥을 이어
삼신봉을 거처며 하동 형제봉을 지나 섬진강에 닿는다.
장대하고 먼 능선의 행로를 다 따라갈 수 없어 일부만을 걷는다.
오래전 가을에 이 길을 걸었다.
겨울에도 걸었다.
능선의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과 겨울의 광경들이 한 번씩
느닷없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된 아름다운 풍광의 기억 때문일까.
이 길은 꼭 혼자 걸어야 제대로 일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6월 24일
3일 전 풀내음 형님의 흔적이다.
산에서 만나는 표지기는 참 반갑다.
아무 생각 없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 것 같은 몰입의 순간.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한사람이 웃으며 걸어온다.
산행중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다.
배낭이 없다. 등산화도, 등산복도 아닌 산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다.
인사를 건넨 그가 먼저 물어온다.
한벗샘이 어디쯤이고, 물이 있는지.
나는 대답을 하며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 사람 뭐지? 기도하는 사람인가? 혹시 무슨 죄를 짓고 도망 중인가?
머릿속이 복잡하면 말이 엉뚱하게 튀어나올 수 있다.
복잡해지기 전에 내가 물어보았다.
이런 산중에 배낭도 없이, 그런 복장으로 한벗샘에는 왜 가느냐고
사연이 있단다.
사연이 당연히 있겠지, 있으니 가겠지.
더 물어볼 수는 없고 길은 자세히 가르쳐 준다.
구조목 14-10을 찾아 한벗샘 들어가는 아주 상세한 안내를 해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그 사람은 그의 길을 갔다.
혼자서 소설 같은 상상을 하다 피식 웃고 만다.
개십세!
한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의 실수담이다.
생방송을 마칠 시간이 되어 가자 여자 아나운서는
오늘 마지막 인사말을
"안녕히 계십시오 와 안녕히 계세요" 중에 어느 것을 할까 계속 생각을 했단다.
계십시오, 계세요. 계십시오, 계세요.
어느듯 방송이 끝나고 마무리 맨트를 할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머리속에서 계십시오 와 계세요는 아직도 선택을 못하고 있었단다.
아 뭘로 하지?
계십시오,할까. 계세요,할까. 계십시오, 계세요.
그러다가 마지막 종료 싸인이 들어오자
그만 튀어나온 말이
"여러분 안녕히 개십세!"
우이씨~ 답지다!
석문 도착 전 1,318봉 아래 조망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흐린 날씨지만 가끔 하늘이 열리고 햇볕이 보이기도 한다
저 바위 위에 올라가면 조망도 좋고 누워도 될 만큼 평평하니 좋아 보인다.
저 자리가 딱 마음에 든다.
그래 저기서 놀다 가자.
아무 생각 없이 바위에 손을 짚고 머리부터 쑥 올라간다.
순간 눈앞에 기다란 것이, 뭐가 이상한 것이 얼굴 가까이 확 들어온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두 마리다.
혀를 날름거리며 눈이 마주친다.
머릿속에서 답지님이 퍼뜩 떠오른다.
머리를 반사적으로 급히 숙이며 말이 먼저 튀어나온다.
"우이씨~ 답지다!"
뱀에 물린 답지님.
뱀,답지님,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뱀을 보고 답지라고 혼잣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지들이 더 많이 놀라서 난리가 났다.
놀래서 그런 것인지 연애질을 들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도망을 가주니 고맙다.
고것들이 연애질하던 자리는 끝내 내 자리가 된다.
이 세상 가장 맛있는 밥은 배고플 때 먹는 밥이고
가장 맛있는 술은 공짜 술이다.
혼자 먹는 밥인데도 맛있다.
당연히 배가 고파서다.
밥 먹고 커피도 마시고 한참 혼자 잘 논다.
능선을 타고 넘는 운무는 몇 번이고 장관을 연출한다.
앉아서 바라만 보아도 좋다.
한숨 자고도 싶었지만 아까 고것들이 다시 올까 싶어 눕지는 못하겠다.
산은 산으로 이어지는 것
인생도 삶은 삶으로 다시 이어지는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다.
정상에만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산들이 이어지는 능선을 한 걸음 한걸음 걸어 넘는 것
내가 사는 인생이다.
그래 쉽게 쉽게 생각하자.
이 인생의 산맥을 지금처럼 이렇게 넘는 것이다.
정상에 우뚝 서지 못하면 어떤가
지나온 저 능선처럼 잘 걸어 왔으면 되었지 않은가.
석문이다.
청학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했었던가.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청학이 날고,
복숭아꽃 만발한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이 펼쳐진다면
나는 다시 돌아 나올 수 있을까?
의신 삼거리다.
의신 6.9km 세석까지 2.2km.
좌측의 전망 바위를 몇 번 지나쳐 간다.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미끄럽기도 하거니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운무 속이라 의미가 없다.
이왕 걷는 걸음이다. 영신대에 들여야겠다.
삶의 흔적이다.
유토피아를 찾아들어 왔든, 세상의 난세를 피해 들어 왔든, 그 어떤 이유로든
지리산 속 삶은 어연번듯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살다간 고단함의 흔적이다.
수천수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지리산.
나는 외따롭게 왜 혼자 이곳을 걷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걷고 있는가.
힘들고 고단한 산행이 안겨다 주는 이 행복감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지리산에서 결국 나로 돌아가고 있다.
음양수샘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킨다.
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아까 한벗샘을 물었든 사람이 되돌아왔다.
배낭을 풀고 쉬면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몸이 너무 안 좋아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팠단다.
병원을 아무리 다녀도 소용이 없었고 산에 들어오니 살 것 같아서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고 있단다.
최근까지 소백산에 있다가 지리산으로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음양수샘 근처에
텐트를 치고 있는데 단속 때문에 자리를 옮기려고 물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내 경계심이 풀리자 그는 나를 님이라 호칭한다.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민이 역력하더니 님이라는 호칭에 그 스스로도 흡족해하는 듯 보였다.
영신대에 간다고 했더니 같이 가도 되겠냐고 한다.
지리산이 내 것도 아닌데 그러라고 했다.
모든 삶은 모든 사연이고, 모든 이유이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창불대에 섰다.
운무로 겨우 눈앞에 광경만 보인다.
이런 산길이 있다는 것에 동행하게 된 그가 놀라워했다.
아래 큰세개골은 피어 오르는 운무에 아득하다.
세석평전 위 촛대봉이 구름에 가려진다.
계절이 돌고 돌아 꽃피는 봄이 다시 돌아오면 꼭 다시 여기에 서 볼 것이다.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세석철쭉의 핏빛 전설을 들어줄 사람과 함께.
영신대에 도착한다.
절벽으로 내려서는 내 모습이 위태했던 모양이다.
자유롭지 못한 발목 때문에 극히 조심하느라 엉거주춤하자
뒤에서 보고 있든 그가 배낭을 받아 주겠단다.
배낭을 벗고 내려서고, 다시 받아 메고 영신대로 들어간다.
호기심에 그가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동안
마음속 간절함을 담아 삼배를 드린다.
세속적인 욕심은 원하지 않았다.
그저 엉겅퀴 형님이 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영신대 좌측으로 난 길로 나온다.
나무계단이 있는 곳으로 나오다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돌아가라는 방송에 깜짝 놀란다.
나무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간에 쉬기 위해 앉았을 때 그는 먼저 가겠다며 그의 길로 갔다.
인연이 닿으면 지리산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고
님의 발목이 완쾌되길 빌겠다며 그가 두 손 합장 후 앞서갔다.
같은 마음으로 그의 병이 완쾌되길 빌었다.
영신봉에 올라서니 대피소에서 확인 전화가 온다.
도착하면 자리부터 배정받으라는 말도 남긴다.
선을 넘어 영신봉으로 올라 가볼까 하다가 그만둔다.
대피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푹 잠들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잠도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배낭을 꾸리고 대피소를 나와 촛대봉으로 오른다.
랜턴 없이도 길이 다 보인다.
완강했든 산속 어둠은 아침 앞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겉옷을 입어야 할 만큼 아침 공기가 차갑다.
새벽 4시 50분 반야봉이 구름에 포위당한다.
주능선으로 붉은 기운이 감돈다
일출이 시작될 모양이다.
어제는 흐리고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맑은 날이다.
어제 걸었든 남부능선은 운무 속에서 평온하다.
저곳을 걸었든 내 길은 저곳에 없다.
길은 그 위를 걸음으로 걷는 동안만의 것이다.
과거의 무거움을 끌고 와 현재의 고통을 밀어내지 못하고
현재의 고민으로 미래의 불안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그대로 두고
나는 지금에 치열하게 집중해야겠다.
아직 해가 떠오르려면 시간이 남았다.
촛대봉 아래로 내려선다.
해가 뜬다.
아침이 온다.
세상을 처음 본 것 같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상의 아침은 이렇게 황홀하게 오는 것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이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었다.
새삼 살아 있음에 감사한다.
청학연못에 도착했다.
청학이 날아다니지는 않았다.
이상향은 어쩌면 찾지 못함으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찾을 수 없으므로, 도저히 실존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는지 모른다.
한겨울 눈 덮인 연못 중간에서의 추억과
가을 단풍 물들었던 연못이 생각났다.
앞으로 또 몇 번을 더 올 수 있으려나.
청학연못에서 정규등로로 내려간다.
사면을 비스듬히 타고 나가는 길이 어지러운 여러 갈래길 중에
제일 좋아 걸음을 그리로 옮긴다.
거림골 정규등로를 타고 내려가다 조망터에서 남부능선을 다시 조망한다.
남부능선이 어제와는 다르게 맑은 날씨 속에 또렷하다.
북해도교를 지날 때마다 이 이름의 근원이 궁금하다.
1,008m
아주 느린 걸음으로 거림까지 내려왔다.
아직 할 일 많이 남았다고 다치지 말고 돌아오라는 딸의 당부 때문에
더욱 조심해서 걸었다.
며칠 전부터 노트북이 버벅거리더니 이상이 생겼다.
잡다한 것들이 계속 쌓이고 쌓이다 보니 원하지 않았는데
이상한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더니 결국에는 멈춰 버리고 말았다.
포맷했다.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이제 팽팽 잘 돌아간다.
무엇이든 오래 쌓이다 보면 탈이 난다.
삶 속에서 감염된 부정적 바이러스의 해독제는 철저하게 외톨이가 되어
홀로 헤매는 산행만 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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