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16.05.01 진도사골-문수대

지리99 수야 2016. 5. 3. 20:23

문수대

 

독오당 76차 정기산행

일시: 2016년 5월 1일 (일요일)

산행자: 다우님, 엉겅퀴님, 에스테야님, 귀소본능님, 수야 (5명)

걸어간 길:구례군 토지면 문수리 신율마을-문수골-진도사골-문수대-왕시루봉능선-

             왕실봉-질매재-질매재골-문수골-신율마을 원점회귀

산행시간: 9시간 7분 (잦은휴식, 긴 점심시간, 오수 포함) 약1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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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었다.]

 

잔혹하리 만치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들이었다.

그러나 먹고 자고 숨 쉬는 한

다음날은 또 오게 되어 있었다.

내 삶과는 무관하게 봄은 와 있었다.

이 봄에도 꽃은 피었다.

시간은 아무것도 치유하지 않았다.

그저 지나갈 뿐이었다.

충격으로부터 시간상 멀어지면서 조금은 나아진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나아졌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것이 망각이든, 적응이든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모든 상처는 스스로 치유해야 치유가 되는 것이었다.

 

5월이다.

파릇한 지리산으로 갔다.

이 봄에도 꽃은 피어 있었다.

나는 여태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야 보였다.

이 봄 꽃이 피었구나!

나는 이제 나를 치유해야겠다.

 

"아, 좋다!"

"음, 지리산이다!"

 

 

 

각자 개인 사정으로 오랜만에 산행했다.

이 길은 느긋하게 하자며 대장님이 잡은 코스였다.

독오당 정기 산행코스로 두 번을 패스했었던 길이었다.

너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다 늦은 출발을 했다.

신율마을에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 미리 등산화를 신고 주차와 동시에 빠른 걸음을 옮겼다.

 

문수골

여순병란의 패잔병들이 백운산을 거처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빨치산의 역사가 시작이 된 그 문수골이다.

1948년 10월 23일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에 오르면서

1955년 5월까지 칠 년이라는 기나긴 빨치산 투쟁의 막이 오른 것이다.

당시 남부군 사령관 이 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포위망을 뚫고 섬진강을 건너 이곳 문수골로 들어왔다.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약 이천여 명의 빨치산이 문수골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최근 잦은 비로 인해 물소리가 우렁찼다.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이 그리 험하지 않아 산행 초반의 풀리지 않은 몸이

적응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참 좋았다.

살아 있다는 느낌은 몸으로 실감 할 때 가장 강렬하다.

그 강렬한 실감은 치열하거나, 감동하거나 간에

지리산행만 한 것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진도사골로 진입하기 전 대장님이 잠시 보고 가자며

내려선 바위에는 각자가 새겨져 있었다.

각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리다방에 도솔산인님께서 올리신 글을 참고하면 되겠다.

http://www.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11&wr_id=95840&sca=&sfl=wr_name%2C1&stx=%EB%8F%84%EC%86%94%EC%82%B0%EC%9D%B8&sop=and

 

 

귀소본능이 사진을 찍었다.

저렇게 찍은 사진을 내가 쨉여다 쓴다.

제주가 참 많은 사람이다.

사진도 참 잘 찍는다.

무엇보다 그의 인간성은 나를 감동하게 할 때가 많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능력 없는 사람에게 묻고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적게 아는 사람에게 물으며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행동하고

가득 차 있으면서도

텅 빈 듯하며

나를 속일 지라도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으니

예전에 나의 벗이 일찍이 이렇게 실천했다.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 - <논어 · 태백 泰伯> 

 

대장님은 뒤따라 건너는 사람이 안중에 없었다.

진도사 바위가 이쯤이라며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했었다.

뒤에 놈(?)이야 물에 빠지든 말든.

 

무사히 건너간 에스테야 형님도 뒤따라 건너는 사람이 안중에도 없었다.

인정머리 없는 형님들 뒤로 본능은 무거운 몸을 날렸다.

혹시나 빠지는 찰나를 잡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보다

그래도 인정머리 없는 형들이 좀 나은 것 같기는 하였다.

 

지리의 속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거슬러

지리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잡념도 멀어졌다.

 

꽃은 가리지 않고 피어야 할 곳에 피어났다.

계곡 물소리를 안고 피어난 꽃을 가만 보았다.

피로 물들고 피가 흐른 계곡의 피곤함과 고단함을 들어내지 않는 산은

오로지 안으로 눌러 삼킨 분홍빛 꽃을 피워냈다.

그 꽃 안에는 치명적인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꽃피어 봄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라는 시를 쓰고 21세의 나이에 속세로 내려와 시를 쓰는 사내의

첩이 되었던 7세기 신라의 젊은 여승 설요.

꽃피는 봄의 설레임이 이러했을까.

20대의 젊음이 아님에도

나는 위험 하도록 흔들리고 있었다.

혼자였다면 그곳에 주저앉아 그날 하루를

온전히 다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도사골로 진입하기 전 계곡으로 내려 진도사 바위를 찾아갔다.

배낭을 벗어 두고 계곡을 따라 다시 내려오며 수색을 했었다.

대장님의 기억은 가물가물했었다.

결국, 못 찾고 다시 올라갔다.

진도사 바위는 이보다 한참이나 위에 있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위로 하기 위한 위패인지

기도를 하려는 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마음을 안정시키고 위로받거나 위로 하기 위함 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삶과 죽음...

 

계곡은 제법 계곡다웠다

서로를 찍어가며

진도사골을 파고들어 갔다.

 

 

수행정진 공부 중에 공부는 많이 남았는데 해가 넘어가자

넘어가는 해를 잡아 묶어 놓고 공부를 했다는 진도사가

해를 잡아 묶었던 바위의 구멍이라고 했다.

진도사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뻥깔의 스케일로 볼 때

그의 도력이 상당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진도사 바위에서 처음으로 쉬었다.

엉겅퀴 형님이 삼배를 올리고 난 뒤

착착 달라붙는 맛있는 막걸리를 도다리 생선회와 먹었다.

엉겅퀴 형님은 이후 선두에 섰다.

다우 형님은 이후 후미로 쳐졌다.

긴 해외트레킹의 후유증은 심각했었다.

 

대장님을 기다리며 몇 번을 쉬었다.

몸무게도 심각하게 줄고 체력도 많이 고갈된 대장님은

그러나 그렇게 힘들어 보이진 않았었다.

자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조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문수대 문수암 입구에 올라섰다.

돌담으로 둘러쳐 진 입구를 조심히 열고 들어갔었다.

사진으로만 보든 단아한 그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각자의 할 일을 한동안 했었다.

트랙을 확인하고 포인트를 찍고, 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둘러보고...

술 급한 엉겅퀴 형님과 먼저 몇 잔을 주고받았다.

적당한 시간, 적절한 위치에 점심상을 펼쳤다.

엉겅퀴 형님이 뭐라고 축원인지 기도인지를 했었다.

아마 이곳에 와서 이렇게 즐길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는

그런 말이었던 거 같았다.

떠날 때도 잘 놀다 간다며 감사하다고 합장을 했었다. <사진:귀소본능꺼>

 

하나도 남김없이 술을 다 비운 엉겅퀴 형님이 잠이 들었다.

눕자마자 깊이 잠이 들었다.

도사급은 다 저렇다고 에스테야 형님이 그랬다.

엉겅퀴 형님이 도사 비스무리 하다고 했고

맞는 말이라고 우리는 공감했었다.

 

작은 꽃을 흔들리지 않고 찍는 걸 보면 술은 적당히 마신 것이었다.

알딸딸한 취기로 바라보는 모든 것은 아름다웠었다.

 

 

주능선을 따라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주었지만,

각자가 바라보는 곳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니 술이 되었거나 헛갈린 것이었다.

어쨌거나 지리산 주능선이다.

 

깨우자마자 순식간에 맨정신으로 돌아온 엉겅퀴 형님이 앞서서 길을 찾아갔다.

도인은 짧은 단잠에도 술이 순식간에 깼다.

앞서 나간 뒤 걸음도 엄청 날랬다. <사진:귀소본능꺼>

 

 

내려가는 길은 더러웠다. (험했었다)

길고 지루한 돌길이 계속되었다.

또렷한 길도 없이 너덜 위에 펼쳐진 길을 찾아 내려갔다.

 

첫 알탕을 했었다.

엉겅퀴 형님이 하도 시원하게 벗고 물속을 다니기에 뭐 할 만한 줄 알았다.

멋모르고 따라 들어간 우리는 죽는 줄 알았다.

역시 도인 비슷므리했다.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의 질량에 비례한다.

내가 가는 길은 어쩌면 갈만한 길이라서 가는 게 아니다.

가야 할 길이라서 가는 것이다.

아파 본 사람은 안다.

길을 잃어 본 사람은 안다.

나는 나를 이제 치유하고 싶었다.

이쪽 길만 가려니 건너편 저쪽 길이 아깝다 하여

두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한 길을 포기해야 다른 한길이 또렷해지는 법이다.

제거되지 못한 여러 개를 버리니 가벼워졌다.

한계로 치닫는 발목이지만

가학적 육체의 고통에서 다시 희망이 생겼다.

 

 

질매재

소의 잔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긴 길마의 모습과 같다고 하여 질매재로 불린다.

질매재를 뒤돌아보며 내려오는 길

대장님은 마을에 들어가 진도사 바위를 다시 확인하였다.

나는 앞으로 한동안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할 산을 시리도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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