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진암-금강대-백장암
일시:2015년 12월 1일 (화요일)
산행자:금농 강호원님, 수야 (2명)
걸어간 길: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
서진암-금강대-서룡산-수청산 백장봉-백장암-백장공원- 60번 지방도로-매동마을.
산행시간:8시 45분~15시 55분 (7시간 10분) 12km.
차에서 내리자 쌀쌀한 날씨에 손끝이 제법 시리었다.
차 트렁크를 열어 놓고 산행을 준비하면서 오룩스 GPS를 잡기 위해 차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깜빡 잊어버리고 트렁크를 닫는 바람에 그만 스마트폰이 압사를 해버렸다.
숨이 끊긴 스마트폰은 그동안 지리산에서 온갖 고생을 함께했는데
본의 아닌 실수로 명을 다 한 스마트폰의 널브러진 꼴을 보니 아침부터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을...
지리산 둘레길 3구간에 있는 매동마을에서 서진암을 향했다.
삼정산이 희뿌연 하게 흐리고 하늘엔 낮달이 걸려있었다.
짙은 안갯속의 산 아래는 고요와 적막으로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2015년 마지막 달의 첫날 안개 자욱한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포장길이 끝나면서 이윽고 둘레길의 좌측에 서진암으로 향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지난번 둘레길을 걸었을 때 이곳에서 쉬어 가기도 했던 곳이었다.
기왓장으로 안내한 것을 보면서 기억이 새롭게 났다.
산으로 접어들자 오래된 연등이 나무에 걸려 있었다.
개울 같은 작은 계곡을 건넜고 완만한 경사의 길은 비교적 쉽고 확실히 드러나 있었다.
매동마을에서 채 50분 걸리지 않고 서진암에 닿았다.
서진암.
서진암은 원래 세암 또는 세진암이라 하였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822년(순조 22)에 불탄 후, 1827년에 성윤두타와 대영비구가 다시 세웠다.
1917년에 운담기순이 기금을 모아 중건하였다.
1927년에는 세진암을 서진암으로 명칭 변경을 신청해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았으며,
193년 화재로 탄 것을 1935년에 중수하였다.
현재 서진암에는 독특한 손 모양을 한 불상과 1516년(중종 11)에 만든 석조 나한상 외 4구의 나한상이 있다.
서진암 석조나한상
나한은 깨달음을 얻은 조사를 일컫는 것으로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으로 조성되었다.
현존하는 유명한 오백나한으로는 경북 영천 거조암의 고려시대 오백나한을 들 수 있다.
실상사 서진암에는 현재 석조 나한좌상이 5구가 있는데,
그중 1구의 바닥에 "정덕십일년병자화주경희"라는 글자가 둥글게 새겨져 있다.
1516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시대 전반기
석조상의 면모를 반영하는 중요한 작품으로 주목된다.
나머지 4구의 상들도 각 부의 양식과 조성기법이 명문에 있는 상과 흡사하여
1516년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5구의 나한상은 모두 머리에 형태가 약간씩 다른 두건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약간 살이 쪘지만, 나한상으로서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다.
그러나 움츠린 어깨와 형식화된 손 모양, 양어깨를 모두 덮은 의복의 옷 주름 등의 표현은
조선 전반기 조각양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산용호님의 산행기에서 퍼옴)
하산 후 매동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서진암을 물어보았을 때
매동마을 주민들은<세암,세진암>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석조 나한좌상을 보지 못하고 왔다.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못 본 것이 정확하다.
아는 만큼 볼 수 있다 했는데, 뒤늦게 안 것이다.
축대가 무너져 보수 중인 서진암으로 조용히 들어섰다.
칠성각과 석간수를 모아 둔 우물.
정인(正仁) 스님.
지난번 산용호님 일행의 방문을 금농 선생님이 말씀하시니, 스님도 그때 여기로 오신 것이라고 했다.
방안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방안에 웃풍을 막기 위해 텐트를 치고 있었다.
찾아오는 신도도 없고 수입도 없는데 생활은 어떻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아는 스님들께 손 벌리고 사신다며 웃으셨다.
원두커피를 갈아서 내리는 동안 어쭙잖은 이런저런 질문에 연신 온화한 미소로 답해주셨다.
사람을 편하게 하는 미소는 평온한 기운이 가득했다.
다시 이곳 서진암에 오게 될 것 같은 아니, 와야겠다는 끌림이 강하게 일었다.
혹시라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신지,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오고 싶을 때 그냥 오라 했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는 양해에 얼굴은 나오지 않게 해 달라 하셨다.
가벼운 농담도 곁들인 스님의 커피를 한 잔 더 청해 마셨다.
방문을 열고 은은한 커피 향 속에서 바라다보이는 반야봉을 오래 보고 싶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과 그 사람의 마음이 얼굴에 어느 정도 나타나는 법이다.
서진암을 돌아서 나오며 금농 선생님과 나눈 정인스님에 대한 첫인상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나의 얼굴에 나타나는 인상에 대해 반성했다.
잘은 안 되지만 좀 부드럽게 살아야겠다고 잠깐이지만 생각했다.
서진암에서 서룡산 남능을 넘어 백장암 방향으로 내려갔다.
기왓장 이정표에는 금강대로 가는 길은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백장암 방향으로 내려서며 계곡을 건너고 우측으로 올라야 하는데
잠깐 길을 놓치고 다시 돌아왔다.
키 작은 산죽을 통과하며 계곡을 우측에 두고 오름은 금강암까지 계속되었다.
금강대 해우소가 먼저 보였다.
금강대에 들어가기 전 샘에 먼저 닿았다.
샘에서 좌측 해우소 방향으로 들어가자 금강대가 나타났다.
지리산 금강암
청화스님의 수행처로 상좌 성본 스님이 한때 수행했던 토굴이라 한다.
지리산 금강암은 삼봉산 능선 상에 위치한 전북 남원 산내면의 지리산 변방 서룡산 1,000m 능선에 자리했다.
금강암는 청화스님이 혼자서 용맹정진하던 토굴수행처였다고 한다.
현재는 수행자가 없어 암자가 거의 폐사된 상태로 있었다.
내려앉기 직전의 토굴 방안에는 아직도 가재도구와 옷가지가 남아 있으며
장독에는 언제 담았는지 모르는 된장이 그대로 있었다.
지리산 서부 능선(삼정산-노고단-바래봉-덕두산)과 주능선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산에서 몇 안 되는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을 정인스님과 백장암의 처사는 금강대라고 했다.
그리고 청화스님의 수행과 일대기를 그린 TV프로에서도 금강대라 했다.
금강대와 금강암을 혼용하여 사용하였으나 금강대이든 금강암이든
통일된 명확한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졌다.
염불선 제창한 청화스님
원로의원을 지낸 청화스님(1923~2003)은 청빈한 수행자의 표상이다.
스님은 24세에 출가한 이래 40여 년 간 눕지 않고 좌선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과
오랫동안 묵언(默言) 수행을 한 당대의 선승으로 꼽힌다.
스님은 특히 “음식이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해 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
배를 불리기 위한 게 아니다”며 하루 한 끼만 식사를 하는 원칙을 지켜왔다.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 스님을 은사로 승려 생활을 시작한 그는
대흥사, 사성암, 벽송사, 백장암, 상원암, 칠장사 등 선원과 토굴에서 수행 정진했으며
60세가 넘어서야 대중 설법을 시작했다.
계율을 엄격히 지키며 염불선 수행을 한 스님은
참선을 할 때는 심지어 석 달 열흘 동안 물만 먹고 정진하기도 했다.
스님은 늘 법문을 통해 “참선을 잘하면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미운 사람, 좋은 사람도 없어지며
나날이 좋은 날이고, 때때로 좋은 때이다”라며 참선을 ‘가장 행복한 공부’라고 했다.
그는 또 불교의 어느 종파의 가르침도 버리지 않고, 다양한 교법에 서로 걸림 없이 회통하는
원통불교(圓通佛敎)를 주장했다.
한국전쟁 당시 불타버린 곡성 동리산 태안사를 1985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중창 복원,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재건했다.
1992년 말 미국에 금강선원을, 도봉산에 광륜사를 열었으며
‘정통선의 향훈’‘원통불법의 요체’ 등의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입적에 앞서 다음과 같은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
“이 세상 저 세상/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은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 할 뿐이네."
(此世他世間去來不相關 蒙恩大千界 報恩恨細澗))
민태원(1894~1935)의 수필 청춘예찬은 이렇게 시작한다.
靑春!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心臟(심장)의 鼓動(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汽罐(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생략)
금농 강호원님.
나는 이 분을 청춘이라 생각한다.
생물학적 육체는 청춘에서 거리가 멀지라도,
이분의 삶은 젊은이의 마음보다 뜨겁고 열정적이다.
사람의 몸과 마음은 별개일 수 없다.
그러나 몸도 어느 정도는 마음을 따라간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산으로 향하는 걸음에는 힘이 넘쳐난다.
선생이 사람을 대하고 바라보는 시선은 항상 긍정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삐딱한 나와는 사뭇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잘 어울려 주시고 잘 이해 해주신다.
사람은 얼굴에서 그 사람의 심성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
금농님의 표정은 항상 밝음이다.
깊은 사연 하나쯤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만
그늘지고 어두운 면은 드러내지 않고
편안함으로 사람을 반겨 맞아 주는 심성은 이 분이 쓰는 글과 같다.
술을 먹기 전과 먹고 난 후의 차이가 없는
일관된 행동이 또한 선생이다.
신체의 나이와는 상관없는 청춘의 심장 그대로이다.
알고자 하는 열정이 그러하고, 배우고자 하는 의욕이 그러하다.
같이함으로 배울 것이 많은 지리산 선배들 중에서도 나는 손에 꼽는 분이다.
청춘의 기운이 넘쳐나는 금농님과의 인연을 그래서 나는 반겨 감사히 여긴다.
산속에서 -나희덕-
길을 잃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스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 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 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금강대 조망 바위에서 바라보는 서북능선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손끝으로 짚어 가며 지리산의 봉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린 키 작은 소나무가 유독 멋진 이유는
강인함과 끈질긴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청춘의 푸른 소나무는 바위를 뚫고서 독야청청 당당했다.
금강암 뒤 서룡산 방향으로 능선을 따라치고 올랐다.
점심을 포식한 바람에 오름 짓은 힘이 들었다.
금농 선생님의 매실주 한 병과 소주를 비운 후라 숨은 더욱 차올랐다.
벌떡 일어선 능선은 거의 40도의 경사로 뒷다리가 묵직하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했다.
앞에 선 금농 선생님은 쉬지 않고 한 번에 능선까지 치고 올랐다.
아직 청춘이다.
서룡산능선에 올라섰다.
배낭을 내리고 한숨을 몰아쉬며 쉬었다.
앞의 지리산 주능선은 더욱 넓게 펼쳐졌다.
범바위를 향해 내려갔다.
살방하게 내려가던 능선길 앞에 우뚝 선 바위가 나타났다.
범의 모습이라 범바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디를 보아도 범의 모습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범바위의 우측으로 우회해서 내려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범바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조망도 기가 막히게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북사면의 내리막길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백장암으로 향해 계속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좌우를 살피니
수청산 백장봉이라는 나무로 만든 이정표가 매달려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산소를 지키기 위한 후손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급하지 않아 순조롭게 내려설 수 있는 폭신한 길을 따르다가 백장암 삼거리에 도착했다.
백장암 도착 얼마 전 길옆에 당당히 버티고 선 우뚝한 바위가 있었다.
이 바위가 좌측으로 그대로 굴러간다면 바로 백장암이다.
이름이 있을 법도 하나 이름은 알지 못했다.
능선의 좌측에서 내려다보이는 백장암은 단아했다.
고즈넉한 산사의 오후는 안개가 짙었던 아침의 아득함에서 선명하게
밝음으로 다가와 있었다.
백장암으로 내려섰다.
백장암 우측으로 백장선원이 자리를 하고있었다.
백장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에 속하는 실상사(實相寺)의 부속암자이다.
실상사와 같은 시대인 9세기 초에 창건되었으며,
실상사가 선풍(禪風)을 떨칠 때는 실상산파(實相山派)의 참선 도량으로 이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실상사가 폐허가 되었을 때는 약 200년 동안 실상사 승려들이 이 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의 당우로는 인법당(人法堂)과 칠성각·산신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당우지(堂宇址)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컸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고,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10호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과 보물 제40호인 실상사 백장암석등,
보물 제420호인 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百丈庵靑銅銀入糸香爐)가 있다.
실상사에서 인월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지점에 있는
매동마을에서 산으로 1㎞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백장암에는 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광명전과 선실이 있고, 광명전 위에 문수전이 있다.
광명전은 1910년에 건립되었으며, 선실은 1972년에 지옹 선사가 증축하였다.
백장(百丈)이라는 이름은 ‘평상심이 도이며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 8세기경 활동했던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백장 선사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장 선사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를 먹지 않는다’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의 백장 청규를 만들고 실천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불우조」에 실상사의 부속 사찰로 원수사와 장계사, 그리고
백장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세 사찰이 실상사의 말사였음을 알 수 있다.
침허 조사가 중창할 때 원수사는 폐사되었고,
백장사에 속한 8개 말사와 실상사에 속하였던 9개 말사가 남아 있었다.
즉 침허 조사가 중창한 이후에는 내원, 정각암, 이명전, 남대암, 조계암, 양수암, 보명암, 세전암, 상암,
금당, 백련암, 수성대, 일출암, 봉계암, 양직암, 장계사, 백장암 등이 남아 있었다.
위의 암자 가운데 백장암, 약수암, 서진암(세전암)은 현존하고 있다.
백장암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원래 명칭은 백장사였다고 한다.
1679년(숙종 5)에 화재를 당하자, 대중들은 백장사에서 10년간 두 번이나 화재가 일어났고,
장소도 협소하므로 실상사 옛터에 재건하자고 말하였다.
이에 따라 역시 화재로 소실된 실상사 터에 몇 칸의 작은 건물을 지어 백장암(百丈庵)이라 하였다.
1868년(고종 5) 10월에 세 번째 화재를 당하여 이듬해에 운월 대사가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1901년에 네 번째 화재가 난 뒤 이듬해에 남호 대사가 완봉·환월·월허·영담 등과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보물 제40호인 실상사백장암석등
국보 제10호인 실상사 백장암삼층석탑
대웅전으로 들어가 부처님을 뵙고 나오는 동안 금농 선생님은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카메라로 담았고 처사님과 대화도 나누고 계셨다.
처사님께서 차 한 잔 권하였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백장암을 뒤로했다.
산신각.
백장암에서 내려가는 길을 잠시 의논했다.
금농 선생님이 처음 계획했던 길은 접고 도로를 따르기로 했다.
개인 사유지를 질러 내려갔다.
마지막 민가 전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백장공원으로 떨어질 것이나
무섭게 생긴 개가 짖고 있어 민가로 내려갔다.
민가의 마당을 가로질러 도로로 내려섰다.
국도를 따라 걸었다.
지겨울 줄 알았던 길이 별로 지겹지 않았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사이 매동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안개가 자욱하고 손끝이 시리던 아침의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
돌아갈 준비를 하며 매동마을 뒤로 보이는 서룡산자락의 아슴한 서진암을 바라보았고
걸었던 길을 다시 한 번 눈으로 복기했다.
다시 이 길을 또 오게 될 것을 예감했다.
마음에 평온을 찾고자 한다면 서진암과 금강대를 찾게 되리라.
오랜만의 평일산행이 주는 평온함을 한껏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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