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녀암에 오르다
일시:2014년 5월 18일
산행자:수야
걸어간 길:적조암-노장대 마을터-환희대-유슬이굴-선녀굴-고열암-신열암-독녀암(함양독바위)-상내봉갈림길
-배틀재-공개바위-천상굴-거머리재-환쟁이골 입구-임도-적조암.
5월 8일 어버이날.
고3인 아들놈이 슬며시 곁으로 다가오더니 편지 한 장을 놓고 말없이 나간다.
사춘기반항과 그동안 아빠에게 서운했었든 일들.
그리고,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아들 한번 안아보자!" 했었든 아빠의 모습.
등교길에 등 뒤에서 "아들 사랑한다!"라고 했었든 일들..
주절주절 써놓은 글 중에 이제는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고,
아빠가 술 먹는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아들의 글을 다시 보고 또 보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내 삶이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2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한 가지 일만하며 살았다.
처음 가게 문을 열 때부터 오기 시작한 초등학생 아이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인사를 오고,
얼마지 않아 결혼한다고 인사를 왔다.
더러는 그 아이가 이제 자신의 아이를 안고 찾아오기도 한다.
뒤돌아 보면 때로는 좌절과 방황도 있었고 흔들림도 많았다.
코딱지만 한 점빵에서 식구들 밥 굶기지 않고 살았고
쪼개고 아끼며 그럭저럭 아이들 키우며 걸어온 시간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아.
비록 가진 게 없어서 내일, 다음 달을 걱정하며 살지만 말이다.
날이 훤히 밝은 새벽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이런 생각들을 하며
지리산으로 간다.
혼자서 가는 산길이다. (8시 20분)
텅 빈 적조암 주차장에 주차하고 산속으로 들어가며
내려오기 위해 오르고, 돌아오기 위해 떠나온 이 길.
무사히 다시 이 자리에 오게 해달라고 종교도 없는 내가 지리산에다 빌었다.
2010년 12월 19일.
유키네 민박에서 송년회를 하고 송년 산행으로 올랐든 길.
그전 독오당 정기산행과 합쳐 보니 이번이 세 번째 가는 길이다.
길가에 족두리풀이 땅바닥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예전 산행 때 빨치산 마네킹의 총으로 장난하든 그곳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노장대 마을터를 지나고 한 시간여를 쉬엄쉬엄 올라 환희대와 마주한다. (9시 23분)
올라갔다.
배낭을 내리고 땀을 식히며 앉았다.
솔봉능선이 옆으로 다가와 있었고 멀리 지리산의 자락들이 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든 밀감을 두 개나 먹었다.
다시, 걷는다.
배바위를 지나갔고,
선열암 사거리를 지나고 유슬이굴에 갔다.
유슬이굴. (9시 53분)
잠시 멈추었다 나오며 사면길을 따라 선녀굴을 찾아간다.
선녀굴 (10시 12분)
상내봉 부근 ‘망실공비 3인부대’로 불렸던 정순덕, 이홍이(희), 이은조가
군경의 추격을 피해 1962년까지 숨어 지낸 선녀굴.
이은조는 그해 선녀굴에서, 이홍이는 이듬해 산청에서 각각 사살당하고,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은
같은 날 다리에 총상을 입고 생포 당한다.
여순사건부터 치자면 무려 15년이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 쳐도 10년만이었다.
송대마을에서 3㎞쯤 떨어진 선녀굴에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는 데다
좁은 입구와는 달리 안이 넓은 2중 동굴이어서 굴 내부에서조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
빨치산의 은신처로 적당한 곳이었다.
근방에는 이와 비슷한 동굴이 5개나 더 있다.
총탄의 흔적들이 바위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고도 935m)
선녀굴에서 다시 돌아 나와 사거리에서 독녀암(함양독바위)로 간다
선녀굴 사거리에서 고도를 110 가까이 올리는
오름길이지만 험하지 않았고 뚜렷한 산길이다.
바위를 지탱하며 버틴 세월 동안 속을 비우고도 노각나무는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한 바가지 땀을 쏟고 선 조망터에서 바라본 독바위.
내 오늘, 저 위에 꼭 올라가리라.
고열암 (10시 56분)
<고열암에서 자다[宿古涅庵]> 예전의 그 안내판도 사라지고 없었다.
폐사지의 황량함과 허허로운 쓸쓸함에서 갑자기 벗어나고 싶었다.
발길을 돌려 산길을 빨리 걷는다.
뚜렷한 길을 곧장 따르다 보면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길에서 우측 바로 위 신열암에 들어선다. (11시)
2010년 3월. 독오당산행때 여기서 산나그네 당수님이 해외 여행길에 가져온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양주를 맘 놓고 마시고는 취해서 독바위를 오르지 못했었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함은 그만큼 강렬한 술맛 때문일 것이다.
바로 몇 걸음 앞.
독녀암 위를 바라본다 (11시 6분)
오늘 목적한 두 군데 중 하나인 이곳을 오르고 싶었다.
배낭을 벗었다.
심호흡하고 밧줄에 의지했다.
짧은 다리가 야속했지만 오를만했다.
비좁은 바위틈을 통과하고 중간에 나타난 또 다른 공간에서 앞을 바라보았다.
문득 겨울에 올라갔든 문창대가 생각났다.
그러면서 지나온 좁은 틈을 보며 웃었다.
아마도 에스테야 형님은 배가 낑겨서 통과 못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손과 짧은 두 다리를 여기저기 몇 번 이용하고서 독녀암의 위에 섰다.
눈앞으로 상내봉 능선 길이 놓여 있었다.
왕산과 필봉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멀리 반야의 궁둥이 쪼가리가 약간만 보였다.
주능선의 마루금이 그어진 선을 따라 사방으로 눈이 따라갔다.
셀카 짓거리를 했다.
몇 번을 반복했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뒷모습이 그중 젤 나은듯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지리산의 어디에서든 항상 상봉을 먼저 찾았다.
올라온 길을 더듬었고, 내려갈 길을 확인 했다.
지리산 안 에서 위안이라는 것을 찾으려 했지만, 실상은 자신이 안고 있었다.
밥만 해결되면 뻔질나게 찾아오고 싶었다.
사는 게 조금만 여유로워 지면 머물고 싶었다.
나는 지리산을 사랑한다.
굳이 누군가 왜 지리산이냐 묻는다면
이제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고 조건이 있든가!"
삼봉산이, 금대산이, 법화산이 어디쯤 인가를 가늠한다.
그동안 들락거린 결과다.
혼자서 땡볕에서 놀 만큼 놀았다.
내려간다.
올라 올 때 그 자리에서 다시 셀카 짓을 해보았다.
독녀암 뒤태를 담고 싶었다.
몇 번을 찍었지만, 숲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산행 때 엉겅퀴 형님은 <연달래>라 말해주었다.
아직 다 영글지 않은 미소녀에 빗댄 그 말이 생각났다.
통과한다.
살다 보면 때때로 마주하는 답답하고
인생의 어두운 날들을 이렇게만 통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중간에서 멈추어 서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들이켜 마시기도 했다.
안락하지는 않았다.(11시 42분)
말없이, 아무런 군소리 없이 싸준 도시락을 펼쳤다.
파리떼가 급습을 했지만 나는 나누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정성으로 밥을 했고, 잘 다녀 오라고 했다.
밥숟갈을 들기 전 소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했다.
다정함이라고는 모기 눈물만큼도 없는 나의 무뚝뚝함을 감수하며 살아준 그녀가
갑자기 고마웠다.
그리고 분명 나는 알고 있다.
고맙다. 미안하다. 뭐 그런 말 나는 하지 못한다는 것을....
가야지, 가야지 마음만 두고 있는 많은 곳 중에 오늘 그 한 곳을 향해간다.
오늘 산행의 두 번째 목표 중 하나인 공개바위로 향했다.
배틀재를 지나 고도를 내리는 길은 혼자서 휘적휘적 걷기 좋은 아늑한 산책길이였다.
우측으로 잠시 눈길을 돌리니 공개바위가 보였다.
다섯 개의 바위는 절묘하게 쌓여 있었고
멀리서 보기에 위태한 모습이었다.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한참을 보았다.
셀카는 하지 않았다.
그냥 마음속으로 무엇인가 갑자기 빌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내려가기 위해 쉬었다. (1시 59분)
작은 술병에 남아 있는 술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약간의 술기운이 기분을 좋게 했고
눈을 감고 잠시 머물렀다.
내려오다 뒤돌아 본 독녀암이 젖꼭지처럼도 보였고, 독아지 처럼도 보였다.
허튼 생각에 골몰하다 천상굴을 지나쳐 버렸다.
멈춰 서서 생각했다
다시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젠가 다시 올 날이 또 있겠지 싶었고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산길에서 보아온 산죽의 꽃을 나는 처음 보았다.
거머리재를 지나고 환쟁이골 입구까지 단걸음으로 내려왔다.
임도를 따라 적조암까지 걷기 시작했다
호진 형님이 반선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온다.
오늘 산행을 혼자 하는 줄 모르고 있었고 뱀사골 어디쯤 있는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
만날 장소를 새로 정하고 발걸음을 빨리한다.
길가에는 산딸기가 익어 가고 있었다.
민들레가 이 봄 끝 즘에 있었고
5월의 시간은 홀씨를 날리듯이 흩어져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에서 비켜나 멀리서 스스로를 관망하고 싶었다.
그리하면 조금 더 밝은 생각을 가질 줄 알았다.
그러나
한없이 오랫동안 지리산을 바라보며
머물고 싶다는 충동만을 억누르고 돌아가야 할 곳으로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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