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기재-실상사
남북종주 9차
행동팀141-지리112차
일시:2021년 12월 26일
산행자:연하,권영구,황순진,김은의,최옥희,최정남,성주숙,수야 (8명)
걸어간 길:영원사-빗기재-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
산행시간:08시 55분~14시 45분 (5시간 49분) 8.26km
"거기 서세요!."
"그만 내려오세요!."
21년 12월 12일 산방이 끝나기까지 삼일을 남겨 둔 날이었다.
영원사에서 빗기재까지 단숨에 올랐었다.
숨을 고르고 난 뒤 몇 걸음을 옮기던 순간, 목까지 숨이 차서 달려온 그분들에게 뒷덜미를 낚아채여 빗기재를 도로 내려와야 했다.
영원사 스의 전화 한 통에 빛의 속도로 달려온 그분들은 얼마나 힘들었는지, 되돌아 내려오면서 보니 네 명이 체력 별로 길 중간중간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삼일만 참으면 될 텐데 그 사이를 못 참고 들어 갔느냐"는 말은 숨이 차올라 한 번에 말하여지지 못하고 할딱거렸다.
뭐라고 변명하기 조차 미안했다.
법을 어겼으니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받아야 할 것을 당연히 받았다.
영원사의 고자질쟁이 '스'는 다시 내려올 땐 보이지 않았다.
12월 26일 일주일 만에 다시 영원사를 지나 빗기재를 올랐다.
한 밤 중 불 밝히고 내려왔었든 길, 올라가다 붙들려 다시 내려왔었고, 그래서 다시 또 올라가는 빗기재였다.
남북 종주 마지막 구간을 그래도 해를 넘기지 않고 끝낼 수 있어 감사하다며 빗기재와의 각별해진 인연을 우리는 받아들였다.
붙잡혀 내려오며 "다음 주 또 오겠다."라고 한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영원사의 그 '스'는 이날도 보이지 않았다.
예전부터 미련한 놈 가슴에 맺힌 고드름일수록 잘 안 녹는다는 말이 있다.
가슴에 맺힌 게 많고, 그것을 풀지 못하면 절로 미련한 놈이 되는 것이니 이 미련한 중생이 그 '스'와 다시
마주치게 되면 세상없이 공손하고 예의 바른 말투로 합장하여 "성불 하시라!" 해드리고 싶었는데....
'스'에 '님'자를 붙이지 않아 불편하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지만, 미련한 중생의 옹졸한 마음은 '중'으로 호칭하는 것이 더 불경스러워 '스'라 하였으니
한량없는 부처님의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해량하시기 바란다.
신라시대 영원 대사가 입산하고 현재의 영원사 부근에 토굴을 파고 8년을 참선 수도 하였으나 깨우침을 얻지 못해 수도처를 옮기려고 나섰다.
영원 스님이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다 보니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낚는 시늉을 하고 있지 않는가.
이를 이상히 여긴 영원 스님이 가까이 다가가니 노인이 혼잣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8년을 살며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이다."그리고는 노인이 표연이 사라졌다.
젊은 영원 스님은 노인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돌아가 2년을 더 수도 정진한 끝에 득도하여 영원사를 세웠다고 한다.
30여분 만에 빗기재에 올라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배낭을 내리고 쉬어야 마땅한 곳이지만 쉬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는 불법이었고, 지금은 합법적인 공간이 되었지만 이곳에서 쉬고 싶지 않은 것이 모두의 마음이었든 모양이었다.
미련한 중생들의 어쩔 수 없는 미련함은 빗기재를 한참 벗어날 때까지 일주일 전의 사건을 재조명하고 있었다.
쉼 없이 능선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바람이 산 능선에 막히자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속 같은 안온한 산길이 펼쳐지고
덩달아 마음도 따뜻해지며 걸음이 경쾌해졌다.
삼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일명 칠암자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영구 형님이 칠암자 길은 처음이라 하여 더더욱 이 길을 따라가는 명분이 명확했다.
지리산에서 길의 선택에 놓일 땐 가 보지 않은 길이 언제나 우선순위라는 것이 우리의?(나의) 원칙이다.
상무주암 도착 전 조망터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상무주암
보조국사(지눌)는 상무주암에서 오랫동안 수도하였다고 한다.
보조국사의 제자 진각국사(혜심)는 스승인 보조국사가 수선사 주지 자리를 물려 주려하자 굳이 사양하고 상무주암에서 숨어 살았다.
이 암자의 호식설(호랑이가 잡아먹는)도 다른 이를 만나고 싶지 않아 꾸며 댔던 그에게서 연유하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지리산 365일에서 저자 최화수는 쓰고 있다.
그래서일까 사진 촬영을 금지한다는 문패가 입구에 떡하니 붙어있었다.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으려는 것인지, 진각국사처럼 사람 만나길 꺼려하는 스님이 계시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곳의 법이 그러하므로 그러해야 할 것 같았다.
연하 형님과 영구 형님, 은의님과 넷 만이 발소리조차 조심히 하여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둘러보았다.
사진을 찍지 말라 하였으나 필단 사리탑만 살짝 찍었다.
상무주암 필단 사리 3층 석탑
염송 설화는 고칙 1,225개 조와 역대 조사의 염송을 집대성한 것으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참고가 될 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태평을 기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영원사에서 각운 선사가 염송 설화를 엮고 있을 때 자주 붓이 망가져 곤란을 겪었다.
그때 마침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났다.
선사는 족제비 꼬리를 잘라 붓을 만들어 염송 설화 30권을 마무리 지었다.
이 염송 설화를 마무리 짓자 붓 끝에서 사리가 나왔다.
영원사 스님들은 이 사리를 모셔 놓을 3층 석탑을 세우고 '필단 사리탑'이라 불러오고 있다는 것이다.
산중길
- 진각국사 (혜심스님) -
산길은 끝도 없으나
한없는 맑은 바람 걸음마다 일어나고
천봉 만봉을 두루 밟고 다니네
한 줄기 상수리 나무가 이리저리 얽혀 있네
시내에서 발을 씻고 산을 보면서 눈을 맑히네
부질없는 영욕을 꿈꾸지 않으니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랴
좌대에 앉아 고요한 마음으로 건너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위 <산중길> 선시(禪詩)가 가슴에 어찌 콕 박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문수암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으로 펼쳐졌다.
북사면의 산길은 눈이 얼어 간혹 미끄러웠다.
아이젠을 하기엔 미흡한 눈이었고, 그냥 걷기엔 걸음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성큼성큼 걸어 내린 순진 형님이 새색시처럼 조신하게 내려오는 사람들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발을 짚으라고 유도했다.
30-05 이정목이 있는 언덕으로 올라서자 사방이 확 트인 조망이 나타났다.
넓게 멀리 펼쳐진 조망처가 나타나자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청량감이 밀려들었다.
겨울바람에 꽁꽁 싸맨 여사님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어졌다.
타인의 행동을 이해한다는 건 행동의 의미를 설명해 내는 일이다.
아, 좋다!. 는 나의 말과 말없이 미소 짓는 의미는 같은 것이리라.
마치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누구도 용서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녀들 표 미소가 햇살처럼 빛났다.
문수암도 동안거로 문을 걸었다. 들어갈 수 없었다.
아래에 서서 잠시 천인굴을 바라보고 지나갔다.
문수암에서 아래로 직진으로 있는 길은 견성 마을로 내려가는 견성 골 길이다.
이정표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어 왼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언뜻 보아서는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왼쪽 사면으로 가는 길에 얼음이 두텁게 얼어 미끄러운 한 구간이 있어 조심해야 했다.
문수암에서 쉬지 않고 걸어 한 고개를 올라서며 비틀어 내려서자 삼불사에 닿았다.
문수암에서 채 1km가 되지 않는 거리였다.
독경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는 법당에는 배낭과 등산화를 벗어놓고 들어간 신도들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용히 머물다 내려갔다.
이곳에서도 내려가는 길을 따라 무심코 내려가면 문수암에서 처럼 견성 골로 빠지게 된다.
삼불사 계단을 내려서면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사면으로 난 길을 걸어야 했다.
삼불사가 뒤에 빤히 보이는 곳에 바람도 없고 햇볕이 잘 드는 나무테크가 있었다.
여덟 명이 앉아 점심을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능선이나 언덕으로 틀어 나가면 곧바로 살을 파고드는 찬바람이 벌처럼 쏘아 댓지만 이곳은 아늑하여 느긋하게 점심을 먹었다.
정성재를 거처 강씨 묘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주능선이 더욱 선명하게 눈앞에 다가왔다.
차가운 날씨가 오히려 사물을 더욱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게 하는 맑음을 선사하는 것 같았다.
약수암은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줄을 쳐서 막아 놓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굳이 줄을 넘지 않고 길을 따라 들어갔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산사는 산꾼들의 들고남에 무감각으로 조용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여러 차례 칠암자를 걸어 보았지만 겨울 동안거 기간이라 그런지 절집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이번처럼 단 한 사람의 산꾼도 만나지 않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실상사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한참 돌아다니며 기웃거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으니, 아는 것이 없는 나는 설명이 적혀있는 안내문을 읽는 것이 다였다.
나 만 그런 것이 아니라 8명 모두가 그러한 것 같았다.
5시간 40분 만에 산행은 끝났다.
지리산 남쪽 하동 악양의 섬진강 강변에서 시작하여 북진으로 주능선을 넘고 중북부 능선을 지나온 50km의 남북 종주길도 끝이 났다.
단숨에 남북 종주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더 빠르게, 더 구간을 길게 끊어 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구간구간을 오르내린 길이가 종주길 보다 몇 배는 더 길다.
남북 종주길과 닿아 있는 능선과 계곡을 더 많이 깊이 걸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몫이다.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얻고 배우는 것도 그 길을 걷는 사람의 몫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지리산에 있었다.
나는 지리산에 있었던 순간만큼은 산아래서 당면한 일체의 일들은 잊었다.
산에 내가 있다는 것. 내게 직접적이고 당면한 일은 그것뿐이었다
그것이 나를 평온하게 하였다.
그것이 위로였고, 즐거움이었고, 행복이었다.
지금 지나고 보니 그랬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란다.
사람의 관계도 다름 아니다.
꽃망울 부풀어 피어나는 봄날, 화사한 걸음으로 같이 걸었고, 때론 비를 맞고 벌벌 떨면서 같이 걸었다.
눈도 같이 맞았고 차가운 겨울바람도 같이 맞았다.
바짓가랑이까지 땀이 흘러내리는 폭양의 여름 산길도 같이 걸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부딪히고 멍들고 피나며 같이 했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현재이다.
언젠가 맑은소리팀의 공주님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맑은소리팀은 산꾼을 넘어 전우 같은 존재들이라고, 이제야 그 말이 더 깊이 이해가 된다.
한걸음 한걸음 같이 걸어 나간 산 길에서 고마운 감사한 마음이 두 겹 세 겹 쌓이게 만들어 준 산우들에게
아니, 나의 전우들에게 깊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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