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종주 7차 (칠선봉-벽소령)
행동팀135-지리108차
독오당113차
산행자:행동팀3+에스테야,귀소본능,권영구,이순애,황순진,황순진 누님,김은의,최옥희(12명)
걸어간 길:백무동-큰샛골-칠선봉-덕편봉-바른재-벽소령-작전도로-음정
산행시간:07시 16분~19시 37분(12시간 20분) 23.05km(음정마을-백무동 차량이동 포함)
퀘렌시아(Querencia)
스페인 투우장. 붉은 천을 흔드는 투우사와 극도의 공포로 흥분한 투우가 미친 듯이 돌진하는 장면.
피범벅이 된 채 싸우던 소가 문득 싸움을 멈추고 어딘가로 달려간다.
싸움에 지친 소만 아는 곳이다.
그곳에서 소는 숨을 고르고 기운을 모아 다시 싸울 힘을 회복한다.
그 소만 아는 안심할 수 있고, 안전한 공간을 ‘퀘렌시아’라고 한다.
스페인어로 피난처, 안식처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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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순간 발아래로 세상이 무너져 내려앉은 것 같았다.
뚜껑이 열려있는 맨홀 속으로 헛발을 딛고 쑥 빠져 버린 듯도 했다.
나는 정지된 채로 시간의 바깥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딛고 선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아득하고 암울한 짙은 구름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가겠지, 금방 끝나겠지...
막연한 희망이 때로는 절망보다 더 힘들 때가 있다.
조금만 버티면 다시 순탄해질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의 시간이 그랬다.
왜, 안 좋은 일은 꼭 연속해서 몰려오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 내가 군 입대를 하는 날
아버지가 내게 한 말이 생각났다.
아버지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낮은 목소리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는 총을 맞고도 살아났다.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남들이 하는 일이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껏 살았다."
"내 아들이다 너는. 걱정하지 않는다. 남들이 하는 거 너도 할 수 있다."
산으로 가고 싶어졌다.
내가 다시 힘을 모을 곳, 퀘렌시아(Querencia) 그곳으로 가고 싶어졌다.
2.
독오당과 행동팀이 같이 하기로 했다.
전원이 백신 2차 접종을 마친 상태였다.
총 인원 12명이 백무동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주차장은 적막할 정도로 한산했다.
(모든 사진은 귀소본능이 찍은 것이고, 나는 그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였다.)
차에서 내려 채비를 할 때 부려 놓은 짐 중에 무거운 것은 형들이 말없이 자신들의 배낭에 담아 갔다.
겨우 산행을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숨이 차올랐다.
몸처럼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그동안 얼마나 나태하게 던져 놓고 방치했는지 산길에서 몸은 여실히 그 실태를 확인시켜주었다.
마라톤을 할 때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것이 있었다.
30분 이상 뛰었을 때 밀려오는 행복감. 헤로인이나 모르핀을 투약했을 때 나타나는 의식 상태나 행복감과 비슷하다.
다리와 팔이 가벼워지고 리듬감이 생기며 피로가 사라지면서 새로운 힘이 생긴다.
산에서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어느 정도 걷고 나야 몸이 풀리고 땀이 나면서 걸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 30분 정도 걷고 나자 서서히 안정감이 찾아왔다.
러너스 하이처럼.
등로는 비어서 오로지 일행들의 발소리와 대화만이 침묵의 숲 속을 깨우고 있었다.
큰샛골로 들어가면서 계곡을 건너야 했다.
먼저 건너 간 순진 형이 등산화를 벗고 위태로운 구간에서 한 사람씩 건널 수 있도록 붙잡아 주었다.
형은 늘 그랬다.
큰샛골은 곧은재 능선(한신 능선)과 작은 곧은재 능선(샛골 능선)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끝까지 오르면 주능선 칠선봉에 닿았다.
2012년 10월 3일 에스테야 형과 둘이서 이 계곡을 올랐다.
2021년 10월 3일에 다시 오르게 되었으니 정확하게 9년 만이었다.
나는 몇 군데만 언뜻 생각이 스칠 뿐 기억이 멀어서 계곡이 생소하기만 했다.
상부의 사태 지역에서 조금 버거웠을 뿐, 결코 힘들지 않았다는 느낌만 남아 있는 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에스테야 형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한 때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했다.
계곡의 안쪽으로 들어서고 아침을 먹었다.
귀소본능이 노루궁뎅이를, 순진 형이 표고를 내놓았다.
귀소본능은 특이하게도 냄새로 찾아냈고, 순진형은 눈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귀소본능이 버섯을 발견할 때면 언제나 냄새를 먼저 말하곤 했다.
본능의 후각은 버섯을 찾아내는데 최적화된 듯하였고, 본능이 냄새를 말하면 우리는 주위를 찬찬히 살피곤 했다.
세 군데 라면 속에서 그것들은 골고루 퍼져서 열두명에게 호혜평등사상을 실현했다.
계곡은 만만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았다.
위쪽이 보이지 않으니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어서 계속 오르기가 오히려 쉬웠다.
9년 전의 몸과 지금의 내 몸은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위를 향해 내딛는 걸음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났다.
3.
이 사람들은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쿨한' 그런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니다.
깊이 품었다 하면 잊어먹지도 않고, 천년만년 가는 장난 아닌 뒤끝을 가졌다.
원래가 그렇게 태생적으로 생겨 먹었다.
아무리 형이고 누나라 해도 말을 잘 안 들어 먹는 부류에 속했다.
한마디로 성질머리 더럽다 소리 제법 듣고 살았었다.
그런 내가 이곳의 형들과 누나들 말은 새겨듣고 비교적 잘 받아들였다.(바로 반박하는 자 있겠으나, 그건 순전히 니 생각이고.)
사람의 성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연장은 고쳐 써데,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을까.
타고난 성질은 완강한 향상성을 유지한다.
변하는 쪽은 성질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 획득한 사회적 자아일 것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나를 낮추어도 작아지지 않았고, 별것도 아닌 자존심을 더 이상 내세우고 싶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이 만큼 변해왔다는 것은
산이라서, 지리산이라는 특별함이 그 '어떤 이유'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4.
올라갈수록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햇볕에 반사되어 튕겨 나오는 물빛은 자연이 아니고서는 연출될 수 없는 신비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속으로 동화되고 빨려 드는 인간이 감동의 최대치를 발성으로 내지르는 것이 탄성인가 싶었다.
삶은 설명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었다.
말로서, 글로서 형상화할 수 없는 것들과 마주 할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인가도 싶었다.
이 사면 경사 옆구리를 지나면서 예전에도 가 보았었던 곳이구나 하고 기시감 같은 기억이 잠시 살아났다.
쉬면서 먹었다.
배낭을 내리고 앉아서 쉬기도 했고, 선 채로 잠시 쉬기도 했다.
계곡을 건너가기도 하고, 건너오기도 하면서, 위로만 솟구쳐 오른 길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처럼 멀었다.
삼복더위 개처럼 혀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5.
순진 형 누님이 같이 걸었다.
미리 들은 바에 의하면 누님은 말 그대로 산꾼이라 하였다.
첫 대면에서 듣던 대로 어떤 산도 거뜬히 감당해 낼 각오가 몸에 밴 듯한, 단련된 사람들 특유의 의지가 몸 전체서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백두대간을 비롯 정맥, 기맥 전국의 산하를 섭렵한 산꾼이라고 하기에는 의외로 단아하고 고운 모습이었다.
혼자서 비박을 하고, 혼자서 종주를 하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직 소녀 인 채로 나이를 먹은 사람 같았다.
출중한 외모는 선택받은 집안의 우수한 유전자인 게 분명했다.
에스테야 형과 같은 소띠라고 하셨다.
6.
혀를 빼물고 헉헉 대면서 5시간을 넘기며 오르고 올랐다.
인원이 많으니 당연히 시간은 지체되었다.
감동과 서정의 정서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조그마한 폭포 하나가 나타나도 사진을 오래 찍어댔다.
큰샛골은 크고 작은 폭포들이 즐비하여 걸음의 속도를 자꾸 늦추었다.
합수부를 지나면서 우측 계곡으로 가는 길을 잠시 놓치기도 했다.
원시림의 푸른 이끼와 빛 조차 잘 투과되지 않는 깊은 골짜기의 신비로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위를 바라보는 눈의 초점이 헤실헤실 풀어질 때쯤, 계곡의 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주능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걸음이 빠른 사람과 유독 오름길과 계곡에서 뒤처지는 사람들이 앞과 뒤에서 분주한 걸음으로 한 곳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
햇살이 머리 위에서 강렬하게 내렸다.
땀으로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한 옷에서 쉰네가 마른 먼지처럼 폴폴 피어났다.
7.
금줄로 막아 놓은 통로를 빠져나와 주능선에 발을 올려놓자
10월의 한량없이 시원하고 맑은 지리산 바람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불어주었다.
이곳에 도착 하기까지 한 세월이 걸린 것 만 같이 느껴졌다.
실제 거리가 얼마든 간에 심정적으로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 것 같았다.
먼저 올라 선 나는 아랫도리가 풀려, 한 잔 꺾은 동네 아저씨처럼 갈지자로 걸어 전망바위로 올라갔다.
아직 올라오지 않은 사람들이 올라왔을 때 기진한 꼬락서니를 보여주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위엄을 갖춘 것처럼 꾸미려는 계산에서였다.
올라오자마자 큰길에 주저앉은 자들이 나를 우러러 올려다볼 때
한쪽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겼다가 다시 위로 말려 올렸다.
그런 걸 세간에서는 아마 윙크라고 부를 것이다.
만장하신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로부터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비난과 항의는 안 들리는 척했다.
칠선봉 이곳에서부터 실제 가고자 하는 남북 종주길이 다시 연결되는 구간이었다.
그러니 지금까지 올라온 길은 남북 종주길에서 보면 무효한 것이었다.
힘들었지만 지나온 길은 이제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 다가 올 새길이 선명해지는 까닭이기 때문이었다.
오래 쉬면서 큰샛골에서 쏟아낸 체력을 회복했다.
벽소령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할 땐 이미 늦어버린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간식으로 배를 채우고 난 뒤였다.
8.
시인 고두현은 '발왕산에 가보셨나요'에서 높은 곳에 오르면 누구나 다 잘못을 빌고 싶어진다 하였다.
천왕봉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에 섰을 때 누군가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인지 잘못인지를 빌기도 하였다.
내가 경험하여 아는 분명한 것은, 높은 곳에 서면 덩달아 내 마음의 크기도 넓어진다는 것이었다.
무릇 산꾼이라면, 그것도 명색이 지리산을 다닌다는 산꾼이라면,
항상 더 넓은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나도 두 손을 모으고 빌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에스테야 형은 가마솥 만한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 마음의 그릇이 작아 부럽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무거운 것들이 형에게 이르면 가벼워지는 비밀이 나는 그가 지닌 마음의 큰 그릇에 있다고 생각했다.
간장 종지로는 라면조차 끓이지 못하는 법이니까.
선비샘에서 아주 늦은 점심을 먹었다.
세상에 가장 맛있는 밥은 배고플 때 먹는 밥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하고 명확했다.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먹어야 갈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누구도 반론하지 않았다.
바른재에서는 그동안 걸어온 산길을 더듬어 추억했다.
이미 반야봉 쪽으로 멀리 간 해는 역광으로 더욱 빠르게 멀어져 갔다.
영구 형 부부는 신혼여행을 온 마냥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수 없이 찍어댔다.
반질반질한 자갈돌이 구르는 것 같은 순애의 웃음소리가 세상의 그 어떤 슬픔도 날려버리겠다는
의지처럼 견고하게 들렸다.
그 소리가 하도 청명하여 바른재에서 일직선으로 바라다 보이는 앞당재, 뒷당재까지 흘러갈 것만 같았다.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제 이곳에서 나머지 종주길을 다시 이어야 할 것이었다.
잠시 쉬었다가 곧 일어났다.
시간은 운명처럼 제 할 일을 잊는 법이 없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어찌하여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가야 할 길은 가야만 했다.
9.
작전도로를 따라 삼정으로 가기로 했다.
원래 계획한 소금쟁이 능선을 버리기로 한 것은 이미 박명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이었고,
힘이 빠진 상태로 어두운 산길을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멀었다. 끝도 없이 멀어서 이 길이 원래 이렇게 멀었는지 의심이 들었다.
발바닥은 맨발로 뜨거운 철판 위를 딛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산속의 어둠은 순식간에 갑자기 내려서 난데없는 일 같이 느껴졌다.
12명은 흩어져서 삼삼오오 걸었다.
결코 술 때문만은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아니라고도 할 수 없지만)
나는 꼭 도로나 아스팔트 같은 곳, 남들은 좋은 길이라고 말하는 곳, 산행의 마지막 구간에서 잘 넘어졌다.
그것도 요란하고 야단스런 소리를 동반하며 야무지게 처박혔다.
무릎과 손가락이 쪽팔려도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아팠다.
다행히 이틀 만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말짱해졌지만,
그땐 아프고 쪽팔려서 기절이라도 해 버렸으면 싶었다.
다시 걷고 있을 때, 다 들리는데, 안 들리는 것처럼, 어쩌면 들어라는 듯이
'넘어지는 것도 성격대로 참 야무지고 확실하게 개구리 뻗듯이 어쩜 그렇게 쫙 뻗어버린댜아'
저 말은 뭐란 말인가?
칭찬을 가장한 그것일 터인데 마땅히 화를 낼 수도 없게 만드는 어법.
에스테야 형이었다면 땡벌 쏘듯이 어찌해 보련만 형은 이미 저 멀리 먼저 가버리고 없었다.
미친 척할까, 술 취한 척할까.
그냥 헤헤 실실 웃어버렸다.
내 간장종지만 한 그릇이 들통나지 않게.
랜턴을 켜고도 한참을 걸었다.
차단기를 지나자 저 쪽에서 연하 형님이 손을 흔들었다.
10.
소금쟁이 능선 아래에서 중경팀 팀장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도로 끝에서 성치 않은 몸으로 연하 형님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깨우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듣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 알고 있었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불러내는 것이라 하였다.
나는 깨닫는다.
저것이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소설가 김훈은 남한산성에서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은 없다'라고 했다.
어쩌면 나 보다 더 절박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견딜만하니 숨소리라도 내고 넋두리도 하는 것이다.
남들이 하는 일이면, 남들이 견디는 일이면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걸어온 저 산길처럼, 내 아버지가 걸어 가신 삶의 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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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했다.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내가 '사랑하는'사람들이었다.
다시 살아갈 힘을 모으고, 안정을 찾고 싶은 퀘렌시아를 찾아갈 때,
그 길에 잔소리도 해 대며 같이 걸어가 줄 사람들이었다.
내 언젠가 그리 말하리라.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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