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래골
독오당 102차 정기 산행
일시;2019년 11월 3일 (일요일)
산행자:에스테야, 귀소본능, 수야 (3명)
걸어간 길:청래골 펜션 -청래골- 일출봉능선 -1411봉-여리재날등-백운암능선 갈림 - 천왕사 갈림길-청래골
산행시간:08시 ~14시 36분 (8시간 36분) 9.4km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차를 올렸다.
이 곳을 올라 본 지 벌써 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그동안 간간히 이 길을 이야기했었는데 시간은 생생하고 선명한 기억에 비해
그 속도를 인지 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든 것이다.
셋이서 7년 전의 기억들을 이야기하며 산행을 시작했다.
낮은 곳으로 떠밀려 내려온 단풍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올라가는 길 건너편으로 펜션인지 별장인지 모를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누군가 정성을 많이 들여 길을 정리 해 놓았다.
반듯하고 선명한 산길은 폭신한 낙엽이 깔려 산뜻한 아침 공기와 더불어 기분을 좋게 했다.
지리산 길 지도에 선은암으로 표기된 입구를 지나갔다.
돌탑을 쌓아 놓았고 넓은 길이 입구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들어가 둘러볼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기에 사찰이나 암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쥐 죽은 듯 인기척 하나 없는 그곳은 스산함이 낙엽처럼 날렸다.
붉고 노란 단풍들은 곧 낙엽으로 떨어질 것이다.
빈 가지를 들어내며 자신을 온전히 다 털어 내는 나무들은 비움과 함께 긴 인내의 시간을 예비 하는 듯
엄숙하고 조용하고 단호해 보였다.
바람소리조차 숨죽인 고요한 숲길에는 우리의 발자국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7년 전 5월 독오당 32차 산행, 그날 이 길에는 당수님과 티나님, 귀소본능 형님까지 총 7명이 함께 걸었다.
일출봉을 올라 연하봉 촛대봉 시루봉을 지나 촛대봉 남능으로 내려오는 긴 산행이었다.
에스테야 형님은 그때 일출봉에서 바라본 광경을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가끔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때와 달리 일출봉까지 가지 않을 것이고, 여리재날등을 따라 내려갈 길을 올라가면서 계획하였다.
여리재날등은 처음 가보는 길이기에 코스 선정의 우선순위에 놓았다.
독오당은 100회 차 산행을 앞두고 긴 침묵으로 빠져들었고,
몇 개월에 한 번씩 산행이 끊어 질듯 이어졌었다.
이런저런 사연과 이유와 까닭으로 산행은 한동안 그러했었다.
마음을 다시 다잡고 길을 나섰지만 이번에도 대장은 하안거가 지나고 동안거가 임박하였음에도 불참했다.
지리산 자락으로 터전이 옮겨진 엉겅퀴 형님은 정기산행에 매번 참석할 수 없는 상황을 이미 알고 있으니
우리 셋의 뒷말은 대장에게 집중되었다.
좀 시원해지면 같이 가자고 하셨든 말을 잊지 않고 있음을 대장은 알아야 한다.
시원해지다 못해 이제 쌀쌀해지기까지 했소.
첫 번째 휴식을 하며 배낭 무게를 약간 줄였다
계곡의 물은 맑아 가을 하늘과 같은 빛으로 흘렀다.
청래골은 연하봉에서 산줄기를 내려 일출봉을 지나고 여리재날등과 연하봉 능선(일출봉 능선)으로 분기한 두 능선 사이를 흐른다.
일출봉 능선 넘어 도장골과 거림골에서 흘러내린 계곡과 합류하여 내대천을 이루며 흘러간다.
청래골 초반의 길이 하도 좋아 산보하듯이 가볍게 걸어온 탓에 표정들도 가볍고 밝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독오당이었으니 올해 딱 10년을 함께 왔다.
많은 사연과 이야기들을 만들었고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을 들추어 추억하며 지내기에는
아직도 많이 모자라고 허기진 고픔이 다 채워지지 못한 체 남아 있다.
그러니, 앞으로 더 많은 길을 걸어야 한다.
한 10년은 더 다녀보고 그때 가서 대장도 바꾸자고 우리끼리 작당을 했다.
독하게, 오지게, 당당하게.
길은 걷지 않으면 사라진다
없는 길도 함께 걸으면 길이 된다고 했다.
함께 걸어온 독오당 10년, 즐거움과 행복을 과분하게 많이 누렸다.
단 1의 후회도 없는 세월이었다.
또 앞으로의 10년도 분명 그러하리라 나는 믿고 싶다.
제법 앙탈을 부리며 곧게 세운 경사를 오르는 동안 말라죽은 산죽이 온몸 여기저기를 찔러왔다.
이제 숨소리는 가팔라진 경사만큼 바빴다.
어느 사이 온몸에서 땀이 올라왔다.
일출봉에서 내린 능선이 여리재날등과 일출봉 능선으로 분기하는 지점까지 그렇게 숨차게 올랐다.
청래골 계곡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동안 잠깐 산길이 희미해져 길에서 벗어났지만 바로 찾아들었다.
일출봉으로 가는 갈림길 1411봉으로 갔다.
큰 나무에 붉은 단풍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다.
눈으로 보이는 것을 사진은 다 담아내지 못한다.
마음을 울리는 많은 말들이 글로는 다 표현되지가 않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 만이 전부가 아닌 까닭이고, 눈에 보이는 것 만을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이런 것이다.
전망대에 올라서서 상봉을 바라보았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상봉의 위용은 아니지만 그것에 비해 못지않음에 감사했다.
올라온 청래골 오른쪽으로 일출봉 능선이 뻗어 내려가고 있었다.
가야 할 여리재날등 저 앞에 구곡산이 멀어 보였다.
남쪽으로 뻗어 내린 여러 능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
아래에서 더 앞으로 나오길 요구하는 나와 머뭇거리며 나오지 않으려는 형과의 대치는 형이 승리했다.
이 정도만 해도 엄청난 큰 일을 해내셨다.
점심을 높은 곳에 앉아서 먹었다.
문창대가 바로 맞은편에 놓였다.
절벽을 등 뒤에 두고 앉은 나를 에스테야 형님은 계속 불안해했다.
절대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형은 그럼에도 산행은 높은 곳으로 가자고 하는 기이한 특성이 있다.
점심자리는 눈앞에 펼쳐진 풍광으로 절묘하고 기막힌 명당이었다.
이미 철이 바뀌기 시작하는 산은 아래와 위가 확연히 구분될 만큼 변화가 눈으로도 보였다.
내려가야 할 여리재날등과 황금 능선 그 넘어 달뜨기 능선의 색채는 지난주와 많이 달랐다.
여리재날등은 곡점 능선으로도 불린다.
산줄기가 마지막으로 꼬리를 내리는 곳이 곡점이라 곡점 능선이다.
여리재날등은 날등에 재(고개)가 여러 개 많아 여리재날등이라 했다는 것을 지리구구 탐구방에서 찾아 읽고 알게 되었다.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내려오는 정감 있는 여리재날등의 이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자주 산죽과 마주쳤다.
산죽길을 오랫동안 헤쳤다.
내리막길 산죽은 몇 번의 엉덩방아를 찧게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버티면 버틸수록 길은 완강하게 저항하는 듯 미끄럽게 세워져 있었다.
샤덴 프로이데(Schaden freude)이라는 독일어는 샤덴(고통)과 프로이데(기쁨)의 합성어라 한다.
남의 고통은 나의 기쁨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놀부 심뽀라 할 수 있겠다.
찾아보니 우리말에 비슷한 게 있다.
<잘코사니>라는 말로 미운 사람이 당한 불행한 일이 고소하게 여겨짐이라 한다.
귀소본능의 세 번, 나의 두 번 엉덩방아가 에스테야 형에게는 그렇게 행복감을 주었든 모양이다.
맨 뒤에서 지 혼자 넘어졌는지 어쨋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양반 우리가 넘어지는 횟수와 떨어지는 높이와 충격의 강도까지
자세하고 세세하게 살피며 무척이나 즐거워 하더란 말이지.
돌아보니 걸어온 길 뒤로 촛대봉이 이렇게 보이더라.
몇 군데 비탈을 지나고 거대한 암벽을 비켜 길은 계속 아래로 내려졌다.
넘지 못할까 걱정했든 길도, 잘못 들어 헤매고 온 길도, 가로막혀 우회하기도 하며 걸어온 산길을
뒤돌아보면 지나온 삶과 많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보면 가지고, 올라보면 올라지고, 닥치는 대로 살아보니 살아지더란 말이지.
비를 맞으며 걷는 사람에게는 우산이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함께 우산을 쓰고 갈 사람이 필요하고.
슬픔에 잠겨 술을 마시는 사람에게는 술이 더 필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함께 잔을 부딪치며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귀소본능이 내게 잘 달아주는 댓글에 계영기원 여이동사(戒盈祈願, 與爾同死)라는 말이 있었다.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너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
무엇이든 넘치지 않아야 하며, 오랫동안 함께 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나는 알고 있다.
독오당 10년.
그렇게 걸어온 것처럼, 그렇게 또 이 산 곳곳을 걸어갈 것이다.
멀리 있든 구곡산이 성큼 앞으로 와 있었다.
힘든데도 즐거웠다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산행 후에 했다.
끝남이 없을 것 같았든 산죽길을 헤집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같이 걸어서 든든했다.
같이 걸어서 즐거웠다.
같이 걸어서 뻐근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겠지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산을 오를 수 없는 날.
그때까지 독오당은 또다시 길을 나서자 할 것이다.
독오당 10년, 102회 산행은 계속 걸어야 할 진행형으로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가슴이 설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있다.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너무 좋아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오를 것 같은 일이 있다.
누군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는 시간이 있다.
더 많은 것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미안한 사람들이 있다.
설렘과 황홀, 그리움, 사랑의 느낌....
이런 것들이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든다.
나는 더 즐겁게 일하고, 더 열심히 놀고,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더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미래의 어느 날이나 피안의 세상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
떠나는 것이야 서두를 필요가 없다.
더 일할 수도 더 놀 수도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도 타인과 손잡을 수도 없게 되었을 때,
그때 조금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면 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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