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계곡 (석문골)
행동팀90-지리69차
일시:2019년 10월 20일
산행자:최규다,들풀, 최정남,성주숙,수야
걸어간 길:중산리 자연학습원-중봉골-용추폭포-석문골-황금능선-느진목재-산신제단- 학습원
산행시간:7시 23분~17시 43분 (10시간20분) 7.3km
버스를 타고 자연 학습원으로 갔다.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고 언제나 자연학습원이란 이름으로 불렀든 곳을 오늘 자세히 보니 자연 학습원이 아니라
경상남도 환경교육원이라는 명칭이 정확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서둘러 산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뒤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걸었다.
쌀쌀하지도 덥지도 않은 아침의 산 공기는 상쾌하고 맑았다.
산은 빛을 받아 울긋불긋한 색채로 10월의 가을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불쑥 나왔다.
'좋다!'
이 순간 '좋다'는 말이 참 좋게 느껴졌다.
느긋하게 걷자.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꼭 함께 산에 오고 싶다고 친구는 말했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산행이다.
이른 아침 만남에서부터 우리들의 얼굴엔 이미 환한 미소가 단풍처럼 물들어 있었다.
산행이 힘들어도 좋고, 거리가 짧아도, 험해도, 느긋해도 좋다.
어디든 상관없고, 같이 보내는 지리산에서의 시간이 의미 자체라고 늘 말하든 친구가
이번엔 중봉골을 먼저 말했다.
들어서는 길은 빨라야 했고 조용하고 은밀해야 했다.
우리 뒤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해 동작은 기민 했다.
초입에서 트랙과는 상관없이 계곡으로 내려서며 한차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쏟아져 내리듯 내려 선 계곡은 거친 호흡을 빨아들이고 탄성을 내뱉게 했다.
이게 가을이다.
이게 가을의 색깔이다. 말하는 것 같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으며 땀을 식혔다.
가을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중봉골, 용소골, 마야계곡으로 알려진 계곡.
석가여래 어머니의 이름인 마야, 마야 독녀탕이 있어 마야계곡으로 불린다 했든가.
불교가 억압 받든 이조시대에도 마야계곡으로 불리었다고 하니,
중봉골 보다는 마야계곡이 더 적합한 명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추폭포가 있어 용소골로도 불리지만 최근엔 산꾼들에게 중봉골로 통용되는 것 같다.
오래전 독오당 산행으로 올라 본 곳이긴 하지만 산길의 어느 곳도 눈에 익지 않았다.
기억되는 것이 없이 난생처음 와 본 것처럼 생경하고 생소했다.
계절이 달라서 일까 기억력이 없어서 일까.
계곡을 치고 오르는 길과 계곡을 약간 벗어나 계곡 좌우로 산길이 혼재하였다.
계곡을 멀리 벗어나지 않고 따르면 길은 대체로 선명하고 뚜렷했다.
풍광이 좋아도, 단풍이 고와도, 걸음이 멈춰지는 쉼은 잦았다.
맨 몸으로 자연의 온갖 풍상과 맞서며 살아내는 뿌리를 들어낸 나무의 강건한 의지에
삶의 작은 순간순간에도 여지없이 흔들리는 나는 부끄러워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세월은 도둑맞은 듯이 지나가 버렸지만 그동안
서로를 지켜보며 친구와 나는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왔다.
크게 놀란 일도 있었고, 진심으로 축하도 하고, 기쁜 일을 나누기도 했다.
그는 참 단단하고 강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삶의 큰 고비를 이겨내는 것을 보며 나는 깊이 감동했었다.
그런 친구가 좋았다.
'시간 된다 같이 지리산 가자.' 이 한마디면 그 먼 길도 언제나 이렇게 짧아졌다.
가난해지면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게 쌀이고 벗이라 하더라 만
나야 더 가난해질 것도 없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이니 이 벗이 그딴 이유로 멀어질 걱정은 애초에 없다.
지리산은 내게 참 위대한 산이다.
여러 인연을 맺게 했고 감사와 존경 배려를 가르쳤고, 진짜 사색을 알려 주었다.
계곡의 너른 바위에서 아침을 먹었다.
간단하고 따뜻한 한 끼의 끼니는 물씬하게 행복함을 안겨 주었다.
배부른 포만감은 마음도 몸도 느긋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걷고, 많이 담고, 많이 보고, 많이 감탄하며 고도를 서서히 높이는 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사람 사이 그냥 편해지고 그냥 좋아지는 관계란 없는 것이다
나의 편안함은 누군가가 얼마큼 감수한 불편의 대가이다.
그 불편의 대가를 지불함에 있어 아무 주저함 없이
기꺼이 감수하고 싶은 사람들이 내게는 있다.
가을 하늘은 자꾸 눈길이 끌리게 된다.
산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숲 사이로, 찬란한 빛이 투과되는 나뭇잎 사이로, 좁고 어두운 계곡의 그림자를 벗어나
그리 넓지 않게 살짝 열리는 하늘의 그 창연함을 한 번이라도 바라보게 되면
자꾸 올려다보게 된다.
주변 단풍의 색감 때문인지 이맘때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쾌청함이어도 좋고
뭉실 구름이 파란 하늘을 가려도 한정 없이 시리도록 좋았다.
연출하지 않았다.
이런 장면을 지켜보는 내 옆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서울 사람들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저 친구는 저렇게 다정하다.'라는 말의 끝맺음이 아니라
'다정한데'라는 꼬리를 달고 그 비교 대상인 나에게 여러 말이 쏟아지게 하는 문제적 장면이 된다.
이럴 땐, 이리 말해야 빠르게 국면이 전환되었다.
"됐다!, 빨리 가자아!!~"
마야계곡을 끝까지 올라 중봉에 오르고 써리봉 방향으로 길을 잡아 황금능선을 걷는 계획은 접었다.
3주째 연속 같은 방법인 중간에서 잘라먹기로 길을 재설정했다.
올려다본 먼 곳에서는 주능선 봉우리가 우뚝한 모습으로 유혹하였으나
과감히 눈길을 돌렸다.
고도 1300 부근.
오전 11시 40분, 마야계곡에서 우측으로 열린 석문골 들머리로 올라섰다.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라 말했더니 자기들도 처음이라고, 머리 털나고 처음이라고
깔깔거리고 웃었다.
쫄쫄거리는 물줄기를 따라 계곡은 끝 간 데 없이 위가 보이지 않았다.
능선까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길어야 얼마나 길겠나 올라가 보자.
다리에 힘을 실었다.
석문골에 들어서자 마야계곡의 단풍과는 또 다른 색감이 펼쳐졌다.
아줌마들은 올라가는 걸음을 멈추기 일쑤였다.
그냥 여기서 퍼질러 앉아 하루 종일 묻혀 있어도 좋겠다 했다.
'여기 봐라, 저기 봐라.'
좁은 계곡에는 몇 사람 되지도 않는데 한동안 시끌벅적 소란스러웠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여기 너무 좋다.'
'진짜 좋다.'
여길 오자고 한 규다는 칭찬과 고마움을 줄기차게 받았고,
이 길을 안내한 나는 불가촉천민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뭐 이미 예상한 상황이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이까짓 일 따위로 쫀쫀하게
삐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제법 각을 세운 골은 오르는 맛을 느끼게 했다.
간식을 나눠 먹으며 한차례 쉬었다.
건너편 천왕동릉이 보일 때까지 골을 따라 다시 올랐다.
통신골이 겹쳐 생각났고
광덕사골도 생각이 났다.
거대한 바위는 병풍처럼 골의 좌측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물기 묻은 바위를 조심히 기어올랐다.
직벽으로 거대하게 골을 형성한 바위가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쓰러진 풍도목을 넘고 아슴하게 길 흔적이 희미한 구간을 표지기를 따라 넘어 서자 석문이 보였다.
속도를 붙인 걸음은 순식간에 일행 전부를 석문 앞에 올라서게 했다.
위에서 바라보니 올라온 길은 바깥세상이 되었다.
천왕동릉과 남릉이 가로로 또 다른 바깥세상을 향해 산줄기를 내리고 있었다.
새롭다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다. 기분이나 느낌이 전과는 다르게 더 생생하다는 말이다.
이 문을 지나는 순간 그런 기분이 들기를 바랐다.
온전히 모든 것이 새로워졌으면 좋겠다는 염원도 했다.
석문을 통과하고 한동안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마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석문을 지나며 올려다본 조망바위를 향해 올라갔다.
반듯하든 길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다.
뚜렷하게 길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잡목을 뚫고 먼저 시야가 한순간 확 트이는 곳에 올라섰다.
위에서 이리저리 올라오라고 알려 주었다.
모두 이곳에 같이 섰다.
울음터
1780년 7월 초파일 연암 박지원은 중국 땅 요동 벌판에 들어선다.
드넓은 요동벌을 마주한 연암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말한다.
"좋은 울음터로다 크게 울만 하구나."
옆에 있던 정진사가 물었다.
"이런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갑자기 우는 것을 생각하시는가?"
"분노가 사무쳐도, 즐거움이 넘쳐도, 사랑이 지극해도 울 수가 있다."
그리고 연암은 갓난아기 얘기를 한다.
"아이가 태 속에 있을 때는 캄캄하고 막힌 데서 답답해하다가, 하루아침에 넓은 곳으로 나오니,
마음이 시원스레 환하게 되니 어찌 한바탕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겠소"
연암의 열하일기중 통곡할 만한 자리라는 뜻의 호곡장론(好哭場論)이 생각났다.
이 부분이 생각난 것은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책을 이 부분까지 엊그제 읽었고,
울음에 대한 깊은 분석이 마음에 착착 감기게 서술되어 있었다.
마침 밑줄까지 그어 가며 읽었던 부분이기에 이곳에 서자 바로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랬다.
한순간 어둠에서 밝음으로 나온 듯
비좁고 갑갑한 곳에서 확 트인 광활한 곳으로 쑥 빠져나온 듯
눈 앞에 펼쳐진 이곳은 통곡하고 울만한 좋은 울음터였다.
물론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아무도 울지 않았고
울음 대신 눈물이 날 만큼 크게 웃었다.
아니구나, 눈물이 났으니 즐거움이 넘쳐도 운다고 한 연암의 말씀이 맞았다.
후일담으로 들은 것이지만 들풀님은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잠자리에 들면서도 웃었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었다는 말이다.
점심을 먹었다.
느긋했다.
가을 소풍 같았다.
삶도 언제나 이런 소풍 같았으면 좋겠다.
상봉은 구름이 걸려서 답답했다.
오랫동안 걸린 구름은 벗겨질 듯 말 듯 펄럭였고 구름이 벗겨진 상봉을 우리는 끝내 보지 못했다.
내려가야 할 황금능선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굽이쳐 흘러내려있었다.
장당능선 넘어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도 조망권 안에 놓였다.
시야에 걸리는 그물 없이 저 먼 남해 바다까지 드넓게 들어오는 이 좋은 울음터.
상처 받은 감정을 치유하고 싶고, 속으로 꾹꾹 눌러 가며 살아가는 답답함으로 울음을 참고 있다면
여기 이곳에 올라서시라.
과히 울어 볼 만한 좋은 울음터임으로.
이곳을 떠나며 뒤돌아, 깊어가는 가을 속 써리봉을 기억해 두었다.
나는 그대가 좋아서
모든 것이 그냥 다 좋다고
말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다!"는 말이 그냥 좋아서 좋은 것처럼.
하산길도 오름길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길은 적당히 험했고, 적당히 가팔라 지리산길 답다고 느꼈다.
규다는 앞서 내려가는 두 여사님들의 스틱을 모아 쥐고 로프를 타고 내렸다.
몇 번을 이 같이 반복했다.
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함으로 나는 또다시 천대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황금능선의 산죽길을 헤쳐 걸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말에 속도를 높여 걸어도 금방 따라붙는 아줌마들은 이제
지리 산꾼이 확실했다.
느진목재에서 환경교육원 신선너들 방향으로 길을 꺾어 내려갔다.
5시 마지막 버스시간이 임박했다.
버스를 잡아 놓겠다는 말을 남기고 규다가 급한 걸음으로 내달렸다.
환경교육원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가 트랙을 보고 다시 돌아와야 했다.
먼저 내려간 규다는 교육원에서 전화가 왔다
버스는 6시에도 온단다.
산신제단을 지나 계곡을 건너갔다.
태풍으로 길이 무너진 곳이라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 쉽게 길을 찾아 주등로에 합류했다.
먼저 도착한 규다는 부지런하고 친절하게 마중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엔 119구조 차량이 와 있었고,
심한 다리 골절상을 입고 헬기가 착륙할 수 없어 아침까지 대피소에 기다려야 하는
사고자를 혼자 남겨두고 버스를 탄 사고자 일행들에게 들었다.
사고자 일행이 다섯 명이나 되면서 단 한 사람도 일행은 남지 않았다는 말에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은 제각각 집에 돌아갈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산행을 즐긴 우리는 감사한 마음이 깊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등산화가 발에 맞지 않아 절뚝이며 걷든 부부를 규다가 덕산까지 태워주기로 했다.
삐딱한 부정적인 말을 내뱉을 때 내게 누군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눈으로만 보니 그렇게만 보이 것이다라고.
꼭 맞는 말이기에 뼈를 때리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해맑은 이유는 머릿속에 내일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도 충분하다.
나는 그런 눈으로만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삶이 날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소풍이기를 소망처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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