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일시:2015년 7월 26일 (일요일, 날씨:폭염)
산행자:행동팀 4명.
걸어간 길:순두류-천왕봉-성삼재.
산행시간:04시 20분~21시 50분 (17시간 28분). Oruxmaps거리: 33km.
후원: 호진&옥자님, 최정석님, 강호원님, 에스테야님, 다우님,
상가식구.(물적지원,격려응원, 차량 지원등)
- 시간대별 통과지점.-
04시 20분 :자연학습원
05시 42분 :로터리대피소
06시 18분 :사자암
06시 35분 :개천문
07시 13분 :천왕봉
07시 57분 :제석봉
08시 28분 :장터목
08시 40분 :일출봉
08시 47분 :연하봉
09시 36분 :촛대봉
10시 10분 :영신봉
10시 59분 :칠선봉
11시 42분 :선비샘
12시 35분 :벽소령
13시 54분 :형제봉
14시 45분 :삼각고지
15시 00분 :연하천
17시 34분 :화개재
18시 06분 :삼도봉
18시 32분 :노루목
18시 58분 :임걸령샘
19시 28분 :돼지령
20시 22분 :노고단고개
21시 50분 :성삼재 주차장.
"들어갑니다. 무사히 내려오게 해 주시고, 나머지 시련은 산신령님 뜻대로 하소서."
지리산 입산 첫걸음에 하는 기도다.
마음속으로 만 하던 기도를 소리 내 빌었다.
자연 학습원을 기점으로 불을 켜고 오른다.
사방 어둠에 묻힌 산길에 스틱 소리만이 따른다.
완주할 수 있겠느냐고 묻더라.
간절히 완주하고 싶은지 되물었다.
마음으로 먼저 가야 한다고 했다.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갈 것이고, 가다 안되면 말지."라는 마음이면 못 간다 했다.
가고 싶다면, 가고자 한다면, 가겠다고 굳게 다짐하라 했다.
그런 간절함이 없다면 지배당한 생각만큼만 갈 뿐이다.
2006년 성삼재에서 혼자 이 길을 걸었다.
2010년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걸었다.
2015년 천왕봉을 올라 성삼재까지다.
불을 켜고 오르는 길이 점점 밝아 왔다.
사랑은 새벽처럼 온다.
새벽이슬로 내려 모든 허물을 덮고 죽는다.
사랑하는 이와 새벽의 지리산을 올랐다.
이대로 새벽의 이슬이 된다 한들 어떠한가 싶다.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광덕사교를 건넜다.
로터리 대피소에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먹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천왕봉으로 향하는 길은 이미 밝아 있었다.
청춘의 새벽 기운 같은 문창대가 우람하게 솟아 깨어나고 있었다.
개천문 앞에 도착했다.
하늘이 열리는 이 문을 통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간다.
높은 곳으로의 욕구는 좀처럼 줄어 들지 않는 내 번민의
삶과도 흡사하다.
여간해서,내려놓음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과욕과 더 많이, 더 빨리를 원하며 산다.
지금 웃는다.
마주 내려오는 종주자들의 걸음을 유심히 보는 이는 나뿐이다.
나중에 저 사람들처럼 같은 표정과 걸음걸이가 될 것이다.
지리산.
몇 킬로, 몇 제곱미터의 수치로 가늠되지 않는다.
넓고 크다.
제주도 보다도 크다.
그냥 엄청 넓고 크고 깊다.
40대 이후 우연히 이 산이 내 마음에 들어 왔다.
이 산을 사랑한다.
일방적인 나의 사랑을 알아 달라 요구하지 않는다.
알아주지 않는 내 짝사랑이 슬프거나 고독하지도 않다.
무엇을 얻거나 이득을 취할 목적은 애초부터 없다.
그저 나 혼자 좋아할 뿐이다.
사랑은 그저 그렇게 그냥 그의 모든 것이 좋아야 한다.
난 지리산이 좋다.
이 산에 올라서서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는 이 일이 참으로 좋다.
치열할 수록 더욱 그렇다.
벌써 올라와 일출을 본 산객들의 감상을 들었다.
정상석아래 흙이 깔렸다.
정상석을 옮겼는지 구분되지 않는 미미한 변화를 확인했다.
주능선을 향해 몸을 틀었다.
주능선을 타고 넘는 운무가 점령군의 면모같이 우악스럽게 움직이다가
일순, 그 속도를 늦추어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길처럼 산을 쓰다듬고 있었다.
변화무상을 이러는 말이 이것이리라.
반야봉이 너무나 선명했다.
황금색 지붕이 빛나는 묘향대를 찾을 수 있었다.
멀지만 가야 할 방향이다.
골골을 가득 채운 보드라운 운무가 장관을 연출하는 풍광을 선물했다.
삼봉산이, 창암능선이 지척인 양 가깝게 느껴졌다.
연기처럼 스며드는 운무는 국골과 칠선계곡으로도 스멀스멀 들어찼다.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걸었던 길들을 더듬었다.
멀리 덕유산과 함양의 산들이 시야에 들었다.
중봉 하봉을 거쳐 내려가는 두류능선을 설명했다.
내 일행들은 자신들이 걸었던 그 길 앞에서 감탄했다.
천주(天柱).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 앞에 선다.
나를 믿고 든든함으로 여기는 사람 앞에서 언제나 당당함만을 보여주고 싶었다.
돌아서서 아무도 모르게 한 잔의 술로 스스로를 위로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할지언정.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는 이 산을 닮고 싶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란다.
변하지 말자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 자체가 나약함인 줄 알면서
수 없는 다짐을 반복했고, 반복하고 있다.
지리산에 들어 있는 동안 떠오르는 도인의 경지 같은 생각들이
찰나에 사라지는 어쩔 수 없는 졸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계속했다.
오늘도 또한 예외 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좀 더 오랫동안 그 생각에 머물 수 있음에 감사했다.
1,915m에서 내려선다.
제석봉으로 향했다.
고사목의 제석봉 길이다.
넘어 장터목 대피소를 앞서 생각했다.
통천문에서.
통신골로 올라와 이 아래에서 추위에 떨며 밥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통천문을 지나며 일행에게 어딘지 물었다.
대답은 지나가는 다른 사람이 아주 크게 답했다.
정답을 맞힌 그 분 뿌듯해 했다.
통천문을 통과하고 팍팍한 돌길이 계속 이어졌다.
나란히 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제석봉 전망대에서 아침을 먹었다.
간단한 찬이지만 매우 흡족했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 최고의 만족이다.
이는 경험 해 본 사람만이 안다.
제석봉의 고사목은 그 수를 세어도 금방 셀 만큼 사라져 간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단 하나의 진리는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오전 8시 28분.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했다.
그냥 통과한다.
머물 이유가 없을 땐 가야 한다.
산행시간을 정해 두고 그 시간 안에 통과하라는 것은 좀 억지스럽다.
사람마다 체력이 다르고 걸음의 속도가 다르다.
괜한 반발심이 생겼다.
이 정해진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더럽다.
연하천을 3시 안에 통과 해야 한다.
일출봉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이정목에 표시된 일출봉은 일출봉이 아니다.
1,723.4m의 연하봉을 넘어 연하선경을 걸었다.
연하선경.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서문에 쓴 글귀이다.
조선조 정조시대에 유한준 선생의 글을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연하봉에서 세석산장까지의 능선길이 연하선경이다.
주능선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길이 연하선경이다.
사랑해서 알게 되었고, 예전과 같지 않은 길이다.
누구는 꿈속을 걷는 것 같다고 했다.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벌써 아득히 멀어져 갔다.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인생의 빠름처럼 느껴졌다.
천왕봉의 위용은 자리를 바꾸어 바라보아도 웅장했다.
멀어져가는 천왕봉의 거리만큼 뿌듯함과 대견함이 동반되었다.
1,703m.
촛대봉에 도착했다.
의지한다.
우리는 힘이 들 때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한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다.
촛대봉으로 올라온 공단원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한마디 한 것이 계속되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겠다는 친절을 정중히 거절했다.
갈 길이 바쁘다고 했다.
세석대피소와 세석고원이 아래에 놓였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이 평원에서 빨치산 투쟁대회를 열었던 곳.
5월이면 철쭉이 만개하고 잔돌이 많이 잔돌평원으로 이름 된 곳이다.
평전은 일본식 표기라 했다.
고려 때 일본의 평씨들이 건너와 살았다는 이야기도
인터넷을 검색하며 본 적이 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다.
세석 대피소도 들리지 않고 지나갔다.
세석 대피소 뒤 남부능선으로 이어지는 영신봉을 넘었다.
8시 58분 카톡으로 에스테야 형님의 응원이 전달되었다.
마음이 담긴 염려와 배려다.
역시 형은 좋은 사람이다.
9시 30분 카톡이 왔다.
도착시각을 거의 정확하게 맞추었다.
답은 하지 못했다.
벽소령에서 답을 했다.
물도 충분하고 쉬는 것은 나중이다.
우선은 벽소령 통과 시간을 맞추어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한 시간 이상 출발을 빠르게 하도록 도와준 정석 형님은
임걸령을 지날 무렵 전화를 주셨고, 정석 형님과 산에서 우연히 만난
다우 대장님도 성삼재 도착 무렵 전화를 주셨다.
걸으며 사람과 만났다.
같은 방향으로 종주 중인 서울에서 온 사람과 같이했다.
백두대간 북진의 첫 시작을 홀로 한다고 했다.
하도 물을 많이 마시는 모습을 본 그분이 나누어 준
먹는 포도당 두 알을 삼킨 아내는 이후 물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
벽소령 이후 이분은 뒷모습조차 보질 못했다.
선비샘.
바가지에 물을 받아 머리에 퍼부었다.
달구어진 열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주능선 상에 만나는 이 물은 오아시스다.
물을 먹으려고 일부러 머리를 숙이는 게 아니라
감사의 마음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질 것 같았다.
돌무덤이 샘 위 전설을 적어 놓은 안내판 뒤에 있었다.
죽어서라도 사람대접받고 싶은 이야기가 씁쓸하다.
나보다 앞서간 일행이 바른재에서는
지난번 오리정골을 통해 올라온 곳이라
위치를 금방 알아차렸고 벽소령이 가까웠음도 알았다.
이곳에 서면 신비감이 든다.
각오 되지 않은 상황은 늘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에 언제나 직면한다.
내 적은 언제나 내 속에서 도사렸다.
보이지 않으니 더욱 크고 거대한 적은 언제나 휘청거릴 때마다
내게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승리의 거창한 타이틀 같은 것은 추후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다만, 실망하고 다시 희망하고, 절망하고, 다시 희망하는 나는
이대로 나답게 살고자 할 뿐이다.
이 산에서 지치거나 힘이 들면 저절로 여러 생각들이 엉겨온다
잠시 머릿속에 앞뒤 구분 없는 생각이 흘러갔다.
12시 35분 벽소령 도착했다.
구벽소령에서 부터 호진형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락이 안 된다.
옥자님 폰으로 통화가 되었다.
비린내골 계곡을 헤매고 있다.
불어난 계곡 물과 미끄러움으로 그리고 우리에게 줄
음식까지 짊어지고 고생을 하는 상황이 미안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오라고 했다.
이미 마음만으로도 배불리 먹은 점심이다.
배낭을 다 뒤집어 놓으니 네 사람이 먹고도 남을 음식이 나왔다.
점심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물만 마시는 두 여사님에게도 억지로라도 먹게 했다.
13시 20분 벽소령을 통과하고 연하천을 향한다.
연하천 통과 시간도 오후 3시 까지라 했다.
형제봉이다.
부자암(부자바위)이 정확한 지명이라 했다.
연하천까지 멀고도 멀었다.
시간에 쫓기니 쉼없는 걸음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북부 능선이 시작되는 삼각고지를 통과했다.
중부칠암자의 길이고 영원령으로, 삼정산으로, 그 맥을 이어 남원 실상사까지 능선이 내린다.
연하천이 이제 지척에 왔음이 더욱 안도 하게 하는 지점이다.
시간 내 통과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무리해서 걸어온 길이었다.
이후 후유증이 만만치 않게 나타났다.
이 건물의 용도를 알지 못한다.
주능선의 주요 지점마다 이 건물을 설치하는 목적이
정녕 등산객의 안전을 위한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오후 3시 연하천 대피소를 넘어갔다.
몇 시간 째 헬기 소리를 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연하천 대피소는 공사 중이다.
대피소 길목 나무계단에 잠시 앉아 쉬고 다시 힘을 냈다.
일어설 때마다 이제는 앓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우스갯소리를 해 보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점점 힘들어하는 모습들을 유심히 살폈다
무모함과 용기를 구분해야 할 책임이 내게 있기 때문이었다.
연하봉을 지나올 무렵 천왕봉 방향으로 지나갔던 사람을
같은 방향에서 다시 만난다.
스틱도 없이 작은 배낭만을 멘 그의 걸음은 무척 빨랐다.
우리와 같은 시간 성삼재에서 산행을 시작해 천왕봉을 찍고
다시 성삼재로 돌아가는 길이라 했다.
이른바 지리산 왕복 종주를 하는 분이었다.
사람은 분명하나 사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체력은 어떻게 해야 만들어지는 걸까.
느린 걸음이지만 우린 우리의 걸음으로 걸으면 된다.
천천히 가도 된다.
오늘 중으로 집으로 돌아갈 일이다.
굳이 서두르지 말자.
2013년 2월.
에스테야 형님과 둘이 빗점골의 왼골을 올라 토끼봉에 섰었다.
무릎을 넘는 눈을 러셀 하며 오르는 동안 체력이 고갈되어 힘들었다.
토끼봉에서 벽소령을 거쳐 작전도로를 따라 내려간 그 날
11시간에 가까운 산행이 아직도 생생하다.
토끼봉에서 벽소령까지 주능선을 딸랑거리는 배낭 소리를 들으며
한 시간 넘게 뛰었었다.
그나마 형과 나는 마라톤으로 조금은 다져진 자신 있는 체력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힘든 상황일수록 기억에는 오래도록 생생하다.
지리산 종주를 시도 한 식구들에게도
아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일 하나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화개재다.
오후 5시 34분.
아직도 갈 길은 멀었고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반선의 뱀사골 방향은 흘깃 보기만 한다.
이제 설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여기가 어디고
저긴 어딘지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어 보였고 애써 말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로지 완주까지의 남은 거리 만 알고 싶은 식구들에게
계속해서 다 와 간다. 얼마 안 남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순간은 지나도록 약속되어 있고
지난 것은 잊히기 마련이다.
이 계단의 기억이 그렇다.
두어 번 오르내린 기억에 이곳이 이렇게 힘들다는 기억은 없었다.
정확히는 힘은 들어도 이 정도로 개고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550개의 계단은 내게 최대 난관이었다.
딱 세 번을 쉬었다.
배낭의 어깨끈에서도 밴 땀이 흘렀다.
소금이 핀 옷은 다시 축축이 젖고, 바지 끝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삼도봉.
사진이라도 찍고 가자는 말에 몇 발짝의 표지석으로 이동조차 싫어했다.
억지로 세워 놓고 사진을 찍었다.
얼굴의 표정들은 아침에 천왕봉을 내려오는 종주자들과 이제 비슷했다.
하물며 1박 2일에, 또는 2박 3일에 걸쳐 걸어온 사람들의 표정이 그러했는데
당일 종주는 오죽하겠는가.
천왕봉에서 걸어온 길 20.5km.
남은 거리 5km.
노고단 고개만을 생각하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 성삼재까지의 거리는 말하지 않았다.
해가 저문다.
서북 능선 넘어 붉은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춰들었다.
반야봉 1km라는 안내판이 반야봉으로 갈 수 있는 길임을 알려주었다.
노루목을 지났다.
그냥 집으로 가지 못하고 역진으로 돌아 성삼재를 거처
노고단 대피소에 와 있는 호진형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배고프지 않느냐, 다들 견딜 만 하냐, 현재 위치는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밥해놓고 기다리겠단다.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한 번의 거절은 예의지만 형도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미안해서
이럴 것이다 싶어 도착 전에 전화하면 준비해 달라 했다.
임걸령 샘터 넘어 저녁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임걸령을 뒤로 재끼며 줄어든 속도를
그나마 땡겨 볼 요량으로 앞에서 걸었다.
돌길은 점점 줄었고 흙이 밟히는 땅의 촉감이 두꺼운 등산화 밑창을 뚫고 느껴졌다.
높낮이가 있으나 평이했고 그렇게 된비알을 치오르고 내리지 않음으로
길은 점점 편해졌지만, 체력은 점점 고갈되어 걸음은 더디었다.
오후 7시 28분 돼지령을 넘어섰다.
한 시간을 더 걸어 8시 22분 어둠에 고요한 노고단 고개를 통과했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
고생했다 뛰어와 안아주는 옥자님과 만났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마련해 종류별 술과 안주를 권했다.
우선 급한 몇 잔을 병나발로 한 번에 마셨다.
짜릿했다.
먹는 것도 귀찮을 정도로 드러눕거나 주저앉은 식구들에게 몇 점씩 고기를 억지로 물렸다.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식구들을 향해 호진&옥자님이 같이 걸었다.
남들과 비교하면 몇 시간이 더 많이 걸린 길이지만
우리 식구들이 자랑스러웠다.
'상가식구"라는 이름 대신 해영 형님이 보내 준 "다솜 모꼬지"를 사용해도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지리산 종주를 마치며 아주 늦은 시간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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