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9 연동골
연동골
행동팀 지리 132차 정기산행
일시:2023년 07월 09일 (일요일)
산행자:연하, 황순진, 김은의, 산친구, 최규다, 들풀, 최정남, 성주숙, 수야 (9명)
걸어간 길:칠불사 일주문 주차장-연동골- 칠불사 갈림길-청굴-부휴대사탑-영지-일주문 주차장
산행시간:09시 32분~14시 15분(04시간 43분) 5km


1
그 어원이 술에서 온 말들이 있다.
술을 따를 때 미리 양을 정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정해 놓고 할 때 사용 되는 말이 <작정>이다.
술병이나, 도자기 병 안에 있는 술의 양을 가늠하지 못해 머뭇거리면서 술을 따르는 것을 <짐작>이라 하는데,
정확히 예상할 수 없을 때 어림잡아 예상하는 것을 말한다.
또,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상대방을 고려하여 술을 조금씩 따라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을 <참작>이라 하였다.
그날 우리는 단단히 <작정>을 하고 의신에 도착하였다.
수곡골 은정대를 찾아보고 아직 가 보지 않은 그 능선을 올라갈 각오를 하였다.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산행 채비를 단단히 하였다.
의신에는 우리 이외 산꾼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서부터 뭔가 싸아한 느낌이 감돌았다.

대성골로 접어드는 길에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산불로 인해 이 구간이 통제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멈칫하였으나, 이 정도는 늘 보아 오든 현수막과 별 반 다르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계속 걸었다.
걸어 갈수록 뭔가 찜찜함이 찐득하게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이 느껴졌다.
길게 가로로 펼쳐진 현수막, 세로로 세워진 현수막, 또, 현수막.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문 입구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라고 적혀 있다 하였는데
저 현수막들이 흡사 그리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 허리를 꺾어 들어가는 입구에 감시 카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차단기로 단단히 막힌 입구, 감시 카메라, 저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듯 당당히 서 있는 차량.
그래도 들어가자는 쪽과, 포기 하자는 쪽, 이쪽도 저쪽도 아닌 쪽.
결정을 하란다.
작정하고 나선 길이지만 더 들어가서 일어날 불미한 일들이 어림짐작으로 <짐작>되었다.
이 정도 정보도 미리 알아보고 오지 않은 내 불찰이 못내 아쉽고 미련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칭칭 감고 올라가는 칡넝쿨과 등나무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엉겼다.
이런 것을 세간에서는 '갈등'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표현한다 들었다.
갈등에 갈등을 하고 있을 때
집사람의 명쾌한 포기 선언에 버럭 화 난 소리를 냈다.
그래야 하는 것이 맞는 줄 알면서도, 나 자신에 대한 화가 그리로 옮겨 붙었다.
돌아서서 모두들 소곤거렸다. 실상은 다 들리는 데시벨이었으니, 아마도 나 들어라는 의도가 분명하였으리라.
'저 놈의 성질머리!.'
"뭘!, 잘 난 놈하고 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주의> 이런 주장을 계속하다 보면 마치 신념이 되는 것 같은 위험한 착각이 들 수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
이런 여인도 있었다는데, 그 뭐 성질 좀 냈다 하여 어떤가 말이다.
조선 시대 3당 시인 중 하나였던 고죽 최경창이 1573년(선조 6년) 북도평사로 발령받아 임지로 갈 때,
함경도 홍원현 현감이 이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다.
이때 홍원현 관기(官妓) 홍랑과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하지만 관기였던 신분 탓에 최경창을 따라가지 못했고, 첫 만남은 짧게 끝나고 만다.
2년 후인 1575년 최경창은 함경도에서 돌아와 큰 병을 얻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관기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밤낮으로 길을 걸어 7일 만에 서울에 도착해 최경창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덕분에 최경창은 쾌차했으나 사사로이 관기를 불러들였다는 죄로 탄핵을 피할 순 없었다.
그녀 또한 '양계의 금(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한양 출입을 금지하는 제도)'을 어겼다.
이후 홍랑은 다시 함경도 홍원현으로 돌아갔고, 최경창은 그녀에게 작별 선물로 <증별>이란 시 한 수를 건네주는데
이것이 이들의 살아생전 마지막이었다.
1583년 최경창이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홍랑은 시묘살이를 자처한다.
이때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큰 상처를 내어 다른 남자들의 접근을 막고 오로지 시묘만 했는데,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3년 후에는 그 근방에서 묘를 지켰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경창의 시를 챙겨 7년간 떠돌아다니다가 어렵사리
해주 최 씨 그의 문중에 유품을 전한 뒤 파주 선산 최경창의 묘소 옆에서 자결한다.
문중에서는 그녀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에 감동해서 최경창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묻어줬다.
이 일은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그 고지식한 양반가에서 기생을 가문의 한 사람으로 대우해 줬다는 사실 때문이다.
더군다나 관에 속한 기생의 경우에는 원래 빼돌리는 것 자체도 불법이었다.
홍랑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다음 시조는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묏버들가(歌)>, 묏버들 가려 꺾어로 불리는 이 시조는 원래 제목이 없었으나, 훗날 최경창이 제목을 붙여준 것이다.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자시난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님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2
목통골로 목적지를 다시 잡았다.
칠불사 일주문 주차장은 텅텅 비어 우리 차들만 망망대해에 뜬 돛단배 같이 휑뎅그렁하였다.
좌측 계곡 물소리가 지나 간 일은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 버리라는 듯 웅장하게 귓전을 울리고 있었다.
일주문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저 시키 성질 건들지 말고 빨리빨리 서라 또 성질부릴라"며 다들 알아서 웃어 준다.
저분들은 나를 너무 많이, 잘 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낮은 곳은 화개재(1,360m)이다.
주능선에서 가장 잘록하여 개미의 허리 같은 곳이다.
경남과 전북의 도계이자, 하동군 화개면과 남원군 산내면의 경계지점이다.
이 화개재 남쪽방향으로 흐르는 계곡이 연동골이며 목통골이다.
예전에 화개에서 배로 날라와 부려 놓은 소금 가마니와 해산물등이 남원 내륙으로 화개재를 넘어 운반되고, 남원 쪽의
삼배를 비롯 농산물이 고개를 넘어 화개장터로 넘어왔다고 한다.
화개장터에서 화개재에 이르는 옛길에는 10리 간격으로 마을들이 있었다.
화개탑리에서 쌍계사, 쌍계사에서 신흥, 신흥에서 목통, 목통에서 연동, 연동에서 화개재.
그러니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연동마을이 목통마을에서 4km쯤에 있었다는 말이다.
목통 마을 위쪽 연동마을 부근 계곡을 그래서 연동골이라 한다.
목통이라는 이름은 이 마을 일대가 지난날엔 꿀처럼 달콤한 어름밭이었다.
어름은 이곳 사투리로 먹통이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행정관서에서 목통이란 이름을 달았다.
일부지도에는 목동(木洞)이라 표기한 곳도 있었다 한다. <최하수 지리산 365 中>
지도에 독가로 표기된 이곳은 폐가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사람이 왕래를 하는지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며 조리 기구가 금방 사용한 듯하였다.
4년 전 똑같은 코스를 걸었다.
그때와 달라진 건 별로 없다.

독가를 지나 계곡으로 이어진 길에서 휴식을 하였다.
물소리가 얼마나 우렁찬지 옆사람의 말소리가 잘 전달되지 않았다.
뭔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쳐다보며 웃는 것은 좋다는 뜻이리라 짐작하였다.
설마, 실실 웃으며 욕 했을 리는 만무하였으리라.

3
트랙은 보지도 않고 선명하게 난 길을 따르다가 갑자기 사라진 길 때문에 지도를 보았다.
계곡을 끼고 위쪽으로 난 트랙에 일치시키려 산 사면 산죽 밭을 바로 치고 올라 트랙 위에 섰다.
이런 길을 이제는 모두들 잘도 찾아 올라가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다.
뭐, 산에서 길 좀 헤매고, 우회하기도 하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는 거야 별 대수롭지 않다는 거다.
그동안 그 잘난 놈이 훈련은 참 잘 시켰다는 말이 된다.
물이 많이 불어 계곡을 도저히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규다와 팀장이 아래위로 몇 번을 오가며 건널만한 곳을 찾아 시도해 보았으나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신발을 벗고 바지를 돌돌 말아 올렸다.
모두 따라 건너기 시작했다.
세찬 물살에 바지는 어차피 다 젖었지만, 이런 게 재미있다며 함성을 질러대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산길은 험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있었든 길이라 그런지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논 밭으로 개간했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는 연동마을터 부근을 지나갔다.

의,식,주 라고 쓰고 말한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달리 식,주.의라고 한다고 했었나?. - 조정래 소설 정글만리에서 그렇게 읽은 듯하다.-
'헐벗고, 굶주린다'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입는 것이 먹는 것보다 우선이라는 의미 일 것이다.
옛사람들은 헐벗은 서러움이 굶주린 서러움보다 더 깊어서 헐벗는다는 말을 굶주린다는 말 앞에다 놓았을까?
그 서러움이나 그 서러움이 매 일반이긴 마찬가지겠지만.
이 분들도 중국 사람들처럼 먹는 것 '식'이 우선이었다.
언제나 그런 게 아니라 산에서만 그렇다는 이야기다.
수박 한 통을 짊어지고도 배낭의 무게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포장도 뜯지 않은 공보가주 한 병을 규다가 내놓았다.
저 친구는 나의 마음을 <참작>하여 저런 지당하고, 온당한 바른 행동을 거침없이 자행하였을 터.
그의 마음을 외면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아 마땅함으로 흔쾌히 친구의 정성을 <참작>하여 나 또한 거부하지 아니하였다.
두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에 감동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고 하여 자신의 감정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말라.
극히 정상적인, 인간적인, 감성을 지닌 분이 틀림없으니까.
마음 놓고 홀짝 거렸다. 먹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내 생각에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말이 자꾸 콸콸 쏟아지려고 하는 걸로 보아 취한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아주 오래 밥을 먹었고, 나 혼자 중얼중얼거렸을 것이다. 쪽팔리구로.

4
밥 먹은 곳에서 바로 하산을 했다.
밥을 먹고 있는 사이 토끼봉이며 화개재는 히말라야 보다 더 멀고 높아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사진 찍기 놀이가 아주 오래 계속되었다.
음, 앞으로는 나도 산용호님처럼 뒤에서만 찍어야 되겠다.

저 미소는 뭐래?
어잉?. 눈 빛이 왜 이래??
사람 설레이구로.

이 아저씨는 언제 저기 서 있었데?
이럴 땐 억수로 빠르네...

존중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spect'는 '반복'을 나타내는 re와 '보다'의 의미가 녹아 있는 spect로 쪼개진다.
서로를 오래, 거듭해 바라볼 때 존중하는 마음도 싹튼다.
마주치기를 꺼리거나, 얼굴을 돌리면서 타인을 존중할 순 없다.
존중은 배려를 통해 구체화된다.
배려의 한자는, 짝 지을 배(配) 생각할 려(慮)다.
관계를 맺는 상대방을 염려하는 것이 배려의 본질이다.
혹여, 그대들이 넘어지거나 빠질까 봐 먼저 건너가 보겠다는 저자의 마음이 바로 존중과 배려라 하겠구나.
저 훌륭하기가 비길 때 없는 자는 누구인가?

한편, 누구 하나 저기서 넘어지기만 한다면 대에에박!!.
연속샷으로 찍을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다리고 있는 자가 있었겠다.

그 자는 저 앞서 간 배려 깊은 자의 친구이고, 언제나 성질머리 더럽고, 까탈스럽다고 잔소리를 듣고 사는 자라.

머꼬? 디기 좋아하면서 웃고 떠들고 소리 질러가면서 하나도 안 자빠지고 다 건너가뿟네.
어, 이거 나만 남았는데... 땅은 왜 이리 흔들리지... 이거 내가.... 그 꼴이....

산 허리를 따라 내려가는 길은 경사 없이 완만하여 마치, 뒷짐 지고 포행 하듯, 산보하듯 여유로웠다.
산록에 우거진 숲은 푸르름이 흥건하여, 그것에 물든 앞사람을 툭 건드리면 초록 물이 배어 나올 것 만 같았다.
콧노래 저절로 나오는 길을 그야말로 즐거이 걸었다.
푸르름이 짙어진 만큼 이제 여름이 치렁치렁 무성해지고 있었다.

칠불사 청굴 앞에서 술 취한 놈이 시키는 대로 다 해 주는 저분들을 내 어찌 respect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 말대로 산이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늘 못 간 곳은 다음에 가면 되고.
지금 이곳에 있는 이 시간, 함께 있는 이 사람들, 그런 오늘은 충분히 '아름다운'이었다.


5
산다는 건 반복의 연속이다.
도돌이표처럼 거듭 반복되는 일상, 하루하루 매일 같은 일을 부단히 되풀이하면서 우린 세월 속을 헤맨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그 어려운 일을 우리는 밥 먹듯 해 내고 있으므로 오늘 하루쯤은 놀아 주자.
자판기 커피가 아닌 카페에서 호사를 누렸다.

행복한 사람은 남의 행복에도 행복해지고
불행한 사람은 남의 불행마저도 민감한 법이라 하였다.


이것이 문제다.
'술잔이 널어 날수록 모든 여인은 아름답다.'는 진리를 나는 언제나 긍정한다는 것.
<수작>:잔을 건네고 술잔을 따르면서 친분을 나눔.
"어디서 수작이야"라는 말은 술잔을 건넬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친한 척한다는 뜻이다.
저딴 수작질을 저지르면,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갑다와 같이, 높은 옥상에서 떨어지면 죽는다와 같이,
너무도 당연하게 응징을 당하게 되어 있다.


그리움은 외로움과 달리 그 대상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저분들이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란다.
확실한 대상,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 글이, 이 사진들이, 이 기억이,
홍란의 시조 그 묏버들이 되기를 바란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자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