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22.07.10 도투마리 골

지리99 수야 2022. 7. 28. 14:26

도투마리 골

 

행동팀 지리 121차

일시:2022년 07월 10일

산행자: 백산연하노을, 김갑숙, 황순진김은의최옥희최규다들풀권영구이순애, 최정남, 성주숙, 수야 (14)

걸어간 길: 직전-도투마리골-용소-금류폭포-금류동암터-오향대터-금강대터-거무내석굴-석광대터-금강대터-금류폭포-직전

산행시간:07시 44분~16시 20분(8시간 36분) 5.9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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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생애말 비탄증에 빠진 사람처럼 축 처져 늘어진 체 바닥을 기었다.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무기력한 날들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좀 더 정확하게는 게으름이 신발 바닥에 눌어붙은 껌 딱지처럼 떨어지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번 계속 산행을 했는데 언제부터 인지 산행기는 단 하나도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뒤늦게 사진과 함께 정리를 하려고 하니 기억이 가물거릴 뿐이다. 

책을 읽었는데 뭘 읽었는지 읽은 책을 다시 찾아보지 않으면 도무지 기억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기록되지 않은 산행은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뒤늦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라도 기록해야 되겠다 싶어 노트북을 열었다. 

너무 먼 기억은 제쳐두기로 했다.

 

 

피아골 입구 직전 마을에서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연곡사 주차장 아래에서 규다를 기다리다 우리 차 한 대만 먼저 올라와 주차할 곳을 찾아보았다. 

자주 가는 식당의 주차장에 주차를 해 볼까 하였는데 주차장은 이미 꽉 차있었다. 

식당마다 전용 주차장이라 저녁을 식당에서 먹으면 되겠지 싶어 빈 주차장을 찾아다녔다. 

겨우 주차장이 넓은 식당에 주차를 하였는데 식당 주인이 나와 저녁 식사 메뉴와 도착할 시간도 정확하게 예약하란다. 

그것도 선금을 주어야만 주차할 수 있다고 하여 다시 차를 빼내 돌아 나왔다. 

겨우 겨우 길가에 네 대의 차를 주차하고 배낭을 둘러 매고 섰다. 

규다와 들풀이 오랜만에 시간을 냈고, 허리 수술로 그동안 산행을 못 했든 노을 형님이 동참했다. 

<사진: 백산 님>




시원한 계곡에 발 담그고 놀다 오는 짧은 코스로 나선 산행이었다. 

도투마리 골은 솔봉 능선과 불무장등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예전 독오당 산행 때 불무장등에서 한 번 내려온 경험이 있었다. 

솔봉 능선이 그 끝머리를 내리는 곳이 들머리인 셈이다. 

직전마을 식당가 산장 민박 옆 임도 길을 따라 올라갔다. 

오르막 임도를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솔봉 능선에서 내려오다 보게 되는 통신탑이 보이고 곧 오른쪽에 벌통이 놓인 양봉장을 지나게 된다. 

양봉장을 지나 임도가 끝나면 좁은 산길이 계곡 옆으로 나있어 길 찾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다.



 

계곡과 가까워졌다 멀어져 졌다를 반복하며 길이 계곡에 붙고 곧이어 작은 폭포가 있는 용소가 나타나는데 규모는 아담했다. 

작은 용소 위에 폭포가 시원스러운 물줄기를 품어내고 있었다. 

얼마 걷지 않았지만 이미 땀이 흠뻑 젖은 몸에서 배낭을 떼어내고 서서 바라보았다. 

쌍폭의 찬 물줄기가 가슴속으로 흘러내리는 것같이 시원스러웠다. 

용소에서 아침을 먹었다. 생선 초밥은 중경팀의 단골 메뉴이다. 늦은 아침 식사는 입과 손놀림이 저절로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시장기를 동반한 산속에서의 생선 초밥은 지금까지 먹어 본 생선 초밥 중 가장 으뜸인 일미로 또 한 번 기억되었다. 

식사 후 배낭을 그곳에 둔 채로 금류폭포를 지나 오향대터로 올라갔다. 

이곳으로 다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놀다 하산할 계획이다. 

<용소- 사진: 백산 님>




트랙을 따라 오향대터와 금강대터, 거무내 석굴까지만 갔다가 돌아오기로 했다. 

금류폭포와 축대가 쌓인 금류동암터를 지나 사면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다. 

대나무 밭을 통과할 때는 길이 사라진 듯 잘 보이지 않았다. 

길은 뚜렷하였다가 사라지고 또 보였다가 없어지고 하였다. 

빽빽하게 서로 엉켜 자란 대나무 숲은 쓰러지고 부러진 대나무로 갑자기 사라진 길처럼 혼란스러웠다. 

이런 대숲은 늘 꿈속처럼 어둑어둑했다. 몽밀하다는 단어가 이런 때 쓰이는 것이구나 싶었다. 

대나무는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 

왕대는 80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 눈이 내리듯이 흰 꽃을 피운다. 

꽃을 피우고 나면 대나무는 모조리 죽는다. 꽃 속으로 모든 힘이 다 들어가서 대나무는 더 살 수가 없다. 

대나무의 성질은 차다. 미쳐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의 번뇌를 죽순이 다스린다고 옛 의학 서적에 적혀 있다고 한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 같은 금강대 터에서 한 번을 쉬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백산 선생님은 배낭을 두고 가기로 했다. 

트랙을 따라 걸어온 일행과는 달리 연하 형님은 어디로 왔는지 혼자 뒤늦게 나타났다. 

다른 길이 있는지, 돌아갈 때 더 빠르고 편한 길을 찾아볼 요량으로 모두를 위해 그랬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아무튼 뒤늦게 나타난 형님의 모습은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온 사람 같았다. 단 몇 십분 사이에 몹시 초췌해 보였다.

아마도 한 동안 머리와 몸이 독자 노선을 걸은 것이 역력해 보였다. 

죽순이라도 삶아 먹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렇지만 투철한 탐구정신으로 무장한 형님을 누가 말릴 것이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책에도 쓰여 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개인의 생각과 행동의 자유는 절대 보장되어야 한다고. 

아마, 이런 걸 암묵적 불간섭 조약이라고 한다지.

하여 우리는 연하 형님을 보고 그리 말하였다. "너 님이 알아서 하세요." 

이곳 길을 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트랙을 자주 보며 일치시켜 걸었다. 

이후로 연하 형님은 더 이상 혼자서 길을 찾으러 가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집에 갈 때 죽순은 사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너들과 사면 길을 따라 한 구비를 돌아서자 거문내 석굴이 보였다. 

거대한 암반과 지붕형태를 갖춘 석굴은 그 크기도 크기이지만, 약간 떨어져 바라보면 모습도 특이하여 여기까지 땀 흘리고 찾아온 보람을 느낄만했다. 

바닥에는 온돌로 사용한 구들의 흔적도 보였다. 

지리 99에 찾아보았더니 직전 마을에서 거무내 골을 바라보면 고도 680 부근에 숲 사이로 암벽이 보이는데 이 거무내 석굴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예부터 할머니들이 치성을 드리든 곳으로 별다른 이름은 없었고 거무내 골에 있는 석굴이라 거무내 석굴로 표기된 것 같았다. 

바닥에 낙엽 하나 없이 깔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았다.

<금강대터와 거무내 석굴-사진: 백산 님>

 



 

사진도 찍고, 치성도 드리고, 제각각 쉬는 모습도 달랐다. 

영험이 있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으나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으려는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 바위는 묵묵히 지금도 받아 주고 있었다. 

거무내 석굴은 그냥 특이하고 웅장한 암굴이 아니라 생명의 안쪽을 통과해가는 시간의 모습으로 내게는 비쳤다.

수만 년을 깎인 과거의 바위였고, 변화와 생성을 거듭해 갈 미래의 바위 같았다. 

예전 사람들의 치성과 지금 사람의 치성이 별반 다르지 않듯이, 현재 우리 일행의 저 치성도 그러하며, 미래의 누군가가 또 그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저나 저 아줌마들의 간절함이 도대체 무엇일까?. 지리산의 암자나, 기도 터마다 엎드려 빌고, 서서 빌고, 머리 숙여 두 손 모아 빌더라. 

짐작되는 일이라 한 번도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의 깊은 것들은 언제나 깊은 것들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처음에 한 사람이 서있었는데 한 사람씩 곁에 와서 서더니 나중에는 모두 저렇게 모이게 되어 단체 사진을 찍게 되었다.

지금 자세히 보니 여기 연하 형님이 보이지 않는다.

또 어디를 간 것일까?. 아무래도 죽순이 약이 될 것 같기도 하다.
<거무내 석굴-사진: 백산 님>




금류폭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갈 때처럼 힘들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에는 저항성이 생기기 마련이다. 경험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만약 다음에 이곳을 오게 된다면 지금 보다는 더더욱 힘들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서 중대하고 치명적이고 아주 큰 일을 겪어 본 사람은 작은 걱정에 연연하지 않듯이 말이다.

<금류폭포-사진:백산 님>

 

백산 선생님이 차린 점빵에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밥 먹다가도 사진 찍는다는 소리만 들리면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달려가는 사람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경팀 누구나 백 선생님이 찍어 준 사진 한 두장씩을 핸드폰에 장착하고 다닌다. 

그러니 더 좋은, 더 멋진 인생 사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늘 바쁘다.

한잔 하고 있을 때도 자리가 비어 찾아보면 어느 사이 카메라를 들고 일행과 떨어져 계곡으로 들어가곤 하셨다.



<용소-사진: 백산 님>




금류폭포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믿음직한 중경팀의 팀장 님과 김은의 님




용소 

언제나 반갑고 살가운 내 친구 규다와 들풀 님 




허리 수술로 인해 한 동안 산행을 할 수 없었든 노을 형님 

짧은 코스에서부터 서서히 산행을 재개해 볼 만큼 회복이 되었다.

 

 

모든 걸 용서하게 만드는 그녀 표 미소의 이순애 님 

한동안 일 때문에 산행을 하지 못하다 이번부터 다시 산행을 같이 하게 되었다. 

중경팀의 분위기 메이커.




 

이 사진을 보며 밥 먹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여러 생각을 함축하여 쓰기가 마땅치 않았다. 
마땅치 않은 부분에서 마땅한 생각이 났다. 밥에 대하여 김훈 작가가 쓴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밥이란 쌀을 삶은 것인데, 그 의미 내용은 심오하다. 

밥은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윤기가 흐르는 낱알들이 입속에서 개별적으로 씹히면서도 전체로서의 조화를 이룬다. 

이게 목구멍을 넘어갈 때 느껴지는 그 비릿하면서도 매끄러운 촉감, 이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이것이 인륜의 기초이며 사유의 토대인 것이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든 먹이 속에는 낚시 바늘이 들어있다. 

우리는 먹이를 무는 순간에 낚시 바늘을 동시에 물게 된다. 

낚시를 발라 먹이 만을 집어 먹을 수는 없다. 세상은 그렇게 어수룩한 곳이 아니다. 

낚시 바늘을 물면 어떻게 되는가. 입천장이 꿰여서 끌려가게 된다. 

이 끌려감의 비극성을 또한 알고, 그 비극과 더불어 명랑해야 하는 것이 사내의 길이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라. 그것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히 미성년자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중에서 발췌

 

나는 돈과 밥의 지엄함을 천만 번 충분히 알면서도 낚시 바늘을 물고 있는 현실이 잘 명랑해지지가 않았다. 

명랑해 지기보다는 오히려 서럽고 고단하였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강렬해지는 법이었다. 

고단함 속에서 내게 한줄기 빛 같았던 산. 그 지리산은 철가루 위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기곤 했다. 

때론 치열하게, 때론 느긋하게 산을 걷고 나면 마치 마술처럼 세상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듯,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기도 하였다. 

산에서의 맑은 생각과 명랑함이 하산 길에는 깨어져 버리는 몽환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산으로 가고 싶었다. 

다 같은 낚시 바늘이 든 밥이라면 간혹은 산에서 입천장이 꿰이고 싶다.




 

하산은 순식간이었다.

거리가 짧으니 당연했다. 산을 벗어나자 아직도 쏟아지는 여름 햇볕은 날카로운 송곳처럼 등을 쑤셔대고 있었다.

직전 마을을 벗어나자 씻을 곳이 마땅하지 않아 차를 타고 한참을 돌았다. 결국 또랑 수준을 간신히 넘은 곳에서 땀을 씻어냈다. 

먼 길을 가야 하는 규다와 들풀의 저녁을 위해 화개장터의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대부분 배가 불러 뭘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들 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밥까지 다 먹고 있었다. 

물론 이 순간 밥 보다 급한 것이 있는 사람들은 따로 앉아 두서너 잔을 연거푸 말아 마셨다. 

밥은 배고플 때가 가장 맛있고 술은 산행 후 갈증이 적당 할 때가 가장 치명적이다. 

취기가 제법 오르고 난 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먼 길을 가야 하는 규다를 먼저 보내고 차들은 각자의 밥벌이할 곳으로 돌아갔다.

 

예전에는 리어카처럼 기어가던 시간이 요즘은 스포츠카처럼 내달린다.

간혹, 너무 빠르게 시간이 흘러 무섬증 마저 들기도 한다.

세월이 이리 빠르게 지나가니 자주 드는 생각이 하나가 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명백한 진실 앞에서 무슨 짓을 하든 얼마나 후회를 하든, 

뭔가를 하려면 지금 해야겠다는 것이다. 망설이고 뒤로 미루어 놓기에는 나는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니 말이다.

늦었지만 뒤늦은 산행기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벽산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