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지리산 남북종주

2021.11.14 남북종주8차(벽소령-삼각고지-빗기재)

지리99 수야 2021. 11. 23. 11:36

벽소령-삼각고지-빗기재

 

남북종주 8차

행동팀138-지리110차

일시:2021년 11월 14일

산행자:연하,황경자,권영구,황순진,김은의,최옥희,최규다,최정남,성주숙,수야 (10명)

걸어간 길:삼정-작전도로-벽소령-부자암-삼각고지-영원령-영원봉-빗기재-영원사

산행시간:08시 13분~19시 18분 (11시간 05분) 16km

2021-11-14 남북종주8차(벽소령-빗기재).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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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2020년 03월08일 외둔-원강재

2차:2020년 04월12일 원강재-상불재

3차:2020년 05월10일 상불재-삼신봉

4차:2020년 07월12일 삼신봉-한벗샘

5차:2020년 11월08일 한벗샘-세석

6차:2021년 05월09일 세석-칠선봉

7차:2021년 10월03일 칠선봉-벽소령

8차:2021년 11월14일 벽소령-빗기재

1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初老)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筆耕)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하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 김훈 - <풍경과 상처> 서문에서

 

 

삼정 백두대간 표지석에서 모이기로 했다.

비린내골을 올라 벽소령으로, 벽소령에서 길을 이어 빗기재까지 가기로 했었다.

차에서 내려 주능선을 올려다보는데 눈이 내린 산은 희뿌연 안개에 가려 멀게만 느껴졌다.

카메라로 부자 바위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나무꾼 인걸과 선녀 아미의 전설이 깃든 부자 바위 풍경 속에서 김훈의 책 <풍경과 상처>가 생각났다.

더 정확히는 책의 제목이 생각났다.

사람의 풍경도 자연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과 내면의 말하여지지 않은 상처들을 생각했다.

기억이 가물거려 뒤엉킨 한 줄의 글을 산행 후 다시 찾아보았다.

위 서문이 그것이었다.

집결지로 올라오며 잠시 차를 멈추고 석문암과 선유정을 사진 찍었다.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산행기에 담아 보려 하였으나 공교롭게 엉겅퀴 형님이 먼저 선점을 해버렸다.

사실, 진짜 이유는 선유정을 다가가서 찍지 못하고 멀찍이서 찍은 사진 탓도 있었다.

차 한 대를 영원사에 가져다 놓으러 간 일행이 전부 모였을 때 도로변에 앉아 준비해 온 아침을 먹었다.

생각보다 아직은 춥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노상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먹는 아침도 이제 봄이 될 때까지는 없을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비린내골을 버리고 작전도로를 따라 벽소령으로 가기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거리와 시간, 눈이 내린 계곡의 미끄러움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이 결정에 이르자 모두들 처음부터 원하고 있었다는 듯 반겼다.

 

2

작전도로 차단기 앞에는 여러 대의 차들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출발 전 단체 사진을 찍었다.

지난 10월 큰샛골 칠선봉 벽소령 구간을 함께 걸은 순진 형의 누님이 이번 산행에도 같이하셨다.

이것은 중경팀이 열혈 지리 산꾼을 한 사람 더 얻게 될지 모른다는 예감이 점점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울산에서 지리산행을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것을 볼 때, 누님의 지리산에 대한 열정과 경험으로 볼 때,

그리고 무엇보다 중경팀 산꾼들의 인간미 철철 넘치는 면면을 이미 경험했으니 분명 그리될 것이다.

벽소령 작전도로 이 길은 지난번 산행 때 야밤에 내려온 길이었다.

낮에 다시 걸어 오르는 길은 지루하지도 멀지도 않았으나, 밤에 걸었든 이 길은 길고 아득하기만 했었다.

같은 길도 오를 때와 내릴 때, 상황과 여건에 따라 낮과 밤처럼 달라지는 것이었다.

세상살이가 또한 그러한 듯하다고 느꼈고, 그러했다.

고도가 조금 높아지자 눈 쌓인 길이 다가왔다.

내리고 있는 첫눈을 본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올해 첫눈을 맞이한 것이다.

사진을 찍고, 뛰고 눕고, 산길이 소란스러울 만큼 장난질이 난무했다.

이럴 때 어김없이 다 같이 내뱉는 말은

아, 좋다! 였다.

산의 아랫도리는 아직 가을을 벗어나지 않았는데, 위쪽은 겨울이 폭삭 내려앉은 기이함으로 오히려 모두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은의 님의 모습에서 '사랑은 뿌리를 다칠까 봐 삽질을 그만두고 손톱이 닳도록...'이라는

다 기억나지 않는 시(詩)의 한 부분이 자꾸 뱅뱅 거리며 머릿속에서 부유했다.

그래서 나중에 찾아보았더니 이것이었다.

 

생명에 물을 주듯 -이 생진 -

 

꽃을 꺾어 꽃병에 꽂아 놓고

뿌리를 달고 있을 때보다

더 오래 살아달라고

빌고 있는 사람은 아니겠지

 

생명은 생명이 눈을 뜰 때부터

그런 식으로 사랑받기를 싫어하는데

순이를 사랑할 때에도

그런 식으로 사랑해서는 안 되는데

더욱이 순이의 몸에 손을 댈 때에도

그런 식으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사랑이란 뿌리를 다칠까 봐

삽질을 그만두고

손톱이 닳도록

손을 어루만지는 거지

3

두 시간여 만에 벽소령 대피소에 올라섰다.

간식을 조금만 먹기로 하였으나, 한 병만 더, 딱 한 병만 더를 두어 번 했다.

배낭의 무게는 줄였으나 벌써부터 포만감에 허리가 접히지 않을 만큼 배가 불러왔다.

우리는 산행에 오지 못한 들풀님과 얼굴을 마주 보고 돌아가며 최첨단의 방식으로 소통했다.

서울과 지리산은 핸드폰 속에서 거리가 없는 동일 공간이었다.

식수를 채우려 물통을 들고 쳐다보니 예전에 없었든 대피소 식당칸 바로 옆 수도꼭지에서 식수가 꽐꽐 쏟아져 나왔다.

여덟 번에 걸쳐서 이어지는 길은 

그 길보다는 그 길로 올라서고 내려서는 길이 더 험하고 멀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처음 목적이 이어가는 길 전체가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길에 있는 능선과 계곡을 따라 오르고 내리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인 만큼 회차나 거리는 상관이 없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계곡을 오르고 어떤 능선으로 내려갈 수 있는가.

그것이 이 길을 걷게 된 이유임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충분히 충족되고 만족한 여덟 번째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삼각고지를 향해 주능선을 걸어 나갔다.

아주 간혹 마주오는 산꾼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눈이 제법 쌓였으나 미끄럽지 않아 걷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11월 첫눈을 밟고 걷는 지리산 길은 걷는 내내 환한 즐거움이었다.

설렘, 기대, 희망, 두려움은 첫눈을 밟고 서서 처음이라는 주제로 나눈 대화에서 나온 단어들이었다.

4

부자 바위를 앞에 두고 조망했다.

멀리서 바라보든 특이한 모습이 다른 각도로 가까이서 보니 이렇게 보이는 것이 상당한 흥밋거리로 이야기들이 많았다.

부지런히 걸어 부자 바위에서 배낭을 내렸다.

연하굴이라는 오래되어 퇴색한 글씨가 있는 암굴 안으로 기어이 은의님이 들어갔다.

영구 형님은 뒤쪽 어딘가를 통해 부자 바위로 올라 가보려 길을 찾아보고 있었고,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다는 결론만 내렸다.

1955년 구례의 연하반 산악회에서 지리산 등산로 개척 산행에 나서면서 이 부자 바위 아래에 있는 비박굴을

그들은 자신의 산악회 이름을 따서 '연하굴'이라 명명하고 흰색 페인트로 써놓았는데 지금은 아주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아래 사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65년에 촬영한 것이라고 한다.

계절마다 모든 풍경이 변한다.

상처를 품은 풍경이라 해도 봄과 가을이 다르듯 변하고 흘러가고 지나간다.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것을 놓쳤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놓친 것은 '지금 이 순간들'이다. 

지금 이 순간이 모여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되고 세월이 되는 자명함을 생각한다면 산에 들고,

산을 즐기는 이 순간이 나는 결코 약소할 수만 없는 행복이라 여겨졌다.

5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이제 주능선에서 길을 크게 꺾어 우측으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삼각고지가 그곳이었고, 지금 부터는 북쪽 능선을 타는 것이었다.

바람이 없고 편안하고 한적한 곳에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다.

규다가 그 입맛 당기는 불그스레한 40도가 넘는 홍주를 꺼내고 마개를 열었다. 

보혈이 되기를 바라는 그의 잔이 맑게 온 몸으로 금세 스며들며 뜨끈해졌다.

이 친구의 무거운 배낭에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홍어까지 홍주와 함께 환상적인 궁합을 맞추어 나왔다.

진수성찬의 점심은 또다시 만삭의 배를 안고 하산을 하게 만들었다.

 

중경팀과 힘든 산행을 하고 난 뒤 

질풍질경초(疾風知勁草)라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모진 바람이 불 때라야 강한 풀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왜 이런 길로 가는 것이냐 원망하거나 불만이 없었다.

힘들수록 서로를 먼저 챙기는 마음들에서 강한 사람들의 면모가 여지없이 발현되었고 빛났다.

인간의 정체성은 인간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경험상 가장 통절한 아픔이나, 가장 뜨거운 기쁨은 사람으로부터 왔었다고 기억된다.

내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가져다 써야 할 경우가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질풍질경초의 중경팀에게 그 말을 줄 것이다.

영원재까지 내려오는 길은 몇 번의 암릉과 로프 구간이 있어 걸음의 속도는 극히 느렸다.

맨 앞에서 뒷사람들이 로프를 잡고 발 디딜 공간이 미끄럽지 않도록 영구 형님은 손으로 낙엽을 쓸고 눈을 치우느라 손이 꽁꽁 얼어 호호 불었다.

나는 로프를 잡고 내려오는 경자 누님을 밑에서 잡아 주고 난 뒤 힘든지 물어보려든 말을 눌러 삼켜야 했다.

누님의 표정이 어찌나 환하든지, 이 순간을 마치 즐기고 있는 듯하였기 때문이다.

혼자서 야간 산행과 비박을 수시로 한 누님에게는 이런 산행은 껌이라는 듯 가볍고 가뿐해 보였다.

6

영원재에서 한 번을 망설였다.

영원재 영원사 구간으로 내려갈 것인지, 영원봉을 오르고 빗기재까지 갈 것인지 잠시 머뭇거렸다.

어차피 불을 밝히고 내려가야 할 거라면 조금 더 걷더라도 빗기재까지 진행하자는 말에

동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빗기재에서 영원봉으로 치고 오르는 동안 어둠은 빠르게 젖어들었다.

촛불을 훅 불어 끌 때처럼 어둠이 벼랑 간 툭 떨어졌다.

쉬지 않고 속력을 냈고, 땀이 쏟아졌다.

벌바위가 좌측에서 희미하게 지나가고 영원봉을 순식간에 넘었다.

어둠이 내린 미끄러운 산길은 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넘어지고 일어나고 걷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그때마다, 그 순간순간이 맹렬히 생명을 증거하고 있었다.

나는 이런 일련의 극한 상황이 왜 좋은지 모르지만,

살아있음을 확인시키고 살아야겠다는 굳건한 의식이 불끈해지는 것이 즐겁기까지 했다.

빗기재에 도착하고 후미를 기다려 모두 모였을 때 천천히 조심히 내려오라고 당부하고 

차를 가져오기 위해 영구 형님과 규다와 함께 먼저 내려갔다.

규다의 걸음이 얼마나 빠르던지 뒤 따르기에 숨이 찼다.

작전도로에서 차를 회수하고 규다와 영구 형이 영원사 주차장에서 모두를 태우고 내려왔다.

아침에 출발한 삼정 백두대간 표지석 앞에서 다시 모여 하산을 완료했다.

먼 길을 혼자 가야 하는 규다가 걱정이 되어 마천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엉덩방아로 산의 높이를 낮추려 애를 쓰다 못해 무릎까지 동원한 최여사가 식당 입구에서 나를 잡아끌었다.

오늘은 도저히 운전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나를 보고 술을 먹지 말라고 했다.

나에게 지리산 인문학과, 술과, 인간관계학을 가르쳐주신 산 나그네 선생님의 말씀을 빌자면

영험한 지리산을 다녀왔는데 어찌 맨 정신으로 집엘 간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래도 꾹 참았다, 입 맛만 다셨다.

형들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고문했지만 사대부 집안 자손답게 꼿꼿이 참으며 보수적 생활태도를 취했다. 

그 참, 사람이란 게 하지 말라고 하면 왜 그리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인지.

집에 도착해 냉장고를 뒤져 남아 있었든 두 병을 찾아냈다.

곯아떨어진 성 여사의 숨소리를 안주 삼아 아주 진보적으로 혼자 순식간에 달렸다.

역시나 빨리 마시면 빨리, 많이 마시면 많이 취하는 게 저 놈의 실체였다.

혼곤했다.

혼곤함으로 아득히 밀려오는 잠 속에서 나는 지리산을 다시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