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21.05.26 통신골

지리99 수야 2021. 10. 20. 23:09

통신골

 

행동팀126-지리99차

일시:2021년 5월 23일 (일요일)

산행자:연하,권영구,황순진,이광용,최정남,김은의,수야 (7명)

걸어간 길:중산리-칼바위- 유암폭포-통신골-천왕샘-천왕봉-로타리대피소-순두류

산행시간:07시 01분 ~17시 21분 (10시간 20분) 9.98km

2021-05-23 통신골.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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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이미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첫 버스가 출발했다. 다음 버스를 탈 확률도 그다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걸어서 갈까?" 나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버스를 타겠다는 의지가 모두 굳게 다문 입에서 견고해 보였다.

"천왕봉을 오르는 데는 꼭 이 길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러든지 말든지, 듣지 않겠다는 듯, 아니 못 들은 척, 시선들이 먼 곳에 있었다.

그래도, 그래서 더욱 계속 지껄였다.

통신골도 있는데...?"

이 한마디에 반응이 순식간에 온다. 눈빛들이 모두 나를 향한다.

"통신 고오 올~?. 콜!" "콜!"

"됏나?" 한 사람이 묻고 다섯 명이 대답한다 "됐다!"

긴 줄에서 여섯 명이 한꺼번에 빠져나와 산으로 걸어갔다.

오룩스 맵 트랙 기록 시작을 눌렀다. 7시였다.

천왕봉을 오르고 일출봉 능선에서 백운암으로 하산한다는 처음 계획은 계속 유효하였으나 아마도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다.

7시 33분, 고도 820m 칼바위에서 배낭을 내렸다.

걸음이 빠른 산꾼들 몇몇이 우리를 지나갔다.

반바지에 아주 작은 배낭 하나가 등짝에 딱 붙어 있는 그들은 산악 울트라 마라톤 글자를 붙이고 있었다.

휴식을 끝내고 일어날 때쯤, 아래서 걸어오는 한 산꾼을 바라보며 "저기 연하님 아니가?" 한다.

어라~ 이양반 좀 보소.

온다 간다 아무 말도 없더니 혼자 어딜 가다 멱살이 딱 잡혔을까.

엎어진 골로 올라 어디로 갈 생각이었다고 하였다.

혼자 엎어지지 말고 여기에 붙어라 한다.

이 양반 미지근한 식은 커피처럼 아무 말없이 실실 웃는다.

긍정이고, 대답이다.

이 넓은 지리산에서 이렇게 사전 교감 없이 우연히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연인가 인연인가에 대해 분분하였다.

산행은 여섯 명에서 일곱 명이 되었다.

산악 마라톤을 하는 앞서 간 사람들을 우리가 다시 앞질러 지나갔다.

통신골로 빠르게 들어가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유암 폭포에서는 선 채로 사진만 찍고 지나갔다.

통신골에 들어서고 배낭을 내리고 앉아서 쉬었다.

골은 제법 수량이 흘러 미끄러워 보였으나 보기와는 다르게 그렇게 미끄럽지는 않았다.

일 년에 한 번 꼴로 올라 본 길이지만 긴장감은 언제나 같았다.

작은 통신골을 버리고 계속 올랐다.

오랜만에 상봉에 올라보고 싶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상봉을 향해 찌르고 올랐다.

여러 차례 쉬었다.

스틱을 걷었다. 손과 발을 모두 이용해 오르는 걸음이 더욱 안정적이고 용이했다.

통신골을 혼자서 오르다 다리가 부러져 죽을 고생을 한 적이 있다는 광용 아우의 트라우마는

같이 함께 올라가는 과정에서 극복되는 것 같았다.

고도가 가파르게 상승한 뒤 돌아본 저쪽으로 연하봉과 일출봉 그 넘어 촛대봉이 무척 가까워 보였다.

 

드문드문 보이든 앵초가 위쪽으로 오를수록 점점 많이 보였다.

계획하지 않았든 통신골을 오게 되었고, 늦어서 보지 못할 줄 알았든 앵초까지 마주하게 되었다.

날씨는 또 왜 그리 청명하고 개운하도록 맑든지.

좋은 날이었다. 행운이라는 것은 이렇게 느닷없어야 한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좋은 일, 좋은 인연, 그래야 행운은 행운다운 것이다.

어디로 오를까 잠깐 고민하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따가운 시선들을 무시하고 오르기엔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남능 쪽 천왕샘 방향으로 나가기로 결정하고 빳빳해진 경사를 앞장서서 올랐다.

통신골 상부에서 바라보는 아래는 압도적이고 위엄 있는 기운이 철철 넘치는 것 같아서 언제나 좋았다.

5월의 마지막 햇살 아래 신록은 젊은 생기로 가득해 보였다.

주능선의 우뚝한 영봉들은 더없이 기운차고 힘이 넘쳐 보였다.

급경사로 곧게 선 마지막 비탈은 쉽사리 길을 내어 주지 않겠다는 듯이 험악하고 까칠하게 앙탈을 부렸다.

그래 그래야지, 그래야 통신골이고, 그 맛에 여기를 오는 것이니까.

누군가 앞서 간 발자국은 여러 군데 미끄러진 흔적으로 역력히 남아 있었다.

이 사람 고생깨나 했을 듯싶었다.

천왕봉과 주능선의 사람들이 빤히 바라다 보였다.

소소한 대화마저 가까이서 들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반야봉은 농익은 풍만함이 한층 더 한 것 같이 보였다.

내 눈에는 그리 보인다는 것이니, 시비는 말아 주셔라.

이쪽으로 와 본 적이 없는 몇 사람들은 눈 앞의 광경에 좋아서 날뛰었다.

연하 형님은 비박 터 전망대에서 천왕봉을 바로 쑤시고 오르고 싶어 하였으나, 만류하였다.

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것을 무시하고 오를 만큼 우리는 염치없고 싶지 않았다.

샘으로 내려가는 길은 공터 앞 절벽으로 길이 열려 있음을 알기에 먼저 내려섰다.

주등로에 나왔다.

사람들이 많았고, 사람들 틈에 썩여 상봉으로 걸었다.

천왕샘에서 물을 받았고, 나눠 마셨다.

지리산이 몸속 저 아래까지 스며들었다.

바위 맛이 난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것이 지리산 맛이라고 또 누군가 그랬다.

천왕봉 직전 계단을 오르고 있을 때 계단 저 위에서 한 무리의 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들이 가리키는 곳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향했다.

하늘에 그려진 선명한 무지개를 바라보며 탄성 소리는 릴레이가 되어 계속 아래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행운임에 틀림이 없다.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길게 여러 갈래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는 줄 서서 기다리는 게 싫다.

버스를 타기 위해 줄 서는 것도 싫어하는 나다.

빨리빨리 아무 데나 서시라 하고 한 장씩 마구잡이로 대충 찍고 '밥 먹으러 가자'라고 외쳤다.

남쪽으로 굽이쳐 흐르는 황금 능선과 여러 산맥들에 한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중봉과 초암 능선, 골짜기 곳곳은 안구를 시원스레 정화시켜 주었다.

천왕봉을 지나 칠선계곡에서 올라오는 쪽문 앞, 카메라 바로 아래에 교묘하고 대담하게 자리를 펼쳤다.

햇볕이 강렬하게 내려서 타프를 쳤다.

아침에 만났든 차림의 산악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갔다.

산악마라톤 대회 날이라고 하였다.

불쑥 물을 달라고 들이미는 사람에게 물도 주고 다른 것도 주었다.

산에서는 그리 되는 것인가 보다.

웬만하면 다 이해가 되고, 웬만하면 나누어 주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일출봉으로의 하산은 무산되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배낭 여기저기에서 나온 것들을 다 비우고 나자 의논할 것도 없이 착한 길로 가자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아침과 마찬가지로 누구 하나 불편한 기색 없이, 반대나 의의 없이 만장일치로.

코스를 변경하자 다시 시간이 넉넉해졌다.

천왕봉을 내려서고 휴식을 길게 했고 사진을 오랫동안 찍어 댔다.

배낭을 배고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는데

계속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참 좋다!.'

법계사를 지나고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고 한 두어 번 쉬면서 순두류까지 꾸준히 걸어 내려왔다.

제일 먼저 내려온 우리는 한참을 기다려 버스에 올랐다.

출발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몇 사람이 거의 다 와 간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먼저 내려온 사람이 부탁을 했다.

기사님은 전화 해 보라며 재촉하였으나 승객들은 괜찮다며 기다려 주었다.

산에서는 웬만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

그리 많이 삐딱한 놈만 아니라면 말이다.

웬만하면 웃어지는 게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더라.

 

모든 행복한 사람들의 이유는 비슷 하지만,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저마다 제 각각이라 한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복한 이유는, 그것 하나 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만족이다.

반면 이것 때문에, 저것만 아니면, 이 사람 때문에, 저 사람만 아니면, 등등 불행의 이유는 수없이 많고 제각각이라는 거다.

불행은 하나만 부족해도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불만족이다.

산행 후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월요일 아침 화장실에서 나올 때, 그 완전한 공복 하나 만으로도 나의 만족은 넘친다.

살면서 나 스스로 만든 삶의 찌꺼기들이 그 순간만큼은 말끔히 정리된 것 같이 느껴지곤 한다.

적당히 뻐근하고 묵직한 몸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기분을 더 좋게 하는 산행 후의 일상.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질 때가 있다.

마음을 비우면 몸도 반응하는 것인가 보더라.

지리산을 다녀오고 나면 웬만한 것에는 관대해지고, 웬만한 놈은 다 용서가 된다.

단,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