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6 함양독바위
함양 독바위
독오당 109차 정기산행
일시:2020년 12월 6일 (일요일)
산행자:에스테야, 귀소본능, 수야, 황순진, 김은의 (5명)
걸어간 길: 적조암- 노장대동-환희대-선열암-유슬이굴-선녀굴-의론대-고열암-신열암-함양독바위-안락문-오뚝이바위-군계능선-
배틀재-공개바위-천상바위-거머리재 갈림-임도
산행시간:07시 49분~16시 21분 (8시간 31분) 9.7km
07시 20분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렸다.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를 읽고 알게 된 곳이다.
점필재는 1471년 (성종 2년)부터 1475년(성종 6)까지 함양군수로 재임했다.
함양군민이 공물(貢物)로 바치는 차(茶)가 지역 내에는 생산되지 않는데,
비해 조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다른 지역에서 쌀 한 말에 차 한 홉을 바꾸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828년(흥덕왕 3)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廉)이 차나무를 가져와서 지리산에 심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확인했다.
함양의 어느 깊은 골짜기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여 나이 든 사람들에게 찾아보게 하였더니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에서 두어 그루를 발견했다.
일대를 차밭(茶園)으로 만들고, 부근의 땅을 사들여 차를 재배했다.
이 차밭이 관이 주도하여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관영(官營) 다원이다.
중국의 황실이 필요한 차를 조달하기 위해 직접 다원을 조성하는 사례가 있고 그 일은 지배층의 기호품을 생산하기 위한 것인데 비해
함양의 차밭은 백성들의 차 공물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조성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07시 40분
적조암에 주차 한 다섯 명이 산행 채비를 서둘러했다.
사람 그림자 조차 하나 없는 넓은 주차장을 출발하여 조금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차 안에 있다가 차문을 열고 나오니 지리산 자락 차가운 공기는
겨울날 소변을 보고 난 뒤 진절머리를 치듯 온 몸을 떨리게 했기 때문이다.
이미 환하게 밝아 버린 하늘엔 아직도 달이 선명하게 걸려있었다.
호기심 많은 은의님과 에스테야 형님은 적조암 경내를 들렸다 나왔다.
마지막 민가 작업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드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난로의 연통에서 피어 나오는 연기가 보기에 훈훈하게 느껴졌다.
작업장 바로 옆 좁은 길을 지나고 얼마 걷지 않아 본격적인 산길이 나타났다.
이곳은 이번이 세 번인지 네 번째 인지 올라가게 되는 길이다.
07시 48분
주능선 이외의 지리산은 지리산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에스테야 형님은 이번에도 천왕봉과 중봉을 이야기했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귀소본능이 이 코스를 제안 하자 선뜻 마음을 바꾸었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라 좋다고 하였다.
독오당 정기 산행일을 알고 있는 순진 형님과 은의 님이 동행하고 싶다고 전해왔다.
이럴 때면 독오당은 언제나 하는 말이 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08시 40분
예전 공비 모형의 마네킹이 있었든 산죽 비트를 순식간에 지나고 지장사 터 포인트가 되는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지장사 터는 다음에 유두류록 길을 따라 걷게 되면 가기로 하고 지나가기로 했다.
참나무에 자생하는 겨우살이는 흔히 보았지만 돌배나무에 겨우살이는 처음이라며 모두들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노장대동 마을터 주변에서 완만하고 약간 평탄하든 길이 조금씩 경사를 세우고 있었다.
두 겹으로 낀 장갑을 하나는 벗어 배낭에 넣었다.
손끝이 시리든 것에서 벗어나 열이 오르며 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09시 02분
이곳에도 예전에 마네킹과 함께 바위 비트 표지판이 있었든 것이 생각나 본능에게 물었더니
본능도 그랬든 것 같다고 하였다.
09시 09분
배낭을 내리고 모두 환희대에 올라갔다.
아직도 달이 그 빛을 잃지 않고 남아 있었고, 역광의 실루엣이 좋다는 본능의 지시에 따라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부부는 게슴츠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손을 맞잡고 포즈를 자연스럽게 잡기도 하였다.
600년 전 지장사와 노장대동을 거처 이곳 환희대에 올라선 점필재도 이런 풍경을 마주하셨다.
삼봉산 등구재 백운산 금대산이 서북능선 앞에 산줄기를 이루었고, 바로 앞 엔 법화산이 있었다.
환희대 아래로 함양 독바위 부근에서 분기하여 내려오는 황새날등이 능선을 내리고 있었다.
황새가 비상하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09시 42분
환희대를 지나고 황새날등을 타고 계속 진행하다가 선열암 터로 들어갔다.
너들 지대를 따라 사면을 조심스럽게 들어가면 거대한 바위들이 보이고 곧 선열암 터가 나타났다.
선열암 터 들어가는 길 바위 아래에는 고드름이 솟구쳐 얼어 있었다.
선열암 터에 대해서는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를 읽어 보면 자세히 알 수 있겠다.
선열암에서 과일을 나누어 먹었다.
잠시 쉬는 사이 은의님은 바위 위에 올라가 아래의 우리들을 불러 사진을 찍었다.
병풍처럼 바위로 둘러 쌓여 바람이 막혀 안온함이 느껴져서 인지 순진 형님은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이라 했다.
10시 17분
선열암에서 다시 돌아 나와 유슬이굴로 향했다.
굴 안과 바깥에서 서로 마주 보며 사진을 찍어 댓다.
유슬이굴 까지는 길이 반들반들하게 나 있었다.
유슬이 굴에서 선녀굴 사거리까지 나오는 길은 사면을 따라 지 마음대로 길이 나있었다.
여러 사람이 각자 쉬운대로 능선을 향해 올라가다 보니 여러 곳에 표지기가 널려 있었다.
제법 힘을 주고 난 후 선녀굴 사거리에 도착했고 배낭을 벗어 둔 체 지척에 있는 선녀굴로 내려갔다.
10시 50분
선녀굴에는 먼저 와 있는 산꾼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여 머뭇머뭇하다가 어색한 인사를 했다.
나중에 이분들은 간격을 두고 우리와 같은 코스를 계속 걸었다.
송대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고 했다.
<김종직 유두류록 탐구>에서 가객님은 승려 우타가 이곳 선녀굴에서 기거한 것이 아닐까 추정했다.
선녀굴은 지리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과 이홍이 이은조가 숨어 지내다 발각되어 이은조가 사살된 곳이다.
정순덕과 이홍이는 내원골 안내원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이홍이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었다.
1963년으로 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벌어진 일이다.
11시 19분
선녀굴에서 다시 돌아 나와 능선을 숨차게 올라 의론대에 올랐다.
의론대는 승려 해공이 점필재 선생께 말하기를
[절벽 아래 석굴이 있어 노숙(老宿) 우타가 그곳에 기거하면서 일찍이 삼열 승(선열암,신열암,고열암의 승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소승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의론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하였다.
이곳에서는 함양 독바위와 건너편 상내봉(부처바위, 미타봉)이 훤히 보인다.
의론대에서 바라본 함양 독바위 (독녀암)
일반적으로 동부능선 산청 독바위와 구분하기 위하여 함양 독바위로 불려지고 있다.
선녀굴에서 만났든 사람들이 올라오고 우리는 고열암과 독바위를 향해 다시 올라갔다.
의론대에서 바라본 법화산 자락과 그 뒤 삼봉산, 음달골 좌우의 황새날등과 상대날등
의론대에서 지척의 거리인 고열암
점필재 선생이 지리산 등정 첫날밤을 보낸 곳이다.
11시 37분
독바위 방향을 향해 가다 우측의 신열암 터에도 들어갔다.
우리 뒤를 금방 쫓아오는 선녀굴에서의 산꾼들이 따라 도착하였다.
신열암 터에서 나오는 길은 들어간 곳으로 다시 나오면 등산로이지만 조금이라도 질러가려고
저렇게들 바위 위에서 뛰어내리기도 하였다.
11시 45분
함양 독바위에는 순진 형님과 은의님이 올라갔다고 하였다.
오래전 올라 본 적이 있는 나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고, 배낭을 멘 체로 입구에서 다녀올 때까지 기다렸다.
에스테야 형님은 절대 올라갈 수 없을 것이라 미리 짐작하고 있었지만, 용감하게 배낭을 벗길래 위험하니 그러지 말라고 말하였다.
올라가 볼 생각도 없었겠지만 형님에게 그래도 미리 만류하는 척 그리 말하였다.
뒤 따라온 산꾼들은 쉽게 잘 올라갔고 바위 위에서 한동안 시끄러웠다.
에스테야 형이 저 사람들, 보통 산꾼이 아니라고, 여자들이 저런 곳을 겁도 없이 아주 쉽게 잘 올라가더라고 했다.
11시 59분
독바위를 지나 안락문으로 갔다.
에스테야 형님은 오늘 아침 이곳으로 산행지가 정해 질 때 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곳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런데 함양 독바위는 와 본 적이 있다고 우기기 시작했다.
말을 자세히 들어 보니 함양 독바위가 아니라 산청 독바위를 말하고 있었다.
이런 걸 그냥 넘어갈 내가 아니지 않은가.
이후 한동안 형님은 말이 별로 없었다 아마도 내게 반격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뭐, 사실 의론대에서 장갑 사건도 있긴 한데 형님이 그것만은 산행기에 쓰지 말아 달라고
하도 간곡하고 애처롭게 말하였기에 생략하기로 하겠다.
어쩌면 여태 산행기가 안 올라오니 아주 마음 편하게 살고 계시다가 이 글을 보게 되면서 그 사건을 까발리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할 것 같아 차마 그 사건은 밝힐 수가 없더라.
안락문을 지나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낙엽이 저렇게 무릎까지 쌓여있었다.
12시 27분
상내봉 삼거리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로 하였으나 귀소본능은 군계능선 들머리에서 같이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일명 오뚝이 바위에서 우리들도 되돌아 군계능선으로 향했다.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를 이루는 군계능선으로 들어 서고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었다.
밥 먹는 시간은 느긋하였고 오래 걸렸다.
순진 형님이 가져온 병을 다 비웠고, 그렇게 만류하였음에도 끝끝내 한가득 들고 온
에스테야 형님의 고기는 다시 짊어지고 내려가야 했다.
내려가는 길 저 앞으로 왕산과 필봉이 나뭇가지 사이로 엿보이고 바람재와 이어지는 641봉이 우측으로 다가와 있었다.
지리산 둘레길 5코스 동강 수철 구간이 지나가는 곳이다.
저 아래 오봉으로 가는 길에는 산청 함양 양민학살사건 추모 공원이 있는 곳이다.
14시 20분
14시 50분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것이 귀찮아진 나는 언덕 위에서 누워 버렸고 나머지는 배낭을 벗어 두고 공개 바위를 보러 내려갔다.
눈을 감고 가만 누워 있는 동안 춥지 않은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기분을 참 좋게 하였다.
아마도 점심에 마신 마법 같은 그것이 이제야 제대로 몸에 퍼져 가고 있어서 일 게다.
일행이 오기만 기다고 있을 때 저 밑에서 낙엽을 밟으며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떤 시(詩)의 일부분이 생각났는데 제목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그들이 다 올라올 때쯤 번뜩 <황지우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생각났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이 카면서
내가 그렇게 기다렸노라고, 그런 심정으로 기다렸노라 말하려 했는데 이 분들 전혀 감동이 없었겠다.
우리가 다시 출발을 하려고 할 때 선녀굴에서의 그분들이 도착하였다.
자꾸 만나다가 보니 이제는 서로 조금은 편안해져 갔다.
이 이후 이분들은 만나지 못하였다.
15시 11분
조망처에 서서 휴식을 한 후 본격적인 하산을 서둘렀다.
16시 21분
쉬지 않고 내려온 걸음은 환쟁이골까지 가지 않고 귀소본능의 뒤를 따라 바로 임도에 내려섰다.
진지밭골 입구 임도로 내려서고 순진 형님이 차를 회수하러 간 사이 배낭을 뒤집어 털고 옷을 털어 냈다.
배낭에서는 낙엽이 한 움큼씩 쏟아져 나왔다.
운서마을 가객님 집 앞을 차가 지나치려는 순간 때마침 가객님이 집 안에서 나오시다 마주쳤다.
아무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찾아뵙는다는 것이 민망하고 망설여져 머뭇거렸는데 나무라시며 반갑게 맞아 주셨다.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는 동안 산유화 누님 일행도 적조암 부근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우연히 만나는 이런 만남이 참 반갑다.
소나타님과 지인분들, 조미원의 조 사장님과 산유화 누님도 우리와 비슷한 코스로 산행을 하고 내려왔다고 하였다.
산행기에 산유화 누님이 만났든 이야기를 꼭 쓰라며 사진까지 찍어 주셨기에
이 산행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났지만....
11명이 모여 앉았으나 술은 세 명이 다 마셨다.
예전 독오당 당수님께서는 하산 후 그렇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지리산을 갔다 왔는데 술 한잔 없이 어찌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가.
오늘도 나는 좋은 핑곗거리로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를 성실히 이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