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1 길섶(매동마을-창원마을)
지리산 둘레길 (매동마을-창원마을)
독오당 108차 정기산행
일시:2020년 11월 1일
산행자:에스테야,귀소본능,수야, 황순진,김은의 (5명)
산행시간:08시 ~12시 51분 (04시간 50분) 9.1km
달리는 차창으로 빗방울 떨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에스테야 형님은 첫째 주 일요일에는 항상 비가 온다는 논리로 산행 날짜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형님의 말에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내가 맞섰다.
명마가 더 넓은 광야를 달리기 위해서는 마구간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하였거늘. 그 참
드디어 둘이 만난 것이 실감 난다며 다른 이들은 우리 둘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즐겼다.
명선북능 중허리 길을 돌아 뱀사골로 하산할 계획은 달리는 차 안에서 변경되었다.
여러 코스가 거론되었고, 귀소본능이 제안한 둘레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인월에서 아침을 먹고 매동마을로 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차 밖으로 선뜻 내리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사그라들게 했다.
차 안에 잠시 앉아 있는 동안 비는 잦아들었다.
배낭은 하나만 가져가기로 했다.
에스테야 형님은 솔선하여 배낭을 메고 앞장을 섰다.
역시, 형님은 형님다웠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에서 08시 부터 걷기 시작하였다.
마을회관에서 걷기 시작하여 천천히 오르는 동안 비는 더 이상 내릴 기세를 잃어버린 듯했다.
구름이 낮게 깔린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졌고, 우리는 그 그림 같은 세상에 몰입되어 흠뻑 취한 것처럼 젖어버렸다.
서진암 갈림길 앞에 누군가가 작품 만들어 놓았다.
심지어 멋지기까지 했다.
이 길을 여러 번 걸었다.
좌측으로도 우측으로도
은의님은 눈 오는 날 강아지 뛰어다니듯 저만큼 앞서 뛰어갔다 뒤로 돌아오기도 하며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였다.
이거 보세요 저거 보세요. 어린애 마냥 신기한 것 투성인 모양이다.
비 온다는 핑계로 산행을 포기했다면 크게 실망했을게 분명해 보였다.
저 서어나무는 이제 완전히 삭아 내리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근육질의 단단함이 그래도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데.
2011년 같은 자리
길섶으로 가는 길,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기로 했다.
시간은 넉넉하였고, 가야 할 길은 바쁘지 않았다.
길에 아직도 간간히 피어 있는 구절초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향을 맡아보기도 했다.
때마침 걷히는 듯 맑아오든 날씨가 다시 흐려졌다.
그로 인해 숲 사이로 안개가 내리면서 몽롱한 꿈속을 걷는 듯 분위기는 몽한적으로 연출되었다.
여유로운 마음은 걸음을 가볍게 하였고, 작은 사물도 자세히 관찰하는 밝은 눈을 갖게도 하였다.
길섶은 지리 99에서 <우리 산하>라는 닉네임으로 있는 강병규 님이 운영하는 곳이다.
인사를 나누고 비 오는 날 유독 짙게 깔리는 향기로운 커피잔을 놓고 같이 앉았다.
지리산 사진작가로 널리 알려진 강병규 님은 방송이며, 인터넷이며 책이며 하도 유명한 분이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아시니 더 이상 부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의 미소 가득한 표정은 마냥 넉넉하고 여유로워 그야말로 마냥 좋은 사람 그 자체였다.
길섶에는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코로나 19 이후 이곳은 가족단위의 손님이 오히려 더 많다고 한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주말이나 연말에는 이곳에서 지낼 볼 방법이 없다.
강병규 님이 길섶의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셨다.
직접 만든 전망대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사방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밤하늘과 여명을 다 보고 싶다는 욕심이 나만 생긴 건 아니었든 모양이었다.
중경팀들과 언제 꼭 한번 그리 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는 사이 은의님은 강병규 님의 책과 꽃차를 사고, 사인을 받고 있었다.
<지리산 감성여행> 책 한 권과 구절초 꽃차를 내게도 안겨 주었다.
끝끝내 커피값 조차 받지 않는 길섶을 돌아 나와 둘레길에 다시 올랐다.
카메라 앞에 잘 서지 않는 본능이 이곳에서는 자진하여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였다.
소공연이나 강연 모임 등을 하기에 적절한 공연장
흐린 날씨 탓에 주능선의 상봉이 잠시 까무룩 숨겨져 있지만 포토존 뒤 배경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귀소본능과 강병규 님
길섶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눈길이 닿는 곳 그곳이 모두 환상적인 작품 같았다.
아름답다, 좋다!
여기 들어오기를 잘했다.
근처를 지날 때마다 분명 다시 기억이 날 곳이었다.
내년 산정무한에서는 강병규 님을 반갑게 만날 수 있길 서로 인사했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이 길은 이제 거의 다 기억할 만큼 몇 번을 걸었든 길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과 새롭게 들어선 건물들은 낯선 느낌을 주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느낌과는 또 다른 생경함이었다.
등구재에 올랐다.
전라북도에서 경상남도로 넘어갔다.
등구재를 올라서면서 예전 이야기를 했다.
2011년 등구재 바로 밑에 있었든 오도사
어깨가 아픈 분은 종을 치라고 적혀 있고, 당시 어깨가 많이 아팠든 귀소본능이 종을 쳤다.
오도사에게 침을 맞고 난 뒤 귀소본능은 아픈 어깨가 나았다고 지금도 주장한다.
침 잘 놓는다고 만방에 소문이 자자한 4대째 명의 에스테야 형님 앞에서 말이지.
2011년 당시 사진
등구재에서 에스테야 형님 혼자 무겁게 매고 온 배낭을 내렸다.
우리 중 가장 어른인데 이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도 무사한 것은 결단코 산행은 나이순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중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에스테야 형님이 가장 건전하고 건강하고 단단하기 때문이었다.
비실비실한 아우들이 배낭을 메고 낑낑대는 모습은 차마 가슴이 아파 볼 수가 없다며
형님이 꼭 자기가 매고 가겠다는 의지가 하도 강력하였기에 차마 말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어찌 내가 이 형님을 신뢰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신뢰는 상대방이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라 했거등.
아무튼, 막걸리에 바나나, 빵과 간식을 들어낸 그 배낭도 당연히 형님은 아우들에게 넘겨주질 않는
훌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끝까지 계속 이어 하시었다.
나무들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 있는 길을 걷고 단풍이 떨어져 꽃길이 펼쳐진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나는 지금 이 느낌에 딱 맞는 그 단어를 기억해 내느라 머릿속이 앵앵거렸다.
왜 한 번씩 이렇게 단어나 사물의 이름 따위가 뱅뱅 돌면서 떠오르지 않는지 환장할 노릇이다.
장자가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다 꿈에서 깨어, 나비가 꿈을 꾼 것인지 자기가 꿈을 꾼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그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드디어 기억해 낸 그 고사성어
<호접지몽>을 말하려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고 보니 이 사람들
저만큼 앞에서 그딴 거 전혀 관심 없다는 듯 걸어가고 있었다.
좀 잘난 척할 수 있었는데......
이런 말도 뒤늦게 생각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12시 51분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시간은 아직도 많이 남아 여유 있었지만 걸음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남은 시간은 달리 사용하기로 했다.
딱 안녕하기 좋을 만큼 걸어왔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밀도 높고 농도 짙은 가을 정취를 만끽하였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걸음은 사는데 별 필요도 없는 쓸데없는 잡념들을 거세하여
마음마저 한결 가볍게 하였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자 나훈아의 홍시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세상에는 시간을 쏟아 사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사랑하면 비로소 다가오는 것들이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