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 대륙폭포골
대륙폭포골
행동팀85-지리64차
일시:2019년 7월 21일 (일요일)
산행자: 연하, 노을, 예서방, 산친구, 최정남, 황순진, 김은의, 최규다, 들풀, 성주숙, 수야 (총 11명)
걸어간 길: 추성 주차장- 두지터- 선녀탕-비선담-칠선폭-대륙폭-대륙폭포골-하봉헬기장-하봉-영랑대-초암능선-추성
산행시간: 이른 시간 시작해서 아주 늦은 시간 까지, 오룩스 기준(18km)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간 추성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동안 간간히 내리든 약한 빗방울은 멈추는 듯합니다.
우리가 도착하고 바로 규다와 들풀님도 연이어 도착합니다.
은의님이 준비한 정성이 가득한 김밥 한 줄씩을 먹고 산행을 준비합니다.
감당하겠다 각오한 산행이라 그런지 내리는 비와 상관없이 다들 칠선을 가겠다는 의지가 단단합니다.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나고 산하는 씻겨진 싱그러움으로 깨어납니다.
세상이 밝아오는 시간 칠선을 향해 11명은 걷기 시작합니다.
두지터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하고 벌써부터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듭니다.
고개 하나를 넘어서며 앞사람은 멈춰 서서 뒤 사람과 간격을 맞추어 줍니다.
부슬부슬 내리든 비는 이지점에서 본격적으로 내릴 모양으로 우두둑 소리를 내더니 곧 또다시 잦아듭니다.
물 한 바가지를 시원하게 마십니다.
계속 비가 내리면 어느 정도에서 산행은 멈추고 하산을 해야겠지요.
일단 비선담까지만 가 보기로 합니다.
두지터는 옛날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신라군에 쫓겨 인근의 국골로 피난했을 때
군량미를 쌓아두는 창고로 쓰였던 곳으로 쌀을 담아두는 기구인 "두지"에서 유래된 지명이라 설명을 해 줍니다.
제 딴에는 멋있게 설명을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멋있는 설명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비에 젖어나 땀에 젖어나 매 한 가지라 배낭 커버만 하고 걷습니다.
이때쯤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여름에 비가 내릴 때 처음에는 비에 젖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비를 조금 맞고 나면 그냥 비를 맞는 게 편하더라
세상사 처음이 어렵고 망설여지고 힘든 법이지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한 번 해 보면
두 번째 세 번째는 처음보다 훨씬 쉬워지는 법이더라.
그래서 처음 용기를 내는 일이, 시작해 보는 것이 중요 한 법이다.
말을 해 놓고 스스로도 멋있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반응은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대답 조차도 없습니다.
선녀탕을 지나갑니다.
옛날 일곱 선녀가 내려와 이곳에서 목욕을 하는데
이것을 훔쳐본 곰이 선녀의 옷을 훔쳐 버린다.
목욕 후 옷을 찾아 헤매는 선녀에게 사슴이 자신의 뿔에 걸려 있는 옷을 갖다 주어
선녀들은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후 선녀들의 옷을 나뭇가지인 줄 알고 사슴뿔에 걸어 둔 곰은 옆 국골로 쫓겨가고
사슴은 칠선계곡에 살게 되었다는 전설도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이 정도면 거의 칠선계곡 탐방 해설가 수준이다 카면서 막 그래야 되는데 아무도 안 그럽니다.
이 과묵하기가 짝이 없는 사람들.
선녀탕을 돌아서자 조금 위 옥녀탕을 지나게 됩니다.
왜 옥녀탕일까요?
선녀와 옥녀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출렁다리를 지나옵니다.
비는 더 이상 내릴 것 같지 않습니다.
배낭도 없이 우리를 앞질러 올라간 한 사람이 겁을 먹고 출렁다리를 조심조심 건너오는
우리 일행들이 다 지나오도록 기다려 줍니다.
뒤돌아서서 지나 온 출렁다리 비선교를 내려다봅니다.
출발할 때 몸 상태가 좋지 않았든 규다가 서서히 몸이 풀리고 회복이 되어 다행입니다.
이번 산행에 같이 하기 위해 멀리도 달려왔습니다.
오늘이 생일이란 걸 산행 중에 알았고
내려와서 생일 축하주라도 한 잔 하자 했지요.
결국 이루지 못한 일이 되었고 생일날 빡씬 치열한 산행만 하게 됩니다.
비선담 위 개방구간 끝부분 통제소에 닿습니다.
이 곳을 지나가 본 기억이 참으로 오래되었습니다 그것도 딱 한 번이었습니다.
흐르는 땀으로 샤워를 하는 것 같은 더위가 계곡의 물소리에 그나마 조금은 시원해지는 것 같습니다.
근처 목기막터에서 목기를 만들며 이곳을 임시 거소로 활용하며
청춘이 다 간다는 한탄을 했다는 애잔한 사연이 있는 청춘홀을 지나갑니다.
백무동에서 창암 사거리를 넘어 도착했든 지난번 산행에 이어 다시 칠선폭포 앞에 섭니다.
비가 내려 지난번보다 더 많은 수량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 친구 무뚝뚝한 저와 어울려 놀더니 저를 닮아 가는지 들풀님은 안중에도 없고 혼자 먼저 저곳에 서 있네요.
처음 규다와 산행을 하고 난 뒤 이 동네 여인네들이 나보고 그랬거든요.
저 정도 다정한 남자가 되어야 한다 본 좀 받아라고.
하긴, 산행 중에 살짝살짝 살펴보면 그런 말을 할 만 하긴 합니다.
나보다 더 치명적 매력을 가진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단체로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이고 보니 열 명도 작은 인원은 아니군요.
대륙폭포를 향해 또 올라갑니다.
대륙폭포는 1964년 부산의 산악인 20여 명이 등반로 개척 및 학술조사를 하며 발견하여
산악회 이름을 붙여 대륙폭포라 한다고 합니다.
대륙폭포에서 배낭을 내립니다.
예서방의 등산화 밑창이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산행이 불가합니다.
팀장님과 예서방은 여기서 하산을 결정합니다.
헤어지기 전 내려갈 사람도, 올라갈 사람도 미리 체력 안배를 위해, 그리고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배를 채우기로 합니다.
그리고 팀장님과 예서방이 내려가고 이제 9명이 대륙폭포골을 올라갑니다.
대륙폭포를 넘어 더 깊이 들어갑니다.
폭포 옆 급경사 사이로 길을 찾아 넘어갑니다.
비가 내렸다가 멈추고 햇볕이 비추는가 싶다가 흐려지고
날씨는 변덕스럽게 짧은 시간 사이에도 여러 번 변화를 합니다.
계곡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학병을 피해 이곳에 들어와 은둔을 했든 사람들
보광당, 하준수(남도부), 이병주의 지리산에는 하준규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
징병을 피해 입산한 학생들이 빨치산 전사로 변신하는 과정
칠선계곡 입구 벽송사를 주요 무대로 한 남도부 대원들의 투쟁과 천왕봉 봉기
소설 <지리산>에서 하준규가 은빛 강물을 보며 한 말.
"우리에겐 조국이 없다.
다만 산하만 있을 뿐이다."
칠선계곡을 오르며 잠시 그런 대목이 떠올라 곁에 누군가에게 한참을 말한 것 같은데
정작 대답도 없이 듣기만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누구냐 너는?
대륙폭포를 지나 넓은 바위 위에서 늦은 아침을 먹습니다.
날씨가 다행히 맑아진 탓에 느긋하게 다리를 뻗고 편히 쉽니다.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씩을 들고 너무 느긋하게 쉬어 버립니다
바위 채송화
또다시 앞으로만 뻗어 있는 계곡을 올라갑니다.
아침에 연하 형님이 계곡을 건너는 다리에서 엎드려 삼배를 올리며 아주 큰소리로
아무도 다치는 사람 없이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치게 해 주십사 그렇게 빌더니
오늘은 그 효험이 있는 날인가 싶습니다.
단단히 마음을 먹은 탓인지 모두들 잘 오르고 힘도 넘칩니다.
이 사람들 겁 없음이 겁날 정도로 겁 없이 무작정 올라가는 일에만 열중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아득하게 생각지 않고 명징한 마음으로 올랐다가 내려가면 된다는 단순한 정답만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가 보지 않았기에 그런 마음일 겁니다.
모르면 차라리 좋을 때도 있는 게지요.
맨 앞서 걷고 있을 때 작은 독사 한 마리가 버티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칠선계곡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댈게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오기 전 치워야겠다 싶어 스틱으로 걸어 던졌는데 뱀이 날아간 곳에
언제 왔는지 연하 형님이 서 있습니다.
얼굴 아래로 날아오는 뱀을 그대로 몸으로 받은 형님은 한참 후에야 그게 뱀인 줄을 알아봅니다.
계속되는 무명 폭포들을 감상하고 여유도 부리며 오릅니다.
저렇게 하는 게 원래 이 친구의 본모습이 맞습니다.
폭포를 바로 오르지 못하면 우회하고
급경사의 산길이 막히면 계곡을 치고 오르며 고도를 계속 높여갑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들풀님이 자주 앞에 섭니다.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성큼성큼 계곡을 잘 치고 오릅니다.
미끄러운 폭포는 규다가 먼저 올라서서 로프로 사람들을 잡아 올리길 몇 번 합니다.
손으로 잡아 이끌고 로프로 또다시 올려주고
때론 뒤에서 남기고 올라 간 사람들의 스틱을 몽땅 모아서 가져가기도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것이든 얻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이 훨씬 큽니다.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인연들입니다.
이제 저 위 하늘이 조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봉 헬기장으로 오르는 구간에 도착합니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즐기는 시간이었습니다.
초암능선 촛대바위 방향으로 오를 수 있는 위치에서 잠시 의논을 했었고 어차피 마음먹은 거 끝까지
갈 때까지 가보자고 일치된 합의를 했기에 늦더라도 하봉 헬기장에 올라서서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감당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멋있는 말을 제가 했을 리는 없고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그런 대목이 있습니다.
하봉 헬기장으로 오릅니다.
이 길이 오늘 코스 중 최고의 난관입니다.
계곡에는 우거진 잡목과 쓰러진 나무들로 길은 전혀 없습니다.
계곡 옆으로 겨우 겨우 길을 만들어 기어오릅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참으로 진땀을 흘리게 하는 구간입니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을 빼게 합니다.
긴 설명 없이도 짐작이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빨치 중에도 일급 왕 빨치로 기어올라갑니다.
힘겹게 하봉 헬기장에 올라섭니다.
바지까지 땀으로 흠뻑 젖고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예상시간을 훌쩍 넘어 버렸습니다.
팀장님이 주고 간 간식과 과일, 떡을 먹습니다.
먹는 게 아니라 그냥 밀어 넘겼다는 표현이 맞겠습니다.
무겁게 지고 온 점심밥 준비물들은 그대로 지고 갑니다.
배낭의 무게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래서 계속 무겁게 어깨를 짓누릅니다.
하산 후에 보니 순진 형님의 어깨는 배낭끈이 닿은 부분이 다 까져서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주능선 길을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걷기로 합니다.
빨치를 두 시간 넘게 한 탓에 이런 길은 식은 죽 먹기라며
이런 길이라면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 같다고들 합니다.
하봉에 잠깐 섰다가 빠르게 내려 영랑대를 오릅니다.
영랑대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올랐는데 정작 네 사람만 올랐습니다.
나머지는 초암능선 들머리로 내려서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름 가득했든 천지가 우리가 서자 잠시 잠깐 아래 모습을 열어줍니다.
내려갈 초암 능선입니다.
두류봉 방향의 하늘은 열리지 않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국골도 잠시 보입니다.
상봉 방향이 열리길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영랑대를 내려갑니다.
초암 능선 하산길로 진입합니다.
본격적인 하산 시간입니다.
생각보다 많이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어차피 렌턴을 켜고 내려갈 마음으로 올랐으니 내려가면 됩니다.
아래에서 위로 불어오는 바람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잠시 몸을 식히고 내려갑니다.
쉽지 않은 하산길
만만하지 않은 초암 능선은 몇 군데 로프 구간과 헛갈리는 길로 걸음을 더욱 느리게 합니다.
스스로 올라 온 길 스스로 내려가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삶과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몸이 지치면서 쉬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먹어야 갈 수 있다 먹었고.
쉬어야 갈 수 있다 쉬었습니다.
렌턴을 미리 꺼내고 준비를 합니다.
사진은 여기 촛대바위까지 입니다.
어둠은 가차 없고 빈틈없이 빠르게 내립니다.
자주 길을 놓칩니다.
시간이 흐르고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속도는 더욱 줄어들고 후미와 간격이 자주 벌어집니다.
미끄러운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고 땀은 쉴세 없이 흐르고 체력은 점점 떨어집니다.
아래에서 기다리는 팀장님은 팀장님대로 조바심에 계속 전화가 옵니다.
걱정 말라고 늦어도 탈없이 내려가겠다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어두워지고 시간이 계속 흐르니
그 마음이야 오죽했겠습니까.
하산 후 그럽디다.
같이 걸었으면 걸었지 기다리는 거는 앞으로 절대 하지 않겠답니다.
뭐, 앞으로 이런 산행도 두 번 다시는 하지 않지 않을까요.
들풀님은 참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말과 행동으로 힘을 나게 합니다
모두가 놀라워할 만한 체력과 끝까지 밝은 표정으로 모두를 감탄을 하게 합니다.
앞에선 사람이 열 걸음 걷고 뒤를 기다려 다시 걷기를 계속합니다.
내리막길에서 유독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여자분들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집에 와서 보니 아내의 발가락 열개가 피멍이 다 들었습니다.
아주 늦은 시간 어둠 속에서 들리는 개소리가 그리 반가울 수 없습니다.
반듯한 포장도로를 만나자 걸음들이 마지막으로 힘을 받아 속도를 내며 추성에 도착합니다.
하산 후 규다가 그랬습니다.
걸으면서 뒤 돌아보니 일렬로 줄지어 널어 선 불빛이 정말 장관이었다고.
길은 잃어도 사람은 잃지 마라.
재난영화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혼자만 살겠다고 다른 길을 선택하거나,
저 혼자만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 등장하는 장면,
또는 이렇게 된 모든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책임을 떠 넘기려는 장면입니다.
인간이 가진 심리 중에는 그런 게 있답니다.
<이해하지 못하면 두려워하고, 두려워지면 파괴하려 한다.>
가정이나 어떤 조직이나 집단에서도 비슷한 경우는 수 없이 많습니다,
잘 나갈 때는 말이 없다가 일이 잘못되면 모든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떠 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그 사람의 진짜 인간 본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불가역적 인간 본성이라 하고 싶습니다.
살아오면서 일찍이 저는 이런 경험을 몇 번 했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위기의 순간에 진정한 그 사람의 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숨기고 감추어 두었지만 위급한 경우에 나타 날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가진 진짜 본래의 모습, 그것이 불가역적 본성입니다.
이번 산행은 힘들었습니다.
예상은 했고, 각오하고 미리 알려주고 말은 했었지만 그래도 힘들었습니다.
멀고 지루한 길이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어두운 산길이었습니다.
위기라고 까지 말 하기는 좀 그래도 아주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 성질내거나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초심을 잃지 않았고 서로를 지켜주려는 말과 행동 희생적인 모든 것이
마음을 울컥하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불가역적 본성 자체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몇 번의 길을 잃고도 다시 길 위로 돌아올 수 있게 한 대단한 사람들과 지리산을 누볐습니다.
길은 잃어도 다시 길을 찾으면 되지만, 사람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신호등이 없는 건널목에서 혼자 건너면 무단횡단이 되지만, 여러 명이 같이 건너면 차들이 멈추어 섭니다.
같이 걷는 게 힘입니다.
가장 힘든 순간, 같이 걸어서 힘이 되어 준 사람들로 인해 이번 산행은 진정 행복한 동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