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 목통골
목통골
행동팀83-지리62차
2019년 6월 중경팀 정기 산행
일시:2019년 6월 23일 (일요일)
산행자:백산님, 연하님, 최옥희님, 최정남님,황순진님, 수야지기, 수야 (7명)
걸어간 길:칠불사 주차장-목통골-칠불사 중허리 갈림길-칠불사 주차장-칠불사
산행시간:08시 ~13시 56분 (5시간 50분 긴 휴식 점심시간 포함) 5.5km
짝수 달 넷째 주 일요일은 중경팀 정기 산행이다.
이번 달에는 일곱 명 아니, 일곱 명만 참석했다.
일곱 명이 목통골로 갔다.
칠불사 일주문 앞에서 칠 명이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백산님
삼신동 각자
화개에서 1023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신흥에서 의신 방향과 칠불사 방향 삼거리에 닿는다.
왼쪽 칠불사 방향 범왕 보건소 맞은편에 삼신동 각자 바위가 있다.
이곳에 차를 세웠다.
삼신동 각자 바위를 보고 가기 위해서다.
안내 표지석에는 고운 최치원의 글씨라 적혀 있다.
예전에는 고운의 글씨라고 하면 뭐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아래 링크의 엉겅퀴님 글을 읽기 전 까지는 그랬다는 말이다.
글을 읽고 엉겅퀴님의 매우 합리적인 적절한 추론에 무릎을 칠만큼 공감을 했고, 다시 이 각자를 보게 된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된다.
알아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 안 하더나.
읽어 보면 알겠지만 엉겅퀴님은 내가 늘 말하지만 천재가 틀림없다.
내 주위에는 천재가 여러 명이 있다. (내가 그리 생각하면 그런 것이지 뭐)
이건 하늘이 내가 착하게 살았다고 준 선물이다.(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삼신동은
이 골짜기에 神興寺(신흥사) 義神寺(의신사) 靈神寺(영신사)가 있어 三神洞(삼신동)이라 부른다고 한다.
http://jiri99.com/bbs/board.php?bo_table=jiri31&wr_id=218
화개동천
고승 삼법화상은 의상대사의 제자로 총명하고 경률에 두루 밝았다.
평소 중국 조계산의 혜능선사가 선풍을 크게 일으킨 훌륭함을 듣고
그를 찾아 배우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13년 혜능대사가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정상을 모셔 와서 경주의 영모사에서 매일 공양을 올렸다.
그런데 삼법 스님의 꿈에 혜능대사가 나타나
이곳은 인연 터가 아니니 “강주의 지리산 아래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삼법 스님은 지리산을 뒤지다가 마침내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고
눈 속에서도 칡꽃이 만발한 곳을 찾게 되었다.
이곳에 혜능대사의 정상을 봉안하고 조그만 암자를 세웠다.
삼법 스님이 혜능대사의 정상을 눈 속에 칡꽃이 핀 곳, 즉 갈화설리천(葛花雪裏天)에 모셨다 하여
722년(성덕왕 21)부터 이곳은 꽃피는 곳 ‘화개(花開)’가 되었다.
화개동천 이야기는 ‘화개’라는 지명에 관한 내용이면서 쌍계사 창건 설화와도 연관이 있다.
주요 모티브는 ‘신선이 사는 항아리 속 별천지’. ‘눈 속에 칡꽃이 피는 곳’ 등이다.
쌍계사는 723년(성덕왕 22)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이 당에서 귀국하여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신 뒤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가 절 양쪽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로 불렸다.
삼법화상이 육조 혜능의 정상을 모시기 위해 ‘눈 속에 칡꽃이 핀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그 지명이 화개로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출처] 한국학 중앙연구원 - 향토문화 전자대전
홍류교 능파각
신흥사 주지 옥륜 스님이 조선 명종 16년(1561년)에
화개동천 삼신동(신흥) 거친 냇물 위에 긴 돌다리 ‘홍류교(紅流橋)’를 가설하고,
그 위에 다섯 간의 누각을 지어 단청을 곱게 한 ‘능파각(凌波閣)’을 지었다.
신흥사에서 머리를 깎고 전후 20여 년을 화개동천에서 지낸 휴정 서산대사는 ‘홍류교 능파각기’를 썼다.
서산대사는 홍류교 능파각이 '여러 사람의 흥취를 돕는 것이 얕지 아니하고,
비바람과 눈과 빙판을 만나도 건너는 자가
옷을 걷을 수고가 없으니 쉽게 내를 건너게 해 준 공이 크다'며 그 공을 칭송했다.
하지만 그이는 글 말미에 '한스러운 것이 있다면, 태초에 하늘이 이 신령한 곳을 숨겨놓은 것을,
지금 옥륜과 조연스님이 구름을 헤치고 산문을 열어 드디어
산과 골짜기와 시내와 사원을 인간세상에 드러나게 만들어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한 일이다'고 썼다.
서산대사는 '홍류교 능파각' 시를 따로 남기기도 했다.
畵閣飛雲橋下水
다리 아래 물 흐르고 구름은 누각에 날리는데
山僧每日踐長虹
산승은 날마다 긴 무지개 밟고 섰네
幾多塵世飜新局
삶이 어지럽기 그 몇 번이던가
何代閑民作老翁
한가로운 백성 어느새 늙은이 되었네
春暮山間花雨亂
봄 늦은 골짜기에 꽃비 휘날릴 제
月明天上玉樓間
달 밝은 하늘 아래 다락은 비어있오
澗琴松瑟無終曲
물소리 솔바람은 천년의 노래라
萬古乾坤一笑中
만고의 누리에서 한바탕 웃어보네.
이 사진을 찍고 돌아 서는데 다리 건너편에서 배낭을 멘 한 사람이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한다.
지리n보이님이다.
먼저 우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 왔다.
인사를 나누고 걸어가는 그의 걸음이 힘차고 활기차 보인다.
걸음걸이가 무척이나 빨랐다.
멀리서 걸어가는 그를 보고 내가 그랬다.
'아따 그 양반 디기 잘 걷네.'
삼신동 각자 바위 바로 옆 계곡에는 홍류교의 흔적이 남아있다.
홍류교 능파각에서 물안개 자욱이 내려앉은 화개동천을 바라보는 상상을 잠시 해 보았다.
신선이 살만한 곳이라 여기고도 남을 만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곳 주위 화개초교 부근 신흥사 터, 푸조나무, 세이암, 탁영대는 산행 후 남는 시간에 돌아보기로 한다.
결국 나중에도 이곳들은 들리지 못했다.
칠불사 주차장은 텅 비어 있다.
여기 일주문 주차장보다는 차량이 칠불사 경내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그런가 보다.
아무도 없으니 디기 편하다.
편한 마음으로 산행 준비를 하고 단체로 사진도 찍는다.
일찍 움직인 관계로 하동에서 아침도 든든하게 먹었고, 시간이 여유로우니 마음도 여유롭다.
놀고, 즐기는 산행이 목적인 만큼
오늘 코스는 처음부터 아주 짧게 설계했다.
주차장에서 칠불사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자 바로
백산 선생님이 이쯤이 아닐까 하며 들머리를 살핀다.
지도고 뭐고 없이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촉은 정확했다.
조금 더 위에서 들머리를 찾든 연하 형님을 불러 함께 들어간다.
이 양반 꼭 엉뚱한 곳에서 허적거린다.
사실, 형이 살핀 곳에서도 진입 샛길이 있기는 했다.
들머리는 아래 사진 왼쪽 배수로를 따라가며 잘 살피면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뚜렷하다.
도로에서 산길로 들어서자 길은 예상과 달리 대로 수준이다.
산죽도 좀 있고, 이슬에 바짓가랑이도 좀 젖고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다.
맨 앞에 선 내가 거미줄 때문에 약간 거추장스러울 뿐
산죽을 베어낸 길이 쫙 펼쳐진다.
어띠기 고맙든지.
잘 정비된 좋은 길을 따라 트랙은 일치했고
산행 시작 20분 만에 폐독가에 도착한다.
같은 곳을 같이 보아도 사람마다 보는 시각은 다 달랐다.
이곳에 들어서자 누구는 머구를 제일 먼저 보고 '와 머굿대 봐라' 하는 사람.
이 무거운 것들을 어떻게 옮겨 왔을까? 하는 사람.
왜 여기서 살아야 했을까? 하는 사람.
같은 길을 걸어도 같지 않은 감흥과 느낌이 각자 다른 것과 같았다.
독가를 뒤로 하고 몇 걸음 옮기자 바로 계곡에 닿는다.
길이 반듯하게 계곡으로 연결되어 자연스레 내려서게 된다.
작은 소폭을 만나자
배낭을 내렸다.
예전 뽓대 형님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나무꾼은 힘들면 쉬고, 산꾼은 조망이 좋으면 쉰다>고.
항상 바르게 사는 우리는 배운 대로 한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쉬어 주어야 마땅하고 그래야 산꾼의 예의이다.
백산 선생님은 삼각대를 펼치고 계곡을 카메라에 담는다.
나는 배낭을 펼치고 막걸리를 꺼내 잔에다 담는다.
참으로 훌륭하기 짝이 없는 이 행동에 칭찬은 별로 없었지만
막걸리는 홀딱홀딱 다들 잘 비우더라.
엉뚱한 짓 하는 것 치고는 기특하기 한량없는 연하 형님의 무사산행 기원 삼배를 찍는다.
혼자서 뭐라 중얼중얼거리는데 계곡 물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대충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뭐, 설마 수야만 물에 퐁당 빠져라 빌었겠나 싶어 자세히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계곡에서 트랙을 확인하니 독가에서 휴식을 한 계곡으로 다 내려서지 않고 우측 산길로 가야 트랙과 일치한다.
다시 돌아 나오다가 그냥 계곡치기를 한 번 해 보자는 의견을 따른다.
계곡치기로 조금 오르다 계곡 좌측의 산길을 다시 걷는다.
잎이 다섯 개라 산삼이라고 뻥을 쳤는데 순진한 아줌마가
진짜 산삼인 줄 알고 호들갑을 뜬다.
그냥 뛰어들고 싶을 만큼 물은 맑고 시원해 보인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런 곳에서는 예의를 지켜 주어야 한다.
산꾼은 이런 곳에서 어쩐다?
맞다, 배운 대로 또 쉬어간다.
어라~ 이 누부야는
계곡 쪽으로 카메라를 대고 있는데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와서 선다.
이거 찍어 주지 않으면 디기 혼난다.
사진에 찍힐 방향을 알아서 딱 잡고 이미 서 있다.
사정없이 박아준다.
아무렇게 박아도 이쁘다.
계곡을 건너간다.
몇 번 계곡을 횡단하지만 몇 번인지 세지 않는다.
트랙 길과 일치하려 신경 쓰지도 않는다.
계곡치기도 하고 어려우면 좌우 산길로 잠시 나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모든 것이 영원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상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간혹 아내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여유 넘치는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할 때가 있다.
사실상 부러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비교가 나인 것만 같아서
그럴 때 딱 한 마디로 입막음을 하곤 한다.
'저 사람도 언젠가는 죽는다.'
인생팔고(人生八苦) 중에 구부득고(求不得苦)라는 것이 있다.
구하고 원하지만 얻어지지 않아 생기는 괴로움이다.
여태 살아보니 이 욕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나름의 방법은
구하고 노력하였으나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정직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부러움의 대상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더라.
그냥 나는 나로 살면 조금은 가벼워지더라.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모두 가진 걸 다 두고 죽는다.
산에서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이렇게 가끔 하곤 한다.
너도 참 괴롭고 힘들게 살았능가 벼.
여기도 경치가 제법 좋네.
그라모 또 우째야 되겠노.
오늘은 이리 놀아도 된다.
포트홀
진도사골에서 보았든 바위의 홈과 비슷하다.
연하 형님의 즉석 급조 전설 따라 삼천리는
계곡 물소리를 압도하는 큰 웃음소리가 나게 한다.
어라~ 이거는 또 머시고.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임?
얼씨구
이 사람들 좀 보소 이거.
아주 노골적으로 노닥거리네 이거.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건너온다.
혹시 순간포착의 순간이 있을까 싶어 카메라를 대기 중에 있었지만
연하 형님이 나만 빠져라 빌어서 인지 아무도 빠지지 않고 잘 건너온다.
계곡에서 약간 빗겨 나 산길을 따라 걷는다.
예전 연동마을이 있어 연동골이라 했다는 마을터를 지나간다.
여기저기 축대와 마을의 흔적들이 보인다.
마을터는 넓게 제법 큰 규모로 흔적이 남아 있다.
길 아래 저쪽 계곡에서 우렁찬 물소리가 들리자
백산 선생님과 연하 형님은 사진을 찍으러 아래로 내려가고
우리는 천천히 계속 걸었다.
제법 간격이 떨어진 줄 알았는데 금세 다시 뒤쫓아 왔다.
칠불사로 가는 삼거리에서 목통골은 더 이상 오르지 않기로 한다.
자리가 놀기에도 좋았다.
경치가 좋으니 쉬어야 하고, 시간이 되니 밥도 먹어야 한다.
밥 먹고 놀기로 한다.
점심밥은 백산 선생님이 놀라워할 정도로 풍족하다.
물에 들어가기엔 아직 추울 것 같아 그건 참기로 한다.
백산 선생님이 같은 자리에 모델을 바꾸어 가며 독사진 한 장씩을 찍어 주었다.
사진:백산님
이건 예술이 아니라 마술이다.
실물보다 사진이 잘 나왔으므로 반칙인가?
이제 형은 윗옷을 바지에 넣지 않는다.
이 형도 착해서 뭐든지 배운 대로 한다.
사진:백산님
산허리를 따라 하산은 아주 수월하다.
길은 쉽고 단조롭고 오늘 산행 취지에 딱 맞는 맞춤형 산길이다.
배 부르고 여유롭고 편하게 걸으니 절로 웃음이 많다.
아무것도 아니건만 아줌마들이 16세 사춘기 소녀들 마냥 깔깔 웃어댄다.
힘든 길에서는 보이지 않든 길가 작은 야생화에까지 지대한 관심을 하사한다.
이런 널널하고 세상 여유 있는 산행을 앞으로는 지향해야 될 판이다.
아줌마들 억수로 좋단다.
넋 놓고 걷고 있는데
저 쪽 앞에서 누군가 나무 작대기를 탁탁 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저쪽은 이쪽이 두려운 게다.
그래 겁 없는 내가 먼저 다가갔다.(정황상 우릴 잡으러 온 사람은 아닌 게 분명함으로)
두 사람이 올라오면서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이 방향으로 내려가면 바로 적발된다며 칠불사에 그분들이 상주하고 하고 있으니
피해서 가는 길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칠불사를 거쳐 가는 길은 거의 봉쇄되어있단다.
칠불사로 들어가면 스님들에게 혼이 난단다.
이분, 이 말을
"스님한테 디기 뚜딜기 맞는다."고 했다.
순진한 아내는 진짜 스님이 두들겨 패는 것으로 알아듣고
스님이 진짜 사람을 때리느냐고 내게 물었다.
오른쪽 노란 화살표를 따라 하산한다.
이 길도 생각보다 좋다.
이 길도 산죽을 베어 내고 잘 정리되어 있다.
고맙구로.
들어간 곳으로 다시 나왔다.
전문용어로 원점회귀다.
이것도 산행이랍시고 만세까지 부른다.
주차장에서 산행을 정리를 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칠불사에 들린다.
몇 해 전에 와 본 칠불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어, 칠불사가 이랬었나?
경내 옆으로 내려오는 모든 길은 대나무로 울타리를 단단히 쳐놓았다.
뭐, 굳이 찾아보면 어디 한 두 군데 통 할 만한 길이야 있겠으나
꼭 그렇게 까지 하며 이곳으로 오르거나 내려와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칠불사(七佛寺)는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남쪽, 쌍계사 북쪽 30리에 있는 사찰이다.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1568년(선조 1) 부휴(浮休) 선사가 중창하였고, 1830년(순조 30) 금담(金潭)과 그 제자 대은(大隱)이 중창하였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완전 소실되어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하였다.
1978년 이후 문수전(文殊殿)·보광전(普光殿) 등이 중창되었으며, 1982년에 아자방(亞字房) 건물이 복원되었다.
아자방 은 온돌방으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이다.
신라 효공왕 때 담공 선사(曇空禪師)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는데도 한 번 불을 지피면 49일 동안 따뜻하였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현재 칠불사에는 대웅전, 문수전, 운상원(雲上院), 설선당(說禪堂), 보설루(普說樓), 원음각(圓音閣),
선다원 등의 전각과 칠불사사적비, 초의선사다신탑비, 문수동자탑, 부도탑 등의 탑비 및
일주문, 영지, 요사채 등이 있다.
운상원은 ‘구름 위의 집’이라는 뜻으로 칠불사 골짜기가 구름 바다가 될 때
이 곳이 구름 위에 드러나므로 운상원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장유화상이 일곱 왕자를 공부시킨 곳이라고도 하고,
거문고 명인 옥보고가 이 곳에서 거문고를 연구했다는 전설도 있다.
설선당은 강설과 참선을 하는 곳이며, 보설루는 설법을 하는 누각이다.
원음각은 종루이다.
영지는 허황후와 일곱 왕자의 전설이 서린 연못이다.
칠불사는 대한조계종 제13교구로서 특히 아자방과 영지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있다.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전설이 있는 도량으로서 연중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사찰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아자방은 공사 중이다.
선생님은 여러 곳을 조준했다.
이런 사진은 언제 찍었지?
아무래도 나만 모르게 나는 왕따를 당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곳은 강설과 참선을 하는 곳입니다. 이 곳에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저들은 쫓겨났다.
꼬시다.
영지
생각해보면 흐린 날보다 화창한 맑은 날이 더 많고
나쁘고 운 없는 날 보다 좋은 날이 더 많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인연보다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인연이 더 많다.
술 많이 마신 뒤의 숙취가 당연하듯
살다 보면 좋은 날에 비해 힘든 날도 있는 게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똑같은 현상도 달리 보이는 법이다.
함께 해서 행복한 사람들이다.
내게 이런 인연이 있어 나는 고맙다.
언제나 이 인연이 여여하기를.
오늘도 생각한다.
지리산.
가슴이 떨릴 때 다니자.
다리가 떨릴 땐 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