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19.01.06 하동 독바위

지리99 수야 2019. 1. 6. 16:05

하동 독바위


일시:2019년 1월 6일 (일요일)

산행자:노을님, 노을지기님, 황순진님, 나비부인님, 수야 (총 5명)

걸어간 길:청학동-참샘-삼신봉-내삼신봉-송정굴-하동 독바위-삼성궁4거리-청학동

산행시간:08시 30분 ~15시 21분 (전체소요시간 6시간 50분 ) 9km


2019-01-06 삼신봉.gpx




최근에는 지리산 주능을 가운데에 두고 사방을 돌아가며 산행을 계속하게 된다.

웅석봉, 삼봉산, 바래봉, 오늘은 삼신봉이다.

남쪽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는 삼신봉만 한곳도 없지 싶다.

이 아침 내 앞에는 청학동에서 삼신봉 정상까지 2.5km의 짧은 산길이 착하게 주어진다.

10년이 훌쩍 지난 이길에 대한 기억이 산길에 들어서자 빠르게 소환된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여러 기억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거나 긴가민가 할 정도로 흐린데

산길에서의 기억만큼은 그 길에 서면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생생하게 돌아온다.

몸으로 부닺쳐 밀고 나간 경험은 쟁여져 저절로 그렇게 되는가 보다. 


예상했던 것보다 날씨는 포근하다.

껴입은 옷이 부담스러울 정도다.

등산로 치고는 너무도 한적하여 적막하기 조차한 길에는 우리 일행만이 있을 뿐이다.


서두를 것도 없고, 눈치 보거나 쫓기는 심정도 아니니 걸음은 마냥 편하다.

산길을 조금 오르자 휴대전화 통화 불능 지역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하루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지 않는 날이 없다.

생각해 보면 휴대폰 속 세상에 사는 것 같기도 하다.

노안이라고도 말하더라만 휴대폰으로 시력도 많이 안 좋아졌다.

통화 불능 지역이라 안전에 유의하라는 현수막을 보자 역설적으로

휴대폰에서 좀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쉬엄쉬엄 걸어 올라 몸에 열이 살짝 오를 때쯤 참샘에 닿는다.

머릿속까지 시원한 물을 한 모금씩 나눠 마시며 잠시 휴식을 한다.

외삼신봉을 갈지 말지 말들이 오고 갔지만 그냥 삼신봉으로 바로 오르기로 한다.



지리산이 녹여 낸 참샘의 차가운 한 바가지 물은 창자의 저 먼 곳에서부터 깊게 적셔 와

몸속에서 낮게 깔리며 퍼진다.

한참을 뱃속에서부터 머리까지 뻗쳐오른다.

마치 공복에 들이킨 소주같이 찌릿하다.


삼신봉에 올라서자 주능선이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올라오는 길과는 달리 더 이상 올라설 땅이 없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듯이 

공기는 갑자기 매섭도록 차가워진다.

얼굴에 얼음 물이 닿는 것 같이 얼얼해진다.

참샘의 그 물맛 같다.


눈앞으로 다가온 상봉의 위용은 압도적이다.

바짝 세워진 통신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어디 통신골 뿐인가.

보이는 모든 봉우리와 골짜기도 다 그러하다.

공기는 신선하다 못해 아프도록 차가웠지만 감내하며 서서 바라볼 만큼 눈앞은 우수하고 훌륭하다.


제석봉과 촛대봉을 거쳐 아주 천천히 산은 눈에 담긴다.

반대편 저 너머에서도 그러했고

또 어딘가에서 이런 조망을 볼 때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참 잘한 일이라고.


불무장등을 비롯한 능선들이 남쪽으로 길거나 짧게 흘러내렸다.

능선들 사이 골짝은 깊어 속속들이 다 들여다볼 수가 없다


뒤돌아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서자

남해의 바다가 그곳에서 빛난다.

사천의 와룡산에서 광양까지 바다와 섬들이 아래에서 일렁인다.


그림처럼 펼쳐진 산은 시선을 계속 빼앗아 간다.

이처럼 살아 있는 산수화는 이곳에 올라선 자 만이 볼 수 있는 보답이다.

사찰에서는 뒷간 문화가 속세의 그것과 달라 물리적인 배설에 그치지 않고

뒷간에서조차 지켜야 할 마음가짐을 담은 입측오주(入厠五呪)라는 진언(眞言)을 외운다고 한다.
내 눈앞에 감탄할 만한 그림 같은 이런 자연과 마주할 때 외우는 뭐 그런 건 없을까?




부부는 다정하게 카메라 안으로 들어왔다.

무뚝뚝한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내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참 재미없고 멋대가리 없는 사람일 것이다.

말이라고 내뱉는 것은 도끼로 장작 패듯이 모두 딱 쪼개지는 단답이고

다정함과는 애초에 원수가 진 것도 아닌데 알려고도 하지 않으니 이 부부를 부러워할 만도 하겠다.

뭐 어쩌겠나 원래가 이렇게 생겨 먹었고 이런 나를 만난 아내의 복이 그뿐인 것을.

엉겅퀴 형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잘난놈캉 살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사진 안 찍는다, 아니 못 찍는다.

술이나 취하면 모를까


이제 삼신봉이 뒤로 멀어진다.

자꾸 돌아 보게 되는 것은 미련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내 위치를 알고 싶은 것이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아직 짧지 않은 가야 할 길

그 길을 가기 위해 나는 지나온 날들을 간혹 뒤돌아 보는 것이다.

이 행위를 시작하며 어떤 답을 내릴지도 매번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여태 그래 왔고 언제나 그럴 수밖에 없는 그 답

그래, 가보자!


산길은 그렇게 낮과 밤이 찾아오고 행복하고 즐겁고 슬프고 때론 애달픈 하루하루의 삶처럼

내려서고 나면 다시 오르막으로 주어진다.

살아 낸 것처럼, 걸어온 것처럼 그리고 또 가야 할 길처럼.

걸음은 곧 내삼신봉에 닿는다.

지난 4월 외삼신봉 독오당 산행 때 엉겅퀴 형님이 했든 말이 기억났다.

외삼심봉과 내삼신봉은 동삼신봉 서삼신봉으로 불러야 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겠는냐고 했었던 것 같다.


남부능선은 볼 때마다 마냥 걷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눈이 없는 겨울 지리산은 왠지 가슴이 뛰지 않는다.

겨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 덮인 지리산의 겨울이 보고 싶다.


적막이 감도는 산에서 우리들만이 소리를 낸다.


저곳과 이곳을 말한다.

가 본 곳과 가보지 않은 곳을 말한다.

조금 떨어져 일행을 카메라에 담는다.



살면서 생성된 크고 작은 답답한 모든 것들을 이제 훌훌 다 털어 버리고 싶다. 

어쩌면 나 스스로 이미 오래전부터 답을 알면서도

이미 정해져 있는 그 답을 애써 외면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

답이 아닌 것을 답으로 바꾸려는 헛된 노력이 나를 얼마나 멍들게 하였는지 나는 안다.

이제 조금 더 많이 내려놓아야겠다.


송정굴

송정 하수일이 피난처로 기거했다는 말이 전해지는 송정굴과 하수일 선생에 대해

서삼신봉(내삼신봉)과 쇠통바위 사이에 있는 송정굴은

그가 임진왜란 때 피란했던 곳이라고 송정굴이라 한다는 얘기가 전해지는데,

그의 문집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고,

또 그해 그의 종숙부 河洛과 아우 河成一이 의병활동으로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가 난을 피하여 거기에 숨어 지낸 것 같지는 않다.

<지리구구 옛산행기방 -산서원세심정기(德山書院洗心亭記)> 엉겅퀴님의 글 중에서)

송정굴을 대충만 살펴보아도 기거를 하기에는 어딘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송정굴에서 점심을 먹고 쇠통바위로 향해 걷는다.


쇠통바위 위에 올랐다.

올라오는 길이 약간 성가시긴 하지만 별로 어렵지 않게 올라오겠다.

자물쇠를 열면 천지개벽이 이루어지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말이 전해진단다.

유토피아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희망일 것이다.


서로 잡아주고 밀어주며 부부는 그렇게 올라온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내가 가지지 않은 다정다감함이 볼수록 부럽긴 하다. 



쇠통바위에서 한참을 논다.

아래 청학동과 묵계저수지가 보인다.

온갖 자세로 여러 사진을 찍는다.



건너편으로 지나온 능선이 저 만큼 멀어져 있다.


길에 배낭을 벗어 두고 하동 독바위로 들어간다.

갈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언제나 가는 게 맞더라.

언제 또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그날 그때 그곳은 가보는 게 나중에 아쉬움이 없더라

하동 독바위는 이렇게 바라보니 개의 머리 같기도 하고 곰 머리 같기도 하다.


기를 받기 위해 바위에 찰싹 붙었다.

나도 따라 한다.



가야 할 방향의 남부능선



그토록 사랑했던 지리의 별이 되신 님

<사랑은 한순간이 아닌 것을 당신이 떠난 뒤 알았어요.> 

독바위 추모 명판에는 남은 자가 떠난 자를 그리워하는 아픈 글이 박혀 있었다.


제법 잘 살아왔다고 여겼던 오만도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왔다는 겸손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런 날이 내게도 오겠지

마냥 단단한 줄 알고 산 날들이

구멍이 숭숭 뚫린 빈틈들로 무너져 내리는 그런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속절없이 나도 주저앉겠지.


잘 살야지

주저앉기 전까지 잘 살아야지

덜 상처받고, 덜 상처를 주며 남아 있는 날들은 잘 살아야지

내 사랑은 한순간이 아니었음을 내가 떠난 뒤에 알게 하지는 말아야지


남부능선을 따라 계속 걷다가 삼성궁 사거리에서

삼성궁 방향으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길은 복잡하지도 억눌리거나 각을 세우지 않았다.

잠깐의 비탈은 견딜만했고 몸이 쉽게 감당할만하다.

하산의 걸음은 쉬워 빠르게 아래까지 내려온다.

등로의 거의 마지막에 도달할 즘 오래 전 기억과는 달리 새로운 길이 생겨있다.

입장료 때문인지 길을 막아 놓아 지리산 길 지도의 트랙은 들어갈 수 없는 길이다.

새로운 길을 따라 계속 걷는다.


길을 따라 내려오면 연못이 보이고 오리 머리를 한 건물도 보인다.

연못 곁에는 정자를 세워두었다.

연못가를 따라 내려서니 주차장이다.


아침에 주차한 곳까지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한다.

터벅터벅 걸어가다 운이 좋았는지 빈 택시가 있어 한 사람만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한다.

운행하는 택시가 아니지만 기사님은 망설이다 태워주신다.

택시를 타고 차를 가져온 순진 형님이 요금도 받지 않고 태워 주더란다.

참으로 훌륭하기 짝이 없는 분이라고 내가 말했더니

안 그래도 순진 형님이 기사님 보고 '복 항거시 받으시라'라고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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