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지리산 둘레길

2017.07.09 지리산 둘레길 (송정-오미)

지리99 수야 2017. 7. 14. 14:52

지리산 둘레길13

 

일시:2017년 7월 9일 (일요일)

산행자:행동팀 6명

걸어간 길: 송정마을→석주계곡→석주관 갈림길→구례노인요양원→문수댐 아래→내죽마을→오미마을
(지리산 둘레길 16구간)

 

2017-07-09 지둘13(16구간 송정-오미).gpx

 

 

송정마을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산82-22
둘레길 16구간 송정에서 오미까지 9.7km 송정마을에서 출발합니다.

도로를 가로질러 산으로 들어가는 안내표지판을 따릅니다.

처음부터 산을 하나 넘어갑니다.

 

오름길을 제법 올라갑니다.

비가 오지 않을까 대비를 했지만, 날이 점점 맑아집니다.

도시의 숨 막히는 더위보다는 한결 낫지만 걸어가는 길

숲속도 더위는 피할 수 없습니다.

 

되도록 천천히 느리게 걷습니다.

얼마 전 수술로 회복에 있는 환자들이라 무리하지 않고 걷기로 했습니다.

쉬어가는 시간도 많습니다.

 

산불이 휩쓸고 간 흔적이 참혹합니다.

화상을 입은 소나무는 죽어가고, 그래도 다행히 살아남은 나무들이

실록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산불의 범위가 넓고 방대합니다.

 

모롱이를 돌아가는 산길은 높이를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합니다.

한 비탈을 돌아 새로운 모롱이를 만나고 또다시 길은 그렇게 이어집니다.

흡사 우리의 삶과 닮은 길은 어제처럼 지나가고 오늘처럼 다가와

앞에 또 펼쳐집니다.

서러운 길을 지나고 억울한 길을 참으며 더 나은 곳을 희망하는 삶이 멈추지 않듯이

산길도 그렇게 계속됩니다.

 

땀이 범벅될 때쯤 시원한 조망이 펼쳐집니다.

아침에 내린 비로 인해 운해가 피어납니다.

걸음을 멈추고 시원한 섬진강 바람을 맞아 봅니다.

앞서간 일행들이 기다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짓을 할 참입니다.

 

섬진강이 보이는 전망대이지만

안개가 자욱이 피어 구분 없이 강을 삼켜버립니다.

 

쓰러진 풍도목이 길을 막았습니다.

넘어가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위로 넘는 사람과 숙여 아래로 기는 사람.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길을 걸어 냅니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당연한 세상에서

나와 다름도 존중되어야 마땅합니다.

 

의승재라고 표지목에 누군가 보일락 말락 새긴 글씨가 보입니다.

의병이 승전한 고개라는 뜻일까요.

이곳은 석주관성과 연계된 고개이니 아마도 그런 사연이 있지

않을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쉬어가라고 만든 벤치이니 당연히 쉬어갑니다.

 

칠의사골 석주곡수

토지면 송정리 석주곡에서 발원하여 칠의사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갑니다.

정유재란 때 구례의병이 왜군과 싸워 피아의 군대가 많이 전사하여 시산시해을 이루어 내가 피로 붉게

물들어서 칠의사 앞을 ‘피내(血川)’라고 부른다 합니다.

 

칠의사골은 이순신장군의 백의종군길과 만납니다.

석주관으로 내려가는 길이 0.9km 입니다.

저 길을 따르면 혈천이라 부르는 피내를 걷게 되나 봅니다.

 

이번 길에서는 여자분들이 앞서고 남자들이 뒤따르는 형국이 됩니다.

남자들이 다 환자이다 보니 그렇게 됩니다.

배낭도 최대한 가볍거나 없습니다.

저 아래 지원 차량이 대기하고 있으니 호사스러운 산행입니다.

오르고 내리는 산길이 좀 지겹게 느껴집니다.

가끔 트이는 조망이 없다면 지루함은 더 할 것 같습니다.

 

 

 

 

기둥하나에 작은 지붕을 얹은 쉼터에서 간식을 나눠 먹고 땀을 식힙니다.

무더위가 폭염으로 주의보까지 내리는 요즘이지만

산길을 걷다 숲 그늘에 들면 그래도 시원함이 가슴을

후련하게 합니다.

 

지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아도 길은 길로서 선명히 앞에 놓입니다.

명확한 길은 명확하여 구분됩니다.

 

비탈을 깎은 개활지에서는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지나갑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으로 눈이 따갑습니다.

여름은 더워야 맛이라고 주장하지만, 너무 덥습니다.

그러나 숲에 들면 그나마 걸을 만합니다.

 

팔각정을 만나고 시원한 바람에 몸을 맡깁니다.

이 더위에 바쁘게 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저 끝에 길은 항상

눈으로 짐작해 미리부터 아득함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막상 걸어보면 그 거리는 실제 그렇게 멀지만은 않음을 실감합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괴로운 현실도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듯이 말입니다.

 

산길에서 또 한 번 돌아서 나오자 시멘트 임도가 작렬하는 햇볕에 달구어져 구불구불 놓입니다.

교통순경의 손짓처럼 가야 할 길은 빨간 화살표로 정확히 지시됩니다.

 

무더위는 가을을 예견하고 준비합니다.

익어가고 결실되는 과정은 뜨겁고 강렬해야 하는 법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 까닭이 분명해집니다.

 

원송계곡입니다.

시원함에 계곡에 발을 담그고 땀을 씻어냅니다.

여기서 점심을 먹기로 했던 계획은 조금 더 걷자는 의견으로 모입니다.

 

과수원 사이로 길을 내어 주었습니다.

길을 통과하면서 또다시 시멘트 길이 계속됩니다.

 

 

 

파도마을

구례 군청소재지에서 7km, 면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이고 경남 화개와 거리는 8km에 이른다.

섬진강변이라 안개 낀 날이 많고 지리산 노고단에서 왕시루봉으로 이어져 끝봉에서 낭떠러지처럼 뚝 떨어진 터,

백운산과 계족산을 바라보며 동서 양쪽에 구능이 있어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터다.

좌측에 있는 낮은 산을 청룡등이라 부르고 있다.

구례군 노인전문 요양원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나오면 19번 국도를 만나는 곳이 파도마을이다.

 

구례 노인 전문병원 옆 쉼터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그늘이 있어 적당한 장소입니다.

식사가 시작되고 한 무리의 산꾼들이 힘든 모습으로 들어와 같은 곳에 있게 됩니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 산꾼들이 아닙니다.

대화를 가만 들어 보니 지리산을 잘 알고 많이 다니는 분들입니다.

왕시루봉을 새벽에 올라가 벌써 내려왔다고 합니다.

차를 가져오고 짐을 정리한 산꾼들이 떠나고 우리는 느긋하게 점심을 먹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짐을 챙길 때 보니 왕시루봉을 다녀온 그 산꾼 중에 누군가 등산화와

스틱을 남겨두고 갔습니다.

짐을 정리하며 그냥 놓고 깔까 하다가 망설임 끝에 차에다 실었고 지금까지 보관 중입니다.

혹시 등산화와 스틱을 놓고 가신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연락해주십시요.

대전, 청주,까지는 확실히 들었는데

지리구구 처럼 각지에서 모여 왔다고 했습니다.

지리산을 잘 아시는 분들이라 했으니 혹시라도 지리99를 보시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구만들이 바라보이는 시멘트 길을 따라 한참을 걷습니다.

 

문수 저수지입니다.

저수지 바로 옆 도로를 따라 내리막길입니다.

걸음이 경사만큼 빨라지고 가벼워집니다.

 

 

버섯을 판매하는 판매장에 들어가 설명도 듣고 버섯도 삽니다.

시원한 얼음물도 얻어 마시고 잘 꾸며진 집도 구경합니다.

버섯 모양이 저렇게 크진 않은데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었더니 이렇게 나옵니다.

 

 

 

내죽마을

대나무와 문수천의 시냇물을 따서 ‘대내’라 불렀다고 합니다.

또 옛날 문수천의 물을 논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보를 만드는데,

보의 입구를 암석이 있어 뚫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죽순이 암석을 뚫고 올라오면서

암석이 뚫려 물길이 생겼다 해서 대내(죽천)라 칭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내죽마을에서 오미마을로 가는 길에는 마을 빨래터가 곳곳에 눈에 띕니다.

 

 

 

하죽마을

조선 영조 때 경주 이씨 이기명이 경주에서 길지를 찾아 본 마을에 정착하여

경주 최씨 등과 함께 큰 마을을 이루었으며

풍수지리설에 명지라 하여 각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대나무가 온 마을에 올창하여 “대내”(문수, 하죽, 내죽)라 하였고

하죽은 아랫방면, 바깥이다 하여 바깥대내, 외죽이라는 명칭도 있었다 한다.

제19호선 국도에서 500여 미터에 동북쪽에 내죽, 서쪽에 오미 마을과 인접하고 있으며

당초에는 내죽, 하죽, 오미 등을 통틀어 오미리라 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하죽 마을로 독립하였다.
하죽 마을에도 금환낙지 터가 있다 하는데

하늘에 사는 선녀가 경치 좋은 이 곳에 내려와

손가락에 금반지(가락지)를 구름 위에서 잃어 버렸다고 전해 내려오며

그 반지가 뭍인 곳에 집터를 잡으면 부귀영화가 뒤따른다 하여

많은 삶들이 이곳을 찾아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250년 된 서어나무

 

 

오미마을 –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

둘레길 16구간을 마무리합니다.

 

 

 

운조루(雲鳥樓)

 

중요민속자료 제8호  소재지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이 집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 (柳爾胄)가 세운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 (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 (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 (歸晩) 이라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 (歸晩窩) 라고도 불렀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구름속의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디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에서 따온 글 이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있다.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하며,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 (金龜沒泥), 금환락지 (金環落地), 오보교취 (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 (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운조루에는 바깥사랑채, 안사랑채, 아랫사랑채 등으로 각각 누마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아쉽게도 안 사랑채와 아랫 사랑채의 누 마루는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이 집은 건 평 129평 으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 자형의 사랑채와 ㄷ 자형의 안채,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집에있는 목독(나무로된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은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다.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이웃을 돌보았던 마음이 전승 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본다.

류이주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 부엌으로 통하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경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니 우선 커다란 쌀통이 눈에 띤다.

둥그런 원형의 쌀통은 밑동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고,

'他人能解(타인능해)'란 글귀가 보인다. 

'타인능해'란 '누구나 쌀뒤주를 열수 있다'란 뜻이다.

즉 운조루의 집주인 류이주는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230여년이 넘는 원통형 쌀뒤주는 쌀 3가마는 족히 들어갈 만큼 크다.

 

 

조선시대 양반부자집 운조루가 일제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230여 년 간 불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쌀통에 있다.

전쟁 중에 전라도 부자들의 피해는 심했다.

더욱이 6.25를 전후하여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이 지리산 문화권이다.

빨치산의 본거지인 지리산 일대의 부자와 양반들은 목숨과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류씨 집안만큼은 6.25를 거치면서도 온전했다.

다른 부잣집들은 집이 불타고, 총에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지만

류씨 집안은 죽은 사람도 없고, 운조루가 불타는 일도 없었다.

전쟁이 나면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쌓였던 개인적인 감정이 문제다.

개인적 감정은 원한으로 증폭되어 그동안 인심을 잃은 부자는 집이 불타고 대창에 찔려죽었다.

운조루가 전쟁 중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능해'란 운조루의 철학 덕분이다.

쌀뒤주를 열어 놓고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는 후한 인심이 운조루와 그 집 사람들을 지켜준 것이다.

버리고 비우면 살아난다는 자연법칙을 류씨 집안은 실천한 것이다.

쌀뒤주를 처음 놓았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혼잡을 빚었지만

점차 그 양이 줄어들었다. 그것은 쌀뒤주가 비면 다시 채워 놓으니까,

언제라도 쌀이 필요하면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두 세끼 정도 양을 가져갔다고 한다.

운조루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되었다고 한다.

 

운조루의 뒤뜰에 있는 굴뚝은 한결같이 낮다.

1m도 채 안 되는 굴뚝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쇠똥처럼 주저앉아 있는 모양이다.

연기조차 제대로 빠져 나가지 않을 것 같다.

양반가 집안 굴뚝은 보통 높이 세워

권세를 높이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게 했으련만 왜 이리 낮게 세웠을까? 

이는 운조루의 굴뚝을 낮게 세운 것은 마을 사람들의 보릿고개를 고려한 주인의 배려라고 한다.

양식이 없어 배가 고파 부앙이 들 정도인데

양반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펑펑 나면 주린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해서 류이주는 굴뚝을 낮게 만들어 밖으로 새지 않고

안마당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매운 연기를 마셔야 하는 집안사람들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배고픈 서민들을 고려한 굴뚝이다.

이는 '타인능해'의 운조루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숨은 보석이다.

 

 

 

 

위성류라고 했습니다.

나무가 특이하여 여쭈어보았습니다.

 

 

250년 된 회향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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