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18 뱀사골
뱀사골-묘향대-심원.
일시: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산행자:(행복한 동행)행동팀 4명+Guest 에스테야님 (총 5명).
걸어간 길:와운교-뱀사골-화개재-삼도봉-묘향암-반야중봉-심원능선-심원.
산행시간:08시 37분 ~18시 08분 (9시간 31분).
상가식구라는 이름 대신
<행복한 동행>으로 이름을 바꾸기로 했다.
줄여서<행동팀>은 지리산 산행 21차가 된다.
뱀사골 단풍을 보러 가기로 했고, 에스테야 형님도 합류했다.
와운교에서 아침을 먹고 산행을 시작했다.
산행팀과 유람팀으로 나누어졌다.
유람팀은 천연송을 둘러볼 것이고, 와운에서 내려가며
뱀사골 단풍을 구경하고, 이후의 시간은 알아서 유람할 것이다.
저녁 무렵 심원마을에서 만나기로 했다.
뱀사골은
배암사가 있는 골이라 하여
배암사골 > 뱀사골로 불리게 되었다. <지리구구 지명탐구방 "뱀사골 유래" 꼭대님>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의 화개재에서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까지 12km의 계곡이다.
단풍으로 많은 사람이 북적일 줄 알았던 길은 예상과는 달리 한적했다.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한 단풍이 산행 초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이번 산행은
비린내골을 생각했고
대성골을 생각했었다.
여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울긋불긋한 단풍은 고도를 올릴수록 화려해져 갔다.
뱀사골 단풍은
딱, 환장하게 했다.
환장하다.
①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뒤집히다.
②마음이나 행동 따위가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상태로 됨.
마음이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뒤집혔다.
아래위로 눈이 가는 곳마다 탄성이 따랐다.
마음은 정상적인 상태를 계속 벗어났다.
붉은 단풍은 너무 강해서 그 아래 사람조차 붉게 물들였다.
햇볕에 빛나는 단풍에서는 낙엽 타는 냄새가 날 것 같았다.
늦게 출발했기에 바삐 걸어야 하는데 계속 걸음은 느려졌다.
매일 같은 시간에 어김없이 화장실을 간다.
하지만 지리산에 드는 날은 화장실을 가지 못해 늘 불편했다
궁리 끝에 변비약을 먹어 보기로 했다.
그것도 용량을 두 알이나 초과해서 과다 복용을 저질렀다.
내 몸에서 이렇게 약발이 잘 받을 줄 미처 몰랐다.
창원에서 출발하여 함양에 도착할 때까지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차를 세웠다.
휴게소에 대한 예의라고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억지를 부렸다.
산청 휴게소에서는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의 징조도 없었고 아늑한 편함이 계속될 줄 알았다.
차는 잘 달렸다.
88고속도로에 접어들자 빈속일 줄 알았던 뱃속에서 아우성이 다시 시작되었다.
88고속도로는 팔팔하게 달릴 수 없었고, 뱃속은 팔팔 끓었다.
곁에서 하는 말소리가 처음에는 팔팔하게 들리더니, 점점 아득히 가늘게 들렸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마침내 먹통이 되어 갔다.
식은땀을 흘리며 괄약근이 한계점에 이르렀을 때,
아득한 정신에서 단 하나의 집념으로 화장실을 향한 또 한 번의 전력 질주를 했다.
뱀사골 단풍을 보기 위한 눈물겨운 아침이었다.
다시는 이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
쪼그리고 앉아 다짐하고 다짐했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온전하게 내디딜 수 있게 되었으니
다 지리산신령님 덕분이라고 깊이 감사하며 걸었다.
약의 효과(?)를 다 잊을 만큼 뱀사골 화려한 길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빈 뱃속에는 단풍의 단내가 들어차는 듯했다.
마치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다른 세상에 들어 온 것 같았다.
단풍의 세상으로 깊이 들어갔다.
걸어서 들어가는 그곳에서는 다른 일체의 생각들이 중단되었다.
몰입한 시간 만큼 천천히 걸었다.
눈이 내리듯 나뭇잎이 떨어지는 게 좋다고 말했더니
말이 떨어지자마자 함박눈이 내리듯 잎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내린 수많은 별들이 땅에서 흩날렸다.
술이 땡기지 않았다.
이미 취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풍경을 어떻게 말해야 합당한 언어가 될까 생각했지만
내가 가진 어떤 단어로도 적절하게 가져다 붙일 수 없었다.
기어이 새어 나온 말은
"ㅆㅂ 진짜 더럽게 좋네!."였다.
단풍.
기온이 0℃ 부근으로 떨어지면 나무는 엽록소의 생산을 중지하고
잎 안에 안토시아닌을 형성하여 붉은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안토시아닌 색소를 만들지 못하는 나무들은 비교적 안정성이 있는 노란색과
등색의 카로틴 및 크산토필 색소를 나타내게 되어 투명한 노랑의 잎으로 변한다.
또한, 붉은색의 안토시아닌과 노란색의 카로틴이 혼합되면 화려한 주홍색이 되는데
이것은 단풍나무류에서 관찰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토시아닌, 카로틴, 크산토필, 이딴 게 무엇인지 내 모르겠다.
말라 비틀어지기 직전 온몸 불사르듯 타오르는 저것들이 고통인지
환희인지 그것도 내 모르겠다.
다만 내 눈에는 황홀하고 감탄할 만한 현상이다.
2006년 10월 뱀사골 대피소는 대피소였다.
2015년 10월 18일 뱀사골 대피소는 대피소가 아니었다.
입구에는 출입금지 푯말이 붙어 있었다.
요즘은 경찰서도 마음대로 들어가 화장실을 이용하기도 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얻어 마시기도 한다.
심지어 간 큰 어떤 분들은 깽판도 친다.
술이 많이 취한 착한 놈은 집까지 태워도 준다.
당연한 이런 세상에
국립공원은 다른 나라인가? 자기들만의 특권인가?
들어가지 못하고 금줄 아래 땅바닥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는
한 산꾼의 모습이 가당찮아 보였다.
화개재에 올라섰다.
산은 노랗고, 산은 붉었다.
산은 제대로 단풍이 들어 있었다.
오늘 굶고 내일 두 끼를 한번에 먹는다 하여
오늘 굶은 밥이 내일 보상 되지는 않는다.
미루지 말 일이다.
지금 사랑하고, 지금 말하고, 지금 가야 할 일이다.
내일로 미루면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 온다.
미루지 않고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
화개재 계단을 올랐다. 마의 계단 구간이라고도 했다.
550계단이라고들 하더라만.
정확하게 몇 개쯤 될까?
6번째 오르는 이 계단을 한 번도 세어보지는 않았다.
숨차고 다리가 뻐근하도록 계단은 독했다.
독한 계단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독하게 올랐다.
반야 중봉 아래 묘향암 지붕이 큰 단풍잎처럼 반짝였다.
삼도봉에서 답지님을 만났다.
그야말로 맨발로 쫓아 나와 손을 잡았다.
새벽 일찍 뱀사골을 올라와 화개재에서 느긋하게 쉬고 삼도봉에서
또다시 쉬고 있다고 했다.
우연한 조우는 큰 반가움이다.
반가움만 앞서다 보니 시원한 맥주 한잔 나누지 못했다.
삼도봉에 앉아 느긋하게 산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산꾼답고, 산꾼다운, 지리산꾼이었다.
무엇 하나 건네 드릴 생각을 미처 못하고 짧은 만남을 뒤로했다.
또 만날 날이 있으리니.
만산홍엽 [
만산홍엽의 토끼봉 능선 넘어 남부능선이 길게 요동치며 뻗어 내렸다.
촛대봉과 상봉이 또렷이 보일 만큼 조망은 풍부했다.
그냥 퍼질러 앉아 하염없이 바라다보고만 있고 싶었다.
그래도 충분할 만큼 쉬이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ㅆㅂ 진짜 더럽게 좋네!"
좌측 토끼봉 능선과 우측 불무장등 능선 사이로 연동골이 지그재그로 흘렀다.
불무장등 아래로 빨치산의 통곡이 메아리칠 듯한 통꼭봉이 매달렸다가
당재를 지나며 황장산으로 다시 솟았다.
황장산은 하동의 화개까지 달려서 섬진강에 닿는다.
주능선을 따라 노고단도 물들어 가고 있었다.
삼도봉을 지나 묘향암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 들었다.
사면을 굽이 돌아가며 별로 높낮이 없이 묘향암에 닿는 길에 간식을 챙겨 먹었다.
지나온 삼도봉이 뒤통수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길은 반들거렸다.
묘향암이다.
2006년10월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본 묘향암.
황금빛 지붕은 단풍색보다 더욱 빛나고 있었고,
사람 그림자 없는 빈 절집은 적막하고 고요했다.
고요함을 차마 깨울 수 없는 발걸음들은 얌전했다.
물 한 병씩을 뜨고 소리 없이 물러났다.
묘향암에서 바라본 명선북능 넘어 영신봉과촛대봉, 연하봉.
꼭대기만 보이는 상봉과 중봉.
반야 중봉으로 올라서는 길은 가팔랐다.
이 오르막을 다 오를 때까지는 술을 먹지 말자고 했었다.
숨차도록 가파른 길에서 술을 먹지 않았음이 천만다행이라고 에스테야 형님이 인정했다.
마주 내려오던 사람들이 놀라서 당황했고
올라가는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휴식을 짧게 했다.
몇 번을 쉬며 뒤돌아 주능을 조망했다.
반야 중봉 헬기장에 올라섰다.
반야봉을 아무도 다녀오려 하지 않았다.
반야 중봉에서 도계능선을 따라 내려오던 길이 심원 방향으로
능선을 하나 더 내린 삼거리에서 심원능선으로 길을 잡았다.
길은 양호했다.
길은 길답게 깔려 있었다.
산죽이 간혹 길목을 지켰으나 능히 몸이 감당해 낼만했다.
풀어헤친 머리같이 가지가 난잡한 소나무를 지나갔다.
내림길의 지루함과 피곤함이 엉겨 붙었다.
정리가 잘된 묘를 지나왔다.
작년 9월 독오당 정기 산행 때 봉산골을 올라 하산 한 길이다.
에스테야 형님은 이 길을 와 본 것 같다고 했다.
확신하지 못하는 형님을 골려 주려고 한 번도 안 온 길이라고 말했더니
그런 줄 알았는지 말이 없었다.
하산하면 그때 왔었던 길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급경사 없이 내려가기 좋은 길을 한 시간 정도 내렸다
심원계곡으로 마지막에 쏟아져 내린 비탈을 헤집고 나서
심원계곡으로 내려섰다.
심원마을 음식점에서 유랑팀이 백숙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심원계곡에서 대충 털어내듯 씻었다.
계곡 저넘어 어둠이 짙어지고, 실눈을 뜬 달이 점점 밝아져 오고 있었다.
뱀사골 단풍의 여운이 담긴 소주는 달디단 맛이 났다.
"ㅆㅂ 술맛도 더럽게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