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6 한신지곡
한신지계곡.
일시:2015년 8월 16일 (일요일)
산행자:상가식구 4명+귀소본능.(총 5명)
걸어간 길(기록:귀소본능):
04:00 창원 출발
06:00 백무동 주차장 도착 / 산행시작 (515m)
06:50 첫나들이폭포 (715m)
07:15 한신지곡 초입 (800m)
07:30 구선폭포 (865m) / 아침(30')
09:40 천령폭포 (1080m)
10:40 합수부 (1180m)
11:05 내림폭포 (1280m)
11:30 함양폭포 (1340m)
11:35 장군대 (1345m) / 점심 (90')
14:15 백무동 등산로 능선 (1645m)
15:45 소지봉 (1285m)
16:00 참샘 (1125m)
16:30 하동바위 (930m)
17:10 백무동 야영장 (565m)
17:20 백무동 주차장 도착 산행끝 /
산행시간:11시간 20분 (운행+오찬+휴식)
지리산가.
- 정규화 -
산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이
산보다 앞서서
산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랴.
사람 사는 얘기로
가슴 맺히면
골짜기로 기어들어가도
하늘을 제압하고픈 날이면
등성이를 추스렸다.
한번 웃으면
청학이 와서 놀았고
한번 성을 내면
산비탈마다 즐비하게 해골이 뒹굴었다.
저기서 수천년 푸르렀지만
때에 절거나 훼절을 하지 않은 산이
하늘을 받친다고
모두 기둥이 아닌 것을
불혹에 처음 묻다니,
마음을 씻자면 저 산을
내려와야 하는가 올라가야 하는가
이제 지리산이 대답할 차례다.
<사진:귀소본능>
귀소본능이 상가식구들과 동행을 했다.
발목 상태가 점점 좋아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한 내가 원군을 청했다.
귀소본능은 담낭제거 수술과 발목 부상 등 최근 몸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지리산 욕심을 접지 못하고 조금은 먼 길을 무리하며 함께 했다.
나로서는 든든한 원군을 얻었고, 본능은 자기의 몸 상태를 점검하고자 했다.
피서 인파와 등산객이 이른 시간임에도 북적이는 백무동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일부러 맞춘 것처럼 산행 시작이 정확히 6시였다.
백무동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정규등로를 올라갔다.
2012년 7월 에스테야 형님과 둘이 한신지곡을 올랐었다.
장터목 세석을 거처 한신주계곡으로
하산을 한 그 날도 폭염 속 11시간을 넘기는 긴 산행이었다.
벌써 3년이나 지난 일이 되어 버렸다.
돌이켜 보면 세월은 참으로 빠르다.
우리 일행 이외 등산객이 거의 없고 가벼운 산책으로
내려오는 사람들과 간혹 마주치며 걷는 동안 옛 기억을 떠올렸다.
출렁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백무동계곡은 깊었다.
사람(人)이 산(山)에 오르면 선인(仙人)이 되고
사람(人)이 골짜기(谷)에 들면 속인(俗人)이 된다 했다.
높은 산을 찾는 선인과 넓은 산을 맴도는 속인을 지리산은 모두 받아들인다.
덕평봉에서 발원한 작은새골, 칠선봉 부근에서 발원한 큰새골이 백무동으로 흐른다.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에서 발원한 한신주계곡 본류와
연하봉과 제석봉에서 흘러온 한신지곡이
가내소폭포 부근에서 만난다.
크게 이 네 갈래의 물줄기가 하나로 모여 이루어진 계곡이 백무동계곡이다.
백무동은 엄천강을 그치고 경호강을 지나 낙동강으로 간다.
출렁다리를 건너갔다.
걸음을 옮길 때 마다 다리는 흔들렸다.
내 걸음에 남들이 흔들렸고, 남의 걸음에 내가 흔들렸다.
내가 남을 흔들고, 나스스로 나를 흔들고, 남이 또한 나를 흔들었다.
아침마다 굳건히 일어서고 저녁마다 쓰러지는 요즘의
흔들리는 내가 보였다.
백무동에서 겨우 1km를 올라와 배낭을 내리고 첫 휴식을 했다.
계곡으로 내려가 본능이 사진을 찍었고
나는 국립공원에서는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했다.
나는 금기의 선을 자주 넘는다.
선택할 수 없거나 해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선을 넘고 싶은 욕망이 강하다.
구조목 11-5를 지나고 가내소폭포 방향 다리를 건너기 직전 합수부 왼쪽
한신지계곡으로 발걸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지곡의 초입은 능선의 사면을 따라가다 곧 계곡으로 내려설 수 있게 길이 열여 있었다.
한신지곡으로 내려섰다.
본격적인 지곡의 계곡치기가 시작되었다.
바위는 미끄럽지 않았고, 밟고 건너기에 충분하도록 말라 있었다.
다른 계곡에 비해 이끼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우리의 걸음 뒤로 밀려 멀어져 갔다.
하나의 폭포를 뒤로 보낼 때마다 깊고 긴 계곡은 비슷비슷한 폭포를
하나씩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계속해서 나타나는 소와 폭포로 걸음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8월의 땡볕이 다 스며들지 못한 계곡에서는
조금만 쉬어도 땀이 금방 사그라들었다.
하물며 앉아 쉬는 동안에 춥다고까지 했다.
계곡을 치고 오를 수 없는 곳에는 좌.우측으로 우회의 길이 존재했다.
이것은 길이 만들어질 때의 기본이다.
삶에서도 옆으로 비켜서야 할 때와 장애물을 돌아 우회할 때를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이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오르는 데만 전념하다
상처 입고 피 흘리며 미끄러진 여러 번의 경험을 하면서 살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험에서 터득된 요령도 함께 늘어 가는 것이다.
앞에 선 내 뒤를 따라 왔다.
내가 건너뛴 곳에서 모두가 똑같이 건너뛰었다.
앞에선 자의 걸음이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다.
라면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독오당산행에 아침은 매식으로 늘 식당을 찾아간다.
상가식구는 아침을 준비해 산행 시작 전에 먹거나 산행 중에 먹었다.
라면으로 때운 한 끼니지만 포만감은 지곡의 폭포 물줄기만큼 그득했다.
팔팔폭포라 했다.
지형도에는 천령폭포라 되어 있으나 오기가 분명했다.
귀소본능은 뒤에서 식구들의 모습을 기록했다.
수많은 폭포를 하나하나 넘을 때마다 탄성이 계속되었다.
계곡을 치고 오르는 재미를 최대한 느꼈고 즐겼다.
천령폭포.
천령은 함양의 옛 지명이라 했다.
직등의 길이 없었다.
우측으로 우회를 선택했다.
선답자들의 걸음이 명료한 길 위에는 리본이 달려 그 명료함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곧게 선 능선의 우회 길은 돌이 흘러내리는 지점으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요구했다.
계속해서 귀소본능은 뒤에 있었다.
중간중간 발목의 상태를 물었고 괜찮다는 대답을 했다.
미끄러져 계곡 물 속에 한번 드러누운 최셰프의 옷이 말라 갔다.
바위 위에 무릎을 찧은 성셰프도 걱정과는 달리 걷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뒤에 귀소본능도 한차례 넘어졌었다고 했다.
아침을 먹기 전 잔을 올리고 다치지 않는 무사함을 빌었던 탓인지
그만하기 다행이라는 생각했다.
내림폭포.
높이는 최소 50m가 넘어 보였다.
45도의 경사를 이룬 거대한 바윗덩어리 위로 물이 흘러내리는 암괴 가운데로 몇 갈래의 긴 홈이 파여
있어 속으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각자 폭포의 옆과 가운데로 붙어서 올랐다.
잡을 것이 마땅치 않은 곳에서는 손과 발을 이용해 기어올랐다.
바위틈에 작은 야생화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꽃을 피운 곳도 보였다.
이 구간 힘은 많이 들지 않고 계곡산행의 재미는 깊었다.
아래에서 본능이 카메라를 조준했고
우리는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했다.
위에서 올라오는 귀소본능을 기다렸다.
괜찮은지를 살폈고 이상이 없음을 몇 번이고 확인시켜주었다.
속도를 내지 않는 본능은 자신의 몸에 맞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괜한 나의 동행 요청이 미안해졌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이 어떠할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능은 일행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을 하는 듯했으나
식구들은 그의 느린 걸음을 오히려 반겨 좋아했다.
오래되어 떨어진 안내 표지판을 누군가 바위에다
방향을 맞추어 놓은 것 처럼 보였다.
산행 중 만나는 시그널이 뵙는 듯 반가웠다.
함양폭포.
좌측으로 난 트랙을 따르지 않고 계곡을 고집해 올라
함양폭포에 이러럿다.
주위의 소리를 다 빨아들이는 울림은 귀가 멍할 정도로 크고 웅장했다.
거대한 장군대 바위 아래 은둔의 폭포는 계곡의 깊이 만큼 은밀했다.
그대, 꽃으로 부활하다.
40분 더 계곡을 올라 수십 미터나 되는 거대한 장군바위 밑 ‘함양폭포’아래 선다.
이렇게 은밀한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2단 폭포하나를 또 숨겨둔 것이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온몸의 신경이 잠시 멎어버릴 듯한 아찔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더 놀란 것은 폭포 앞, 또 하나의 집채 만 한 바위 상단에
파란 동판 조형물이 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는 이런 글귀를 새겨 놓았다.
고 김은지
아름다운 山 우리의 꿈,
함께 오르다
여기 꽃으로 피다.
1985.9.7
전북학생 산악연맹
그런 일이 있었구나.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을 오르던 젊은 영혼이 지리산 장군바위 밑에서 꽃잎처럼 스러졌구나.
한 번도 본적도 만나적도 없지만 그녀는 분명 이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예뻤을 것이고, 착하고 성실했을 것이고, 주변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아름다운 인생을 설계한 건강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스산한 9월의 영혼이지만 풍요로운 6월에 만나니 해맑은 꽃 한 송이를 만나는 기분이다.
모두가 지리산을 함께 사랑한 인연 때문이 아닌가.
떠나면서 이런 기도하나 남긴다.
그대 산이 그리워
산으로 우뚝 섰구나
여기 지리산의 심장, 한신지곡
장군대에 그대 영혼 서렸으니
한 송이 꽃으로 부활 했도다
그대 사랑한 지리의 품속에서
고이고이
평화로이 영면하소서.
산나그네 당수님의 두번째 수필집 <지리산 빗점골의 가을>중
어쩌면 지리구구 식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지금은 50대 초반의 나이로 이곳 장군대에서 함께 술잔을 주고받을 수도 있었겠다.
지리산 어느 자락에서 만나면 반가운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하며 지리산을 함께 걸을 수도 있었겠다.
잠시, 안타까움의 마음을 담아 영면을 기원했다.
함양폭포를 돌아 나와 장군대로 올랐다.
바위 아래를 돌아 올라가게 되어 있는 길은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쉽게 오를 수 있으나 쉽게 길을 놓칠 수도 있었다.
일정한 한 곳의 길로 다니지 않고 지나간 무수한 발자국이 옆길을 만든 탓이다.
장군대에서 점심상을 차렸다.
올라올 때의 수고스러움이 사라지는 보상은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조망이다.
긴 시간 여유롭게 밥을 먹었다.
다 먹지 못할 만큼 풍족함이 넘쳤다.
출발을 빨리한 만큼 산속에서 보내는 시간은 여유로웠다.
하동바위길 백무동 등산로를 향해 올라갔다.
계곡을 좌측에 두고 오르는 길이 트랙과는 괴리를 보였지만
길은 너무나 선명했다.
예전에 올랐든 길은 충실히 트랙을 따라갔었다.
트랙의 길이 주능 끝자락 즘에서 만날 것 같다는 예상은 적중했다.
백무동 주등로로 나오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이상하게 바라보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주등로에 붙고 일행이 다 모여 다시 출발했다.
이제는 구조목의 표지를 읽어내는 식구들이 먼저 백무동까지 남은 거리가 5.5km라고 말했다.
주능선의 장터목이 살짝 보였다.
참샘까지 내려오는 길이 지겨웠다.
지나쳐 가는 사람들이 많았고
뒤에서 우리를 추월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내주며 천천히 걸었다.
참샘에서 한 모금씩 물을 마셨고 배낭을 내리고 쉬었다.
참샘을 지나 하동바위에 도착했다.
하동바위.
그 옛날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남쪽 지방 사람들과 북쪽 사람들이 1년에 한 차례씩 장날을 정해
서로 필요한 물건을 사고팔던 곳이 해발 1750m의 장터목이다.
남쪽 사람들이 산정의 장터로 가는 길은 대개 덕산-중산리-장터목 또는
화개-세석-장터목코스를 이용한 반면 북쪽 사람들은 마천-백무동-하동바위-장터목 길을 이용했다.
산정에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서던 장날로 생겨난 바위가 있는데
바로 북쪽 사람들이 가던 길목에 서 있는 하동바위가 그것이다.
행정구역상 분명 함양군에 있는데도 바위 이름이 산 너머 하동군의 지명을 딴「하동바위」로 명명된 데는
장터목의 장날과 관련한 설화에 따른 것으로 전해진다.
백무동 마을에서 한신계곡으로 가는 길목 초입에서 왼쪽으로 2Km 남짓 오르면
산 가운데 우뚝 버티고 서 있는 하동바위에 얽힌 설화는 이렇다.
아득한 옛날 장터목에 장이 서던 날 함양 원님과 하동 원님이 산 좋고 물 좋은
지리산 상의 장날을 둘러보기 위해 장터로 행했다.
풍류를 잘 알았던 두 원님은 뜻밖의 만남에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한바탕 놀음을 즐기기로 하고 내기 장기(혹은 바둑)를 두게 됐다.
산상의 내기 장기는 차, 포 양수겸장을 부른 하동 원님의 압승으로 끝났다.
내기에 진 함양 원님은 수중에 내놓을 만한 변변한 것이 없던 터에
승자를 놀려줄 요량으로 눈앞에 우뚝 선 바위를 가져가라고 말했다.
설마 바위를 가져갈 수야 있겠느냐는 투였다.
하동 원님은 이에 뒤질세라 고맙다며 그 자리에서
이 바위를 하동의 지명을 따 하동사람들의 바위란 뜻으로 「하동바위」로 이름해 버린 것이
그만 함양 땅에 있으면서도 산 너머 하동바위가 되고 만 것이다.
길고 긴 하산길 백무동 주등로 돌길은 팍팍했고 발목과 무릎이 뻐근했다.
지루한 하산길이 지겹도록 길다고 느꼈다.
이정목의 남은 거리 몇 킬로가 잘못 된 게 아닐까?.
몇 번을 생각했었다.
야영장 주변에 도착하자 왁자한 사람 소리가 들였다.
다 내려왔다는 마음에 사람 소리가 반가웠다.
마지막 하산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땅히 씻을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결국 백무동 주차장 아래로 내려갔다.
씻고 올라와 안 사실이지만 위에서 볼 수 있게 CCTV가 있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보았거나 말았거나,
씻고 나니 상쾌했고 기분이 좋았다.
맥주 한 잔이 간절하였으나 저녁을 먹을 때까지 참았다.
어두워진 뒤 저녁을 먹었다.
나 이외에는 먹지 못하거나 먹지 않는 소주 한 병을 혼자서 다 비웠다.
짜릿한 뱃속에, 폭포소리 생생한 머릿속에 지리산이 가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