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19 지리산 둘레길(덕산-하동호)
지리산 둘레길 7.
일시:2015년 7월 19일 (일요일)
산행자:상가식구 8명 +guest :에스테야님 (총 9명)
걸어간 길:덕산 천평교-중태-갈치재-위태 (9코스: 9.7km)-지네재-궁항-양이터재
본촌(나본마을)-하동호 (10코스: 12.3km)
시간및 거리:06시 42분~16시 53분.(휴식,식사시간 포함 10시간 10분) Oruxmaps 거리: 22km.
2015-07-19 지둘7 (9,10구간 덕산-하동호).gpx
2015-07-19 지둘7 (9,10구간 덕산-하동호).gtm
남명은 1555년(명종 10년) 55세 때 덕산에서 ‘단성소’(丹城疏)를 올린다.
“나라의 근본은 없어졌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떠나버렸다.
큰 고목이 백 년 동안 벌레에 먹혀서 그 진이 다 말라버렸으니 언제 폭풍우를 만나 쓰러질지 모른다.
(중략)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로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다.
오장육부가 썩어…나라의 형세가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중략)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하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렵니까.
(중략)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왕조시대 절대권력을 향해 목숨을 건 돌직구의 직언이다.
작금의 현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460년 전 선생은 시대의 어른이었다.
이 시대 바른말 하는 어른이 절실히 필요하다.
보잘것없는 범부의 인생이 논할 말은 아니니
각설하겠다.
시천면 소재지인 덕산이란 지명은 남명이 지었다.
덕을 쌓을 수 있는 땅이란 뜻이다.
천평교를 건너면 이와 일맥상통하는 ‘금환락지’라는 대형 이정석이 서 있다.
선녀가 목욕 후 하늘로 오르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터란 의미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염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유토피아 무릉도원(武陵桃源)은
바로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곳이라는 남명선생의 가르침이다.
덕산 천평교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둘레길에 다시 선다.
무릉도원은 언감생심 꿈조차 꾸지 않는다.
단지, 이 길을 걷는 동안만 시시콜콜한 잡스러움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이면 흡족하고 만족한다.
그러고 보면 이 또한 무릉을 찾아가는 길인가?
상가식구와 에스테야 형님이 동행한다.
덕천강을 따라 포장도로를 걷는다.
등 뒤 구곡산과
아스라이 보이던 천왕봉도, 가야 할 길과 산천도
짙은 안갯속에 묻혔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우리네 앞날이 별반 다르지 않다.
겁내지 말자.
기죽지 말자.
걱정하지 말자.
조급해하지 말자.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덕산 천평교를 출발해 송하마을(하평)을 지난다. (6시 42분)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서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까지
낙동강수계인 덕천강을 만나고 두방산의 경치도 감상하면서
걷는 9.7km의 지리산 둘레길 9코스다.
시천면 사리 원리, 천평, 중태, 옥종면 위태(상촌)마을을 지나게 된다.
길 옆에서 흘러 내리는 샘터에 옥수라는 이름이 박혀 있다.
중태마을 안내소. (7시 53분)
걸음이 늦은 막내가 올 때까지 한차례 쉬면서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길가의 야생화를 들먹이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걸어오는 동안 에스테야 형님은
특유의 친숙함과 친절함으로
1시간여 만에 상가식구들을 모조리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금주 부작용인 금단 증세로 정신이 올바르지 못한 나를 한순간에
개뿔도 없는 산대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중태마을 안내소에서 배낭을 내리고 쉰다.
안내소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아무도 없고
문은 잠겼다.
색깔이 다르다고 우기는 에스테야 형님에게
만일 이 꽃이 능소화가 아니면 오른쪽 손목을 걸겠다고 했다.
꼬리를 내렸다.
오대주산과 주산이 같은 산이라고 우기는 에스테야 형님에게
오른쪽 손모가지를 또 걸었다.
또 꼬랑지를 내렸다.
상가식구들에게 형님은 수야의 말은 반만 믿으면 된다고 강조하지만
주산을 천왕봉이라 해도 내 말을 믿는다.
식구들은 산행기를 읽어 이미 다 안다.
오 데 써 !
좁은 길이라 오가는 차량에 바짝 신경을 써야 한다.
유점마을을 지나간다.
예전에 유기(놋그릇)를 만들었다고 놋점이라 불리기도 한다.
금농님이 한 번씩 찍어 보길래 따라 해 보았다.
둘레길은 여유가 있어 좋다.
정자가 있다는 이유로 잠시 앉아 쉬어간다.
갈치재 (9시 24분).
유점마을의 마지막 집을 지나면 임도가 시작된다.
길은 임도를 따라 이어지다가 소릿길로 들어서고 중태재를 넘는다.
이 재를 산청사람들은 위태재라 부르고 하동사람들은 중태재라 부른다.
이 재를 넘으며 하동과 산청을 오가는 것이다.
9구간의 최고 고도다.
겨우 420m이지만 땀이 줄줄 흐른다.
덕산 7km를 걸어 왔고, 위태까지 2.7km가 남았다.
갈치재에서 만난 분들이다.
사진은 허락을 받았다.
위의 분에게 부탁을 해 한 장 찍었다.
갈치재를 넘어 하동 땅으로 들어선다.
갈치재의 어원은 알지 못한다.
구례에서 시작한 둘레길이 함양군을 거쳐 산청군을 넘고 이제 하동군에
발을 옮겨 놓는 순간이다.
조금의 경사를 내려서니 대나무숲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논밭이었던 곳인데 이제 대밭이 돼 버렸다.
아직까지 돌로 쌓은 논밭의 형태가 남아 있다.
대나무.
옛날 어느 작은 마을에 큰부자가 하나 있었다. 작은 마을에 큰부자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마을의 논밭이며 산이 모두 그 부자의 것이었고, 삼십여 가구 사람들은 모두 그 집의 종이나 마찬가지인 소작인들이었다. 그 부자는 어찌나 욕심이 많고 마음이 혹독한지 추수 때 나락을 받아들이며 자기가 보는 앞에서 일일이 말질을 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말을 쿵쿵 두 차례씩 다지게 했다. 자기 산에서는 솔가지 하나 꺾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솔잎 한 갈퀴 긁어내지 못하게 단속을 했다. 동네사람들은 나무 한짐을 하자면 몇 십리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소작인들의 닭을 예사로 잡아갔고, 자기 집 잔치에 돼지를 추렴시키고는 했다. 그런 그가 흉년이 들었다고 해서 소작료에 사정을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해도 아니고 내리 삼년을 흉작이 덮쳐왔다. 빚 무서운 줄 알면서도 굶어 죽을 수는 없어 두 해에 걸쳐 빌어다 먹은 장리쌀 빚이 있는데다가 또 흉년이 겹쳐 소작료에 장리빚 이자만을 합쳐 나락을 바치더라도 사람들은 거의가 굶어죽게 될 형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리빚을 내년으로 연기해주거나, 그것이 아니면 소작료 반을 일년 동안 연기해 달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그 사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은 추수가 끝나고 오히려 굶주리기 시작했다. 겨울이 닥치는데 그대로 굶어 죽을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몇 차례나 지주를 찾아가 장리쌀을 풀어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지주는 쌀쌀하게 고개를 저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죽마저 끓일 수 없는 집들이 늘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세 남자가 부자집 담을 넘어갔다가 그 집 하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다음날 세 남자는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자집하인들에게 맞아죽었다. 그일이 있고 부터 그 누구도 부자집 창고를 넘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여섯 남자가 비밀리에 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 굴은 부자집 창고를 향하여 뚫려 나갔다. 죽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도 여섯 사람은 사생결단 굴을 파서 마침내 창고 아래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살가마니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창고에 차곡차곡 쌓인 쌀가마니 무게로 굴이 무너지고만 것이다. 결국 여섯 사람은 쌀가마니에 갈려 죽은 것이었다. 부자집 종들이 파낸 시체들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모두 한구덩이에 매장되었다. 그리고 여섯 사람의 가족들은 마을에서 강제로 내몰렸다. 그것은 부자가 분풀이를 한 것만이 아니었다. 농사지을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그 가족은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 집 저 집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노인네들이 죽어갔고, 아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부자집으로 몰려가 제발 살려달라고 애걸하고 애걸했지만 대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겨울이 지나고 났을 때 동네 사람들은 삼할 정도가 굶어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영양실조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서야 농사지을 일이 걱정이 된 부자는 장리쌀을 풀어 내놓았다. 그런데, 땅에서 싹이 돋고 나무에서 움이 트기 시작하면서 동네 이곳저곳에서는 이상야릇한 일이 벌어졌다. 전에볼 수 없었던 괴상스럽게 생긴 싹이 돋아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잎도 줄기도 없이, 성낸새벽 남근같이 생긴 그 싹은 부자집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안방 구들을 뚫고도 솟았고, 창고 쌀가마니를 뚫고도 솟았다. 부자는 종들에게 그 싹을 다 쳐없애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그다음날이면 다른 싹이 돋아올랐고, 쳐내고 나면 또 다른 싹이 돋아올랐다. 여름이 되자 부자집은 그 이름 모를 나무로 가득차 완전히 폐가가 되었고, 농토에도 빽빽이 들어차 농사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부자가 마을을 뜬다는 소문이 퍼졌다.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졌으므로 소작인들도 마을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밤이었다. 동네 남자들은 꿈을 꾸었다. 맞아죽은 세 사람과 굴에 파묻혀 죽은 여섯 사람이 함께 나타나서, 배곯는것도 서러운데 우리는 죽음도 너무 원통절통하게 했다. 우리는 가슴에 서리서리 맺힌 한을풀 길이 없어 나무로 환생을 했다. 먹을 것은 전부 부자놈한테 뺏기고 배를 곯을 대로 곯아 겉모양만 사람이었지 속은 텅텅 비었던 생전의 꼴새 그대로 환생한 까닭에 나무속도 마디마다 텅텅 비어있다. 나무를 잘라보면 알것이니 놀라지 마라. 그 나무를 길게 잘라 한쪽 끝을뾰족하게 다듬어 그것으로 부자놈 배째기를 찔러 죽여라. 그리고 빈 통에 그놈의 피를 채워 우리 묻힌 자리에 뿌려주면 맺힌 한을 풀고 저승길을 편히 갈 것이다. 부자놈이 떠나기 전에 당장 우리 원수를 갚아라. 너희들은 우리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이번에도 우리 원수를 갚아주지 않으면 화가 너희들에게 미칠 것이다. 이런 말을 남기고 아홉사람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꿈이 하도 기이하고 생생해 남자들은 일시에 잠이 깨었고, 옆집 옆집으로 연락을 취해 다 한자리에 모여앉고 나서 모두 똑같은 꿈을 꾼 줄 알게 되었다. 남자들은 망자들의 뜻을 따라 원수를 갚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나무를 잘랐고, 나무는 과연 속이 텅텅 비어 있었다. 남자들은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 창을 만들고 들어 어둠을헤쳐 부자집으로 쳐들어갔다. 부자는 창에 전신을 찔려 죽었고 창을 뺐을 때는 그 빈통에 부자의 피가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피는 아홉 사람이 묻힌 자리에 뿌려졌다. 며칠 뒤에 마을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농토에 솟은 그 나무들이 노란 꽃을 피우더니만 꽃이지면서 그 나무들도 죽어갔다. 왜 하필 농토에 솟은 나무들만 죽는지를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노란 꽃은 한을 푼 넋들의 승천이고, 나무들이 말라죽은 것은 다시 농사를 짓고 살라는 뜻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죽은 나무숲에 불을 질러 다시 농토를 일군 다음 골고루 몫을 나누었다. 그런데 그 농토는 전보다 훨씬 기름져 곡식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누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망자들의 넋에 고마워하며 추수 첫 곡식으로 제사장을 걸고 정성스럽게 차렸으며, 그 나무는 옮겨심는 사람도 없는데 해마다 이 고을, 저 고을로 번창해나갔다. 누가 이름지었는지 모른 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대나무'라 부르게 되었다. 대를 물린 가난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기도 했고, 남들 대신 죽어 남을 이롭게 한 넋의 환생이란 뜻이라 말하기도 했다. 대나무는 가난한 소작인의 넋이라서 춥고 배고픈 것을 싫어해 기온이 따뜻하고 농지가 넓은 땅에만 산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에 댓잎들이 유난히 서걱거리는 것은 '추워, 배고파, 옷 줘, 밥 줘'하는 넋들의 읇조림이라고 했다. 소설 '태백산맥' 중에서... 다우 형님의 산행기에도 있었던 전설을 한 번 더 옮겨 본다. |
대나무밭의 끝에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실개천의 물은 아래 작은 저수지에 고인다.
우거진 대숲을 벗어나자 만나는 산속의 아담한 저수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가며 하늘이 고스란히 담긴 아담한 저수지의 풍경이 이채롭다.
이 지점 지형도에는 중택지로 되어있다.
중택지 저수지를 지나 20여m를 내려오니 다시 포장도로를 걷게 된다.
도로끝 까지 따라가면 위태마을이다.
논에서는 농약을 뿌리는 마을 사람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위태마을의 지명은 상촌이었는데 청암면에서 옥종면으로 편입되면서 이름이 위태로 변경되었다.
상촌에는 진등, 안몰, 중몰, 괴정지등의 여러 작은 마을이 있다.
갈치재는 위태리 사람들이 산청으로 장을 보러갔던 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진등마을 회관을 옆에 두고 간다.
59번 국도를 만나 우측으로 돌아선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마을 앞에 작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바라보게 되어있는 벤치에서 둘레길 9구간의 종점을 찍는다. (10시 20분)
간식을 나누며 자신들의 배낭에 것을 줄이기 위해 분주히 내놓는다.
과일이 줄었고 캔맥주가 줄었다
내 배낭은 그대로이다.
점심때 먹을 고기가 에스테야 형의 배낭으로 옮겨간다.
절대로 떠넘기지 않았으며
아우를 지극히 생각하는 형의 자발적인 행동이다.
난 단 한 번 의 거절 없이 바로 옮겨 드렸을 뿐이다.
다시 매는 배낭은 수척하여 가볍다.
수척해진 무게 만큼 행복해졌다.
이번 길은 두 개 코스를 간다.
하동호까지 내친걸음을 걷는다.
지리산 둘레길 10코스 구간이다.(10시 40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위태리와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하동호를 잇는 11.5km이다.
이제 지리산 남쪽을 걷는 길이다.
지리산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물들이 북쪽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은 섬진강이 된다.
위태마을 상수리나무당산.
언덕에 올라서니 상수리나무가 버티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여겨 당산제를 지내는 곳이다.
그 앞에 세워진 청석은 금줄을 거는 곳이다.
나무 그늘에 쉬고 계시던 마을 어른들이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사진:지리산 둘레길에서.>
민박집을 지나며 산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 지네골을 오른다.
지네골은 좁고 작은 계곡이다.
도로를 따라 걷는길 보다는 시원한 숲 속이고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라 좋다.
400m를 조금 넘는 고도가 1,000m급 처럼 막판 각을 세운다.
앞서 올라오는 길에 일광욕을 즐기러 나왔던 뱀 한 마리가 급하게 피한다.
뱀을 보면 거의 기절하다시피 하는 일행이 있어
멀리 쫓아 보낸다.
마치 등구재를 연상하는 재에 올라선다.
위태마을에서 1.9km 지점이다.
산의 지형이 지네를 닮아 지네재라 한단다.
오른쪽은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주산(831m)으로 가는 길이다.
과거 오대산으로 불렀다.
후미와 간격이 많이 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을 쉰다. (11시 12분)
오율마을 위 백궁선원 앞 갈림길에 도착 한다.
대숲에 넓은 쉼터가 있다.
그 아래로 계곡이 흘러간다.
백궁선원은 과거 오대사터였다.
남명을 비롯해 지리산을 유람객이 찾았던 곳이라 한다.
한 시절 남명은 살천(시천)에서 재를 넘어 오대사에 왔다.
이름자를 산기슭에 쓰기를 부끄러워했는데/
변변찮은 입 가지고 웃으며 절에 들렀다/
예로부터 사람의 인연 삼세(三世)에 얽힌 것/
반나절만에 돌아오며 적송자(신선)에 비긴다./
오대사에서 남명은 신선이 되기도 했다.
오대사 터에는 가지 않았다.
지네재를 올라서기 전까지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한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오율마을 계곡으로 내려섰다.
계곡에 붙은 정자에서 점심을 먹을 요량을 했으나 혹시라도 주인이 오면
궁색한 변명을 하기도 그렇고 해서 정자 옆에 자리를 펴고 점심상을 차린다.
여자들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쉬는 동안 남자들이 밥을 하고 고기를 굽는다.
말로만 모든 일을 다 하는 에스테야 형님은 당당하게 여자들을 불러올린다
마치 모든 것을 자기가 다 한 것처럼.
그렇다고 에스테야 형님이 전혀 아무것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의 성격상 쓰레기 하나도 허용하지 않고 깔끔하게 치운다.
흔적은 남김없이 자기 배낭에 챙긴다.
또, 마지막 설거지도 깔끔히 다 한다.
나는 모른 척 외면 하는 뺀질이 근성을 보이지만 형은 전혀 아니다.
며칠 동안 근처도 못 간 술잔을 내밀었다.
그래도 지리산 자락이다.
어찌 한 잔의 술도 없이 길을 걷겠는가.
에스테야 형이 잔에 반만을 채워주었다.
소심한 사람에게 가득 채워 달라 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형에게 가득 담아 주고 싶은 내 마음은 가득 채운 잔을 받아야
건넬 잔도 가득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형을 신뢰한다. (점심 1시간 30분)
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
"술 먹고 밥 먹을 때 형이니 동생이니 하는 친구는 천 명이나 있지만
급하고 어려울 때 막상 나를 도와줄 친구는 한 사람도 없다." -명심보감-
세상을 살면서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삼는가는 중요하다.
평소에 내게 그렇게 잘하던 사람이
막상 내게 시련이 닥치면 안면 몰수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나를 더욱 궁지로 몬다면
그로 인한 절망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사람은 변덕이 심하고 간사한 존재인지라
좋을 때는 마치 자신의 것을
모두 다 내어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져 봐야 소나무, 잣나무가
추운 겨울에 시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듯
힘들고 어려워져야 진정한 친구를 알 수 있게 된다.
- 박재희 교수 '3분 고전[古典]' 중에서 -
오율마을엔 서너 채의 민가가 있을 뿐이다.
마을을 벗어나 포장도로를 따라 폴더폰처럼 길이 우측으로 꺾인다.
연이어 도로에서 또 한 번 좌측으로 꺾어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경사 50도를 자랑하는 된비알이다.
배부런 오름은 죽을 맛이다.
끙끙거리며 올라 궁항마을로 넘어간다.
앞서 간 일행은 버려두고 산속에서 연결되어
내려오는 호스에 머리를 디리밀고 열을 식힌다.
쉬는 동안 에스테야 형이 길에 누웠다.
참으로 신기한 형이다.
머리가 땅에 닿자마자 바로 잠이 든다.
비슷한 또 한 사람이 있다.
우리끼리 살짝 일어나 멀리 떨어져 본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 배낭을 메고 많은 사람이 움직여도 모른다.
순식간에 깊이 잠이 든 두 사람을 차마 두고 갈 수 없어 소리쳐서 깨운다.
시멘트임도다.
길은 궁항마을까지 이어지다가 청암으로 가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와 연결된다.
궁항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앞에 선 일행과 다시 합류한다.
궁항리는 활목이라는 곳으로 주산 아래 유명한 오대사 절터가 있으며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로 철광맥이 있어 쇠를 구운 흔적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의 볼거리는 궁항댐이 있고 뒤로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주산이 있다.
마을 어른들과 벌써 친해진 앞서 온 일행들이 인사를 남긴다.
두 사람이 자진 희생하여 덕산으로 차량회수를 하러 간다.
나머지 7명은 다시 양이터재를 향한다. (2시 31분)
사실상 이 구간 최대 고도이며 난코스이다.
포장도로를 따라 줄기찬 오름이 이어진다.
달아오른 열기에 내뱉는 숨도 뜨겁다.
동학농민운동 때 양씨 이씨가 피란해 살았다는 양이터마을을 지나고 길은 계속된다.
된비알의 끝, 어느새 양이터재에 닿는다.
하동군 옥종면과 청암면을 잇는 재다.
주로 포장된 임도지만 대나무숲도 지난다.
낙남정맥이 이곳을 지난다.
10구간 마지막 등성이다.
지금까지 낙동강 수계였다면 이제부터는 섬진강 수계다.
그래서 양옆의 산등성이가 물길을 갈라내는 낙남정맥이 된다.
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해
남으로 삼신봉을 거쳐 양이터재에 닿은 뒤 옥종 진주 함안 여항산 김해 신어산으로 연결된다.
힘들게 올라서는 양이터재.(3시 26분)
양이터재에서 5분 정도 내려가다 시멘트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 활엽수림으로 들어선다.
숲길이다. 우측으로는 맑은 계곡이 시원스런 소리로 흘러내린다.
고불고불 이어지며 내려가는 오솔길에 이시기 피어나는
이름조차 알수없는 버섯이 지천이다.
대나무 숲을 또 지나간다. (3시 48분)
숲을 벗어난다.
양이터재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도로와 만난다.
한차례 쉬자고 했으나 산속 모기가 무차별적으로 돌진해 오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내려온 탓에 도로에서 배낭을 내린다.
나본마을 쉼터에 닿는다.
배낭을 던지고 쉼터에 퍼질러 앉거나 누워 잠시 쉰다.
에스테야 형의 카메라가 바쁘게 이곳저곳을 따라 다닌다.
나본마을은 풍수지리에 따르면 큰물을 만나는 곳이라고 한다.
하동호가 생겨 그 설을 입증해 주는 듯하다.
1993년 하동·사천지구 농업용수 공급용으로 물길을 막아 댐을 만들면서 하동호가 됐다.
고래실 상배몰 대밭몰 동촌 가마소 등 6개 마을 190세대가 물속에 잠겼다.
당시 주민들은 일부 남기도 했으나 갈사간척지로, 도회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옆으로 난 임도를 걷다 보면 편백과 대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만난다.
유심히 살펴보면 옛사람들이 논밭을 일군 흔적과 숯을 굽던 터를 볼 수 있다.
둘레길은 하동댐 수문 위로 이어진다.
개점휴업주인 청학콘도다.
초여름 숲속에서 짧은 분홍 실을 부챗살처럼 펼쳐놓고 마치 화장 솔을 벌려놓은 듯한 모습으로 만나는
이 꽃의 이름은 자귀나무이다.
에스테야 형님이 당당하게 가르쳐준 꽃이다.
밤에 서로 마주보는 잎사귀가 닫히는 것은 남녀가 사이좋게 안고 잠자는 모습을 연상시키므로,
옛사람들은 ‘야합수(夜合樹)’란 이름을 붙였다.
합환수나 합혼수라는 별칭도 같은 뜻이다.
그 외에 좌귀목(佐歸木)이라고도 하는데,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름은 좌귀나무,
자괴나모를 거쳐 자귀나무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궁항에서 차를 회수하러 간 일행이 도착하는 시간에 거의 같이 하동호 구간에 도착한다.
22km의 먼 길을 걷고 난 뒤에 신발부터 벗어들었다.
상가식구들과 함께 먼 길 변함없는 웃음과 배려로 함께해준 에스테야 형님에게 감사드린다.
한 번쯤은 이런 인사도 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아 하는 것이니
굳이 술을 사겠다거나 밥을 사겠다고 하면 절대 거절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을 좋아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주 많지만
싫어해서 얻을 수 있는 건 거의 없더라
좋은 인연과 좋게 살기도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