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6.14 오리정골
오리정골-벽소령.
일시:2015년 6월 14일(일요일).
산행자:상가식구 5명.
걸어간 길:(의신-연암 7시~8시 까지 1시간), 삼정-오리정골-바른재-벽소령-삼정.
산행시간:8시 42분~16시 59분 (8시간 17분) 오룩스맵 거리:12km.
덕평봉과 벽소령 능선 사이로 흘러내리는 오리정골.
삼정마을을 지나 첫 번째 골짜기이며 형제봉 남능과 벽소령 능선 사이의 천내골을
흔하게 서로 바꾸어 부르거나 표기한 산행기를 보았다.
오리정골을 덕평골로 쓰고 있음도 보았다.
지리구구의 자료를 찾아 나름 공부한바
천내골과 오리정골은 아래 지형도의 표기가 바른 게 아닐까 한다.
잘못 알고 있는 경우라면 지적 바란다.
이번 산행지는 천내골과 오리정골을 놓고 생각했다.
오리정골을 선택한 것은 일직선으로 쭉 오르는 선이 마음에 닿았기 때문이다.
바른재에서 바라보는 겹치는 세 당재를 볼 수 있음도 이유라면 이유다.
또한, 산행기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 겨울날.
푹푹 빠지는 눈이 쌓인 왼골을 올랐다.
토끼봉 명선봉을 거쳐 벽소령 작전도로를 따라 시간에 쫒겨 뛰기도 했다.
삼정으로 불을 켜고 내려오는 하산길에는 비를 맞고 걸었다.
그날 기억이 힘들었지만 좋았기 때문이다.
의신에서 아침을 먹고
빈 몸으로 연암을 올라간다.
새로 단장된 이후 처음이다.
발걸음 소리가 울리듯 크게 느껴지는 고요한 연암으로 들어서자
아침 공양 중인 스님께서 반겨 주신다.
인사를 드리자.
차 한잔 하고 가라 하신다.
향기로운 차와 더욱 향기로운 귀한 말씀을 듣는다.
연암난야 현판이 붙은 5평짜리 토굴은 단아했다.
정갈한 내부에는 좁지만 30명이 차를 마신 적도 있다 하실 만큼
세상의 통념과는 거리가 먼 넓이가 존재했다.
괜한 방문에 번잡스럽게 해드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마당에 핀 파초에 대한 설명을 마지막으로 한 시간 가까이 머물다 물러난다.
삼정마을 앞 공터에는 벌써 두 대의 차가 주차되어있다.
길가에 최대한 붙여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산행을 시작한다.
벽소령까지 4.1km의 표지판을 따라 마을 앞으로 난 길을 따른다.(8시 45분)
마을을 벗어나 바로 우측의 계곡 방향으로 목책을 넘는다.
나중에 내려올 길은 좌측의 정규등로라 말해 둔다.
몇 발자국 옮기자마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부드럽고 또렷한 길을 따라 첫 번째 계곡을 건너고,
계곡을 좌측에 두고 산길을 따른다. (8시 54분)
오리정골.
벽소령 아래 오리촌이라는 큰 마을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는 의신이나 신흥 보다도 아주 큰 마을이었다.
지리산의 남북을 잊는 교통로 상에 있었다.
오리촌이 큰 마을이었다는 것은 지금 남아있는 옛길의 크기나
완만하고도 넓은 골짝의 지형으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화계에서 음정으로 넘어가는 벽소령의 바로 아래 마을이기도 하거니와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바른재]의 길목이기도 하다.
문헌에 나오는 [오리촌]이 [오리정골]로 불리게 된 것은
의신의 <정대장>님 전언에 의존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오리촌에 정자가 있어 후대에 오리정골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지리99 지명탐구방 꼭대님의 '오리정골' 게시물>
계곡의 물소리를 좌측에 두고 산길을 고집해 계속 걷는다.
마을 터가 계속 이어지고 길은 비교적 등고선과 같이 완만하다.
지리산 남북을 잇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는 설명이 실감 날 정도로
무너진 마을 터가 방대하고 길의 크기와 흔적이 예사롭지 않다.
우거진 숲길이라 걸음을 멈추면 바로 시원함이 온몸으로 느껴지지만
걷는 동안 땀은 비 오듯 흐른다.
계곡 방향에서 사람 소리가 들려 가만히 들어보니 제법 많은 인원이 계곡치기로
올라가는 중이다.
두 번째 계곡을 건너면서 배낭을 내리고 쉬어간다(9시 20분).
이번 산행은 단출하고 가벼운 인원이다.
계곡을 건너 좌측사면으로 길이 열린다.
또렷하던 길이 흐려지고 또다시 또렷해지고를 반복하다.
무너져 없어진 뒤 우회 길이 길의 맥을 이어간다.(9시 47분)
주등산로와 만나기 전 한 번 더 쉰다.
계곡치기로 올라오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시끌벅적하게 계곡이 요란스럽다. (10시 28분)
주등산로를 따라 잠깐 걸어 합수부의 우측 계곡으로 들어가기 위해 주위를 살핀다.
계곡치기로 올라오든 사람들이 일부 주등로로 가고 난 뒤 우측계곡으로 들어간다.
합수부에서 오리정골 상부를 생각하고 들어가면 계곡의 우측이 된다.
트랙을 따라 선을 그어도 일직선이니 계곡의 방향을 찾기가 쉽다.
이곳에서부터는 계곡을 치고 오른다.
희미한 길 잔가지와 성가신 잡풀보다 오히려 편하다.
수량이 줄어 바위를 타고 넘기도 좋다.
미끄러운 구간 조심할 것을 당부한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계곡치기의 재미에 한동안 즐거워한다.
상부로 갈수록 물줄기가 가늘지만, 계곡을 차고 넘치는 소리는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다.
우거진 숲사이로 하늘먼당을 찾아보지만, 아직도 열리지 않는다.
체력 좋고 감성도 풍부한 형님이 앞서 가다 일행을 기다린다.
늘 꼼꼼히 일행들을 챙기는 맏형님이시다.
늦게 얻은 아들이 입대하고 첫 면회를 갈 시점에 전국을 강타한 메르스로
면회가 취소되어 아쉬움을 지리산행으로 대신하는 중이다.
크고 작은 바위로 건너뛰고 올라서며 계곡을 치오르면 온몸이 땀으로 젖어가는 맛과
아무 때나 엎드려 세수 한 번에 지리산을 묻힐 수 있는 이런 것은 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흐리든 날씨가 갑자기 햇볕을 쏟아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어둑해진 하늘에서 빗방울을 뿌려주기도 한다.
소나기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적중할 줄은 몰랐다.
배낭 위로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원해서 그냥 맞아도 좋다.
한차례 비가 지나가고 구름만 가득할 뿐 다행히 비는 멈추었다.
무너진 작전도로를 만난다. (12시 9분)
50년가까이 지난 작전도로의 흔적은 자연이 치유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시간이다.
위로 올라서자 낯익은 시그널들이 반기듯 팔랑거린다.
물길이 소멸한 계곡은 이제 계곡이라 할 수 없는 실개천으로 상부를 향한다.
길도 또한 주능의 입성을 알리듯 일어선다.
뒷다리가 제법 땅기는 맛이다.
주능선에 붙기까지 100여m가 남았다.
희미한 가운데 여러 갈래로 올라간 발자국이 헛갈리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되도록 트랙을 따라 한 길에 집중한다.
바른재다. (12시 43분)
의신의 북쪽에서 백무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 고개에서 서남쪽을 바라보면 안당재, 바깥당재, 당재의 세고개가 일직선상으로 보인다 하여
[바른재]라 한다.
[바른재], 즉 [직치((直峙)]라는 말입니다.
[직치((直峙)],
[곧은재]혹은 [바른재]가 모두 같은 뜻으로 같은 곳을 지칭함을 알 수 있습니다.
<지리99 지명탐구방 꼭대님의 '오리정골' 게시물>
맨 뒤에 왕시루봉이 보이고 그 앞에 농평마을이 있는 뒷당재,
그리고 그 앞에 범왕마을과 삼정을 잇는 앞당재가 일직선상에 놓여있고
삼정마을에서 능선까지 일직선으로 올라오는 골짝이 바로 오리정골이다.
오리정골을 제대로 올랐다면
주능선상에 올라 서서 바로 사진과 같은 풍경이 보여야 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올라 온것이다.
바른재에 올라서자
탄성이 터진다.
그것은 다 올랐다는 안도감만은 결코 아니다.
오리정골 마지막 구간에는 땅 만 보고 다리가 후들거리도록
뺑이치며 오르다가 탁 트인 조망과 함께 불어오는 바람은
'이것이구나.'
'이래서 산에 오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보상을 해주기 때문이다.
벽소령을 향한다.
구벽소령이라 표시한 곳에서 뒤를 기다린다.
흰씀바귀.
계곡치기와 된비알 후에 평평한 산길을 만나니 그야말로 고속도로다.
이제는 길 좌우의 야생화가 눈에 들어오고
비록 흐린 날이라 온전히 트이진 않았지만 산 아래와 주능선의 조망을 즐긴다.
걸음이 가볍다.
삼보삼락의 길이다.
벽소령에 도착한다. (1시 18분)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남에서 북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불어 능선을 타고 넘었다.
혁명의 바람 냄새가 난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함성과 총구의 화약 냄새 담긴 바람이다.
한 서린 눈물을 머금은 바람이다.
불지 않는 바람을 어찌 바람이라 하며
숨 쉬지 않는 사람을 어찌 살았다 하겠는가
불어오는 바람을 살아있는 나는 한껏 들이마신다.
피의 능선이라 불리는 이 구간에 서면 빗점골의 사람이 떠오른다.
살면서 무엇인가에 목숨을 걸어 본 적이 없는 나는
이제는 지구상에서 이미 소멸한 이념을 신봉했지만,
그의 확고부동한 신념만은 존경한다.
<벽소령 내음> 이성부.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먹고
남쪽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여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어지지만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추위를 느낄 만큼 바람이 세다
취사장 바닥에 상을 차렷다.
넓고 큰 잔이라 한 번에 붇는 술의 양도 많다.
고기를 굽고, 밥을 하고, 술잔을 연거푸 받는다.
오랜만에 발목의 통증 없이 가뿐한 산행이 기쁘다.
그래서인지 술잔도 가볍다.
내려갈 길이 또한 가벼우니 마음도 편하다.
취했다.
내 취함에는 괴로움이 없다.
그래서 술만 들어가면 히죽거린다.
표현하지 않으면 사랑은 환상이다.
나의 환상은 술이 들어가면 사랑이 된다.
미래의 희망은 막연하고 현재의 고통은 지겹지만
한 잔의 술이 때로는 위로가 되고 강렬한 의지가 된다.
산다는 것은 늘 즐거움의 양지보다는 괴로움의 그늘이 더 짙은 법이다.
그래서 산을 오르고 희망하고
내게 잔을 채워주고 함께 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술을 마신다.
단지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사랑도 함께 마신다.
취했으나 돌아가지 못할 정도가 아니고
취했으나 혼돈하거나 혼미하지 않을 만큼이다.
딱 이 만큼이 행복지수가 만땅인 시점이다.
내려가야 할 때를 잊지 않을 만큼 취한다. (15시 00분)
의신방향으로 표시된 안내를 따라 내려간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그냥 비를 맞고 간다.
시원하다.
표현되지 못한 감성은 아쉽다.
그래서 느낌을 한마디씩 해보라 한다.
행동이 없는 생각은 허무한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또 오겠냐고 물었다.
가고 싶다는 곳이 즐비했다.
남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간섭과 감정을 투자하지 않는다.
산꾼은 애정없는 산을
또다시 오르지 않는다.
불을 켜고 내려오든 추억을 더듬었다.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니 30분은 웃을 수 있는 지난날이다.
덕분에 길은 한참을 줄인다.
좋은 길이지만 쉬어간다.
비와 섞인 땀이 짭짤했다.
아직도 시원함을 잃지 않은 캔맥주로 갈증을 푼다.
삼정마을이 보인다.
급경사의 미끄러움에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웃을 수 있을 만큼 아팠다.
마을로 내려설 때 개가 짖었다.
개소리가 반가웠다.
아직은 조금 힘들어하는 막내가 안쓰럽지만
점점 좋아지는 체력과 지리산적응만으로도 보람이다.
산행을 마칠 때까지 비가 내린다.
어젯밤에는 잠을 자지 못했다.
잠들지 못한 시간을 더한 숙면은 산행 후 찾아온다.
그 숙면에서 깨어나는 아침은
산행의 희열과 다른 벅적지근한 행복감이다.
나는 아침의 벅적함이 은근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