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산행

2021.03.14 깃대봉

지리99 수야 2021. 3. 27. 17:11

깃대봉

 

행동팀121- 94차 지리산행

일시:2021년 03월 14일

산행자:황순진, 권영구, 최정남, 최옥희, 김은의, 성주숙, 수야 (7명)

걸어간 길:천광사 주차장- 903봉 능선- 동부 능선- 깃대봉- 대밭골-천광사

산행시간:07시 41분~14시 09분 (6시간 28분) 5.88km

2021-03-14 깃대봉.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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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여승 설요(?~693)는 15세 되던 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곧장 삭발을 하고 세속을 떠나 승려가 되었다.

세상의 무상함을 극복해보고자 하였으나, 꽃다운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람 구경하기도 힘든 적막한 산골에서 아름다운 꽃들이 향기를 발하며 흐드러진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며 설레는

자신의 마음도 가눌 길 없었든 그녀는 20세 무렵 승복을 벗고 환속을 결심한다.

꽃들이 피어나는 봄, 주체할 수 없었든 그녀가 지은 시(詩)가 반속요(反俗謠)이다.

구름같이 무심해지니 생각이 맑아지는데

적막한 경지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구나

아름다운 꽃향기에 마음이 설레는데

어찌할거나 꽃다운 이내 청춘을.

 

거의 매주 산에 갔다.

봄이 왔다고 하였으나, 봄 인가하면 봄이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꽃이 피어서 봄인가 하였다.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꽃이 피어서 봄이 된 것이 아니라 봄이 되니 꽃이 피는 것이었다.

여승 설요의 주체 못 할 봄 설렘은 내게는 너무 멀고 아득하였다.

꽃다운 청춘이 아니라서 느껴지지 않는 무딘 무덤덤인지 조차 헤아려지지 않았다.

산행을 기록할 생각조차 가지지 않은 걸음은 가벼웠고, 산행 거리는 짧고 가까웠다.

이 기간 나는 산의 깊숙한 안쪽이나 높은 곳을 지향하지 않았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지리산의 높은 곳을 그저 바라보다 돌아오곤 하였다.

오늘에서야 겨우 그 헐겁고 얇은 걸음이라도 가볍게 쓰고자 마음을 내었다.

2021년 2월 28일 법화산에서 중경팀 시산제를 올렸다.

2021년 3월 7일에는 금대산에서 독오당 시산제를 올렸다.

독오당 백 열 번째 지리산행이었다.

오랜만에 대장님과 엉겅퀴 형님이 참석하였다.

 

나는 내년에도 여전히 이 산 앞에 엎드려 빌고 싶다.

산에 들 때마다 다치는 일 없이, 걸음 하는 곳마다 좋은 것들 많이 볼 수 있게 해 주시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생각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 달라고.

 

산에서 시간과 바람은 맑다.

우리 모두 언제나 이곳에서는 늘, 그 시간과 바람과 같았다.

 

3월에 들고 두 번째 산행은 산청군 금서면 지막리에서 동부 능선 깃대봉을 향했다.

왕등재 부근 동부 능선에 올라 깃대봉과 도토리봉을 지나 밤머리재까지 걷고자 계획하였다.

금서면 왕등재 아래 절골 상부 천광사까지 차로 올랐다.

절골은 예전에 ‘안심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 골’이라 부른다.

지막(紙幕)의 지명은 본래 芝幕이었다.

마을 뒷산에 산약초의 하나인 지초(芝草)가 많아 막(幕)을 쳐놓고 채취하였다 하여 芝幕이라 불렀으나,

이후 닥(楮)이 더 유명해지며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여 종이 ‘지’(紙) 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옛날에 고개를 넘을 때 밤 한 말을 지고 가다 다 까먹으면

고개에 오른다고 하여 ‘밤말재'라고 했는데 거기서 변형되어 지금은 ’밤머리재‘라 불리는

마을 동쪽 고개를 넘으면 덕산으로 이어진다.

덕산에 은거하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과 산청에 계셨던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선생은

사제지간으로 이 고개를 넘나들며 서로 교류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막 마을 초입에 있는 ‘자연동천’(紫煙洞天)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호리병 목처럼 잘록한 이곳 양편으로 고목이 서 있고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며,

그 옆 절벽에 ‘자연동천’(紫煙洞天), ‘춘래대’(春來臺), ‘덕계오선생장구지소’(德溪吳先生杖?之所)가 새겨져 있다.

 

춘래대 석각은 1902년에 새겼으며, 10년 뒤인 1912년에 그 위에다 춘래정을 짓기 시작하여 1913년에 낙성식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다.

덕계 선생이 스승인 남명 선생을 만나면 '봄과 같이 따스함을 느껴 스승이 오는 것이 마치 봄이 오는 것과 같다' 하여 춘래(春來)라고 하였다.

이 춘래를 읽으며 내 생각을 세워 보았다.

나에게 독오당이 춘래였고, 중경팀의 인연들이 춘래였으며, 지리산으로 맺어진 인연들이 모두 춘래(春來)였다.

캠핑장으로 올라가는 길에 차를 세우고 춘래대 석각을 사진 찍었다.

춘래정을 찾아 올라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고, 저 위 어디쯤 있겠거니 짐작하고 지나쳤다. 지금 생각하니 아쉽고 답답하다.

 

지막 계곡 캠핑장 위 천광사 입구 공터에 주차하고 다시 캠핑장 쪽으로 조금 걸어 내려왔다.

캠핑을 즐기는 텐트들이 많았다.

부지런한 몇 사람이 나와 서성거릴 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주위는 아직 고요하였다.

 

왕덕재골과 북호골 중간 사이 우뚝한 능선으로 올랐다.

묘의 정면이 올라간 능선이다.

오룩스 맵에는 아직 그어지지 않은 길이다.

우측의 저 골짜기가 왕덕재골이며 골을 따라 오르면 왕등재에 이른다고 지도의 트랙은 표시되어 있었다.

 

 

묘를 지나 오르는 길은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의 모습이었고, 한 고개를 넘고 나자 산의 모습이 비로소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까까머리 고개를 넘어서고 산속으로 접어들자 길은 명확하고 확실한 모습으로 주능선을 향해 있었다.

낙엽이 수북하게 쌓인 산길은 걷기에 편하고 포근했다.

이곳 산에는 봄이 오는 듯 마는 듯 겨우 몇 개의 진달래가 애처롭게 바람에 떨고 있었다.

처음 듣는 낯선 산 새소리에 과하게 반응하여 한차례 웃음이 지나가자 벌써 주능선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동부 능선에 올라서자 눈이 내린 상봉이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우뚝 솟아서 어디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지리산 전체 공간 정서를 지배하고 장악하는 위세는 역시 힘세고 위엄이 서 있었다.

 

산의 아랫도리에는 봄 볕이 따사로워 허전함이 없어 보였다.

왕산과 필봉이 건너에 솟아 있었다.

몸을 틀어 보면 웅석봉도 가까이 보였다.

능선길을 편하게 걸어 깃대봉에 11시에 도착했다.

깃대봉에서 잠시 서서 휴식을 하였고,

아무 생각 없이 반듯한 길을 따라 무심히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오는 수고를 한차례 했다.

제대로 길을 따라 다시 밤머리재를 향해 나아갔다.

 

 

10시가 조금 지나면서부터 아침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디서 밥 먹을 것인지를 물었다.

11시가 넘어서자.

다시 묻는 목소리에는 칼칼하고 뾰족하며 빡빡한 기운이 묻어났다.

더 이상 묵살하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터이다.

걸음 빠른 영구 형님은 눈치도 빨라 점심자리를 잡아 놓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밥은 위험하고 급박한 것이다.

밥은 그리 만만하거나 가벼운 것이 아니다.

밥을 벌기 위해 피 땀을 쏟고, 억울함과 참담함과 분노마저도 구겨서 삭힌다.

밥 벌이는 고달프고 애잔하다.

빼앗기거나 잘못 건드리면 죽음도 불사하는 것이 밥이다.

밥은 가엽고도 가여운 목숨이다.

그래서 밥은 먹어야 하고, 밥 먹을 때 만이라도 세상의 근심은 저 먼 곳에 두어야 한다.

밥벌이의 가여움에서 벗어나 산에서 즐기는 밥시간은 맑았다.

그곳에서 피워 내는 이야기는 밝았다.

두 시간여를 밥 먹는 일에 집중하였고, 한없이 즐거워하였다.

하물며 밥 먹으러 산에 온 것 같다고 하였다.

배가 불러 걸음은 더욱 느릿하고 거만해졌다.

도토리봉이 배부른 눈으로 올려다보니 히말라야보다 더 높아 보였다.

얍삽한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그것은 얍삽하지만 대견스럽고 훌륭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지도를 살펴보니 대나무골로 째고 내려가면 산행은 완벽하게 원점회귀가 된다.

이 훌륭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 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이 사람들은 그 길로 들어 설 자세들을 갖추고 있었다.

완벽한 만장일치가 이루어지는 경이로운 일체감이었다.

 

 

나는 사람은 오래되고 자주 만나서 정이 들고 편한 사람이 좋고

산 길은 셀레이고 궁금하고 기대되는 처음 가는 길이 좋더라

그래서 산 길의 우선순위는 늘 처음 가보는 길이다.

조선 영조 때 학자 신경준(1712~1781)은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다'하였다

그 위를 '걸어가는 자가 주인이다'는 말은 '걸어가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라는 말이고, '걸어갈 때만 주인이다'라는 말이다

내가 네에게 갈 때, 너는 내가 네에게 온다라고 말한다

길에서는 옴과 감이 다르지 않으므로 길에는 그래서 주인이 따로 없는 것이다.

길과 삶은 설명될 수 없고 경험될 뿐이다.

가보아야 알아지는 것이고, 살아 보아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가보지 않은 처음 가는 길이다.

이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그래서 마땅하고 당연하게 설득력이 정당해 보였다.

도토리봉을 지나 밤머리재까지 걸어야 하는 거리가 멀어서 굳이 꼭 이 길로 질러 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가는 길 - 도종환 -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없다

다만 내가 처음 가는 길일 뿐이다

누구도 앞서 가지 않은 길은 없다

오랫동안 가지 않은 길이 있을 뿐이다

두려워마라 두려워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결국 이 길을 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갔던 길처럼 선명하고 확실한 완벽한 길이 있었다.

짧고 간결한 길은 곧장 천광사 바로 위 식수원에 닿았고, 삼성각을 지나자 경내로 들어서게 되어 있었다.

 

이 절은 어수선하고 종잡을 수 없어 보였다.

이해 못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곳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찰에서는 보지 못한 단군상도 있었고 폐허인가 싶기도 한 건물들이 보이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나 방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찰에 남근석이 즐비하여 요상스러웠다.

여느 사찰과는 조금 달라 보이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고 이상하기도 하였다.

6시간 30분 산행을 하였고 2시간을 먹고 놀았으니 4시간 30분을 걸었다.

그 걸음의 시간과 거리가 멀고 짧음에 불만과 이의가 없었고 모두가 한 때를 즐겼으니 흡족하였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이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가 된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다.

사람도 같다.

보리밭에 난 밀처럼 살면 안 된다.

제가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된다.

타고난 자질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잡초로 살았어야 쓰겠는가

만나면 마치 봄이 오는 것과 같이 따스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산행은 짧았으나 어울린 사람들과의 춘래(春來)​를 보았으니 나는 되었다 싶었다.

망구 내 생각일 뿐이지만.​

일찍 끝난 산행으로 이후의 시간은 봄나물을 뜯고 체험해 보지 못한 일정으로 보냈다.

이 날 뜯어 온 냉이로 몇 끼의 밥을 먹었다.

소설가 김훈은 냉잇국에서는 겨울을 벗어나는 해토 무렵의 흙냄새가 나고, 그 흙에 스미는 봄볕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이 국물을 마시면 창자 속에서 봄이 온다고 하였는데

몇 끼를 먹어보아도 나는 창자 속에서 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내가 덜 살아내서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내 미각과 감성이 너무 메말라 느껴지지 못하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모르겠다.

다만, 냉이를 먹고, 꽃이 피어나고 봄볕이 따스하게 변하니 봄이구나 하고 느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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